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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

때로는 눈을 감아야 진실이 보인다

메디컬 평점 ★★★☆☆ 소통 없는 세상을 향한 묵시록

평범한 어느 날 오후, 한 남자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뉴욕 도심 한복판에서 차를 세운다.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준 행인과 그를 치료한 안과의사 등 남자와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차례대로 눈이 먼다. 그러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접촉에 의해서 전염된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병의 원인과 치료법은 밝혀지지 않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한편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한다. 그 중에는 안과의사인 남편을 지키기 위해 앞을 볼 수 있지만 눈먼 자처럼 행동하는 한 여인(줄리안 무어 분)이 있는데….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고 단 한사람만 이 모두를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이런 가정 아래 혼란에 휩싸인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면서 올해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실명 바이러스’ 있다?
영화 초반, 차를 운전하던 한 남자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운전대를 놓는다. 그가 느끼는 증상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것. 운전은커녕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상태다. 다행히 친절한 행인이 대신 운전해 그를 집에 데려다 주지만 대가로 남자의 차를 훔친다.

그날 저녁 남자는 아내와 함께 안과를 찾는다. 하지만 의사는 눈 기능이 모두 정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날 밤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은 한명씩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은 점차 커져 급기야 눈먼 자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시력을 잃는 일이 가능할까?

영화에서는 접촉으로 실명이 일어난다고 가정한다. 마치 급성출혈성결막염(아폴로 눈병)이 접촉하면서 바이러스로 전염되는 것처럼 만약 ‘실명 바이러스’가 있다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된 ‘실명 바이러스’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연변이로 실명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흔치는 않지만 현재로선 망막동맥폐쇄와 폐쇄각녹내장으로 갑자기 시력을 잃을 수 있다. 망막동맥폐쇄는 심장 부정맥으로 생긴 색전이 빛을 감지하는 망막의 주요 혈관을 막아 생긴다.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로 망막 동맥이 두꺼워진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이때 환자는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고, 발병 후 2시간 안에 혈액순환이 안되면 실명한다.

폐쇄각녹내장은 안압이 갑자기 높아지는 질병이다. 눈에 달무리가 보이면서 심한 두통과 안통이 뒤따른다. 48시간 내 안압을 조절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을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발병률이 높고 50~60대 여자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질병은 영화에서처럼 전염성은 아니다.

한편 보통 세 살 이전에는 시력이 완성되기 전이므로 사시나 약시처럼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증상은 정확한 검진을 받아야 한다. 세 살 이후에는 가족력이나 당뇨, 고혈압 같은 질환이 없다면 1~2년마다 정기적인 안과 검사로도 충분하다.

영화 중반, 눈먼 자와의 접촉으로 병이 전파된다고 생각한 정부는 이들을 외부와 차단된 폐쇄병동에 가둔다. 가장 먼저 발병한 남자와 그를 검진한 안과의사, 그리고 남편인 안과의사를 지키기 위해 눈먼 자로 가장한 아내도 입원한다. 하지만 병원에는 그들을 도울 의사나 간병인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걸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결국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보살피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깨끗했던 병원은 쓰레기와 배설물로 가득차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과 질병으로 신음한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인간으로서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기막힌 일들이 당연한 듯 벌어지고 아내는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는 말로 처절한 심정을 표출한다.

우리가 오감(五感)이라 부르는 신체 감각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특히 눈은 단순히 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정보의 주요 입력 기관이다. 모든 정보량의 85% 이상이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눈 기능이 떨어지면 그만큼 인간의 활동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눈 멀면 코와 귀가 대신

그런데 인체란 융통성이 있어서 눈 기능을 상실하면 청각과 후각, 촉각, 미각의 나머지 네 감각이 발달한다. 영화에서도 병원 수용자들 중 선천적으로 맹인인 자가 끼어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청각과 후각이 매우 발달했다. 즉 청각과 후각은 평소에는 시각에 비해 퇴화돼있지만 맹인이 된 뒤에는 급속히 발달해 시각의 역할을 대신한다. 맹인 퇴역 장교가 주인공인 영화 ‘여인의 향기’(1992년)에서 주인공 프랭크 슬레드(알 파치노 분)는 예리한 후각과 청각으로 정상인 못지않은 탱고 실력을 뽐낸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개나 고양이는 색깔을 구별할 수 없는 색맹이지만 청각과 후각이 매우 발달해 캄캄한 밤이 오히려 활동하기 좋다. 또 방울뱀의 눈은 맹인 수준이지만 적외선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사냥에 유리하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촉각과 미각도 매우 발달했다. 대뇌가 지배하는 신체 영역을 지형도(topographic map)로 그려보면 손이 차지하는 부위가 매우 넓다. 이는 손이 정교한 운동 능력과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미각은 단맛, 신맛, 쓴맛, 짠맛의 4가지로 구분되는데 실제 느끼는 맛은 이들의 조합에 의한 것으로 매우 복잡하다. 혀에는 맛을 감지하는 수용체인 미뢰가 약 1만 개 있어 이런 복잡한 맛을 감지한다. 온도나 혀의 촉각, 냄새도 맛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영화에서 청각과 후각이 발달한 맹인은 권총을 가지고 있던 남자와 함께 폭동을 일으켜 병원의 식량배급을 독점한 뒤 병동마다 귀중품을 요구하더니 급기야 여성을 ‘재물’로 바치기를 요구한다. 마치 모파상의 단편소설 ‘비곗덩어리’를 연상시키는 이런 상황에서 병동 여자들 전체가 무월경에 시달린다.

월경은 자궁벽에 착상된 난자가 수정되지 못한 채 자궁점막세포와 함께 떨어져 배출되는 현상이다. 한 달에 한 번 4~5일 동안 지속되는 일이 보통이다. 무월경의 가장 큰 원인은 임신이며 수유 중이나 산욕기에도 무월경이 나타날 수 있다.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에도 6개월 이상 월경이 없는 일은 드물다.

간혹 영양실조나 생활환경이 급작스럽게 변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월경이 올 수 있지만 수개월 안에 회복된다. 만약 임신이 아닌데도 6개월 이상 월경이 없다면 산부인과 진찰을 꼭 받아야 한다.

선천적 맹인 시력 되찾는 건 불가능
영화 후반, 주인공과 몇 사람은 지옥 같은 병원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현실은 참혹하게 변해버린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거리에는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개들과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고, 백화점 식품매장엔 굶주린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룬다. 그러던 어느 날 맨 먼저 시력을 잃은 남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앞을 볼 수 있다!”고 외친다. 남자의 외침소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가 맨 먼저 발병했으니 다음에는 자신이 눈을 뜰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영화에서처럼 시력을 잃은 사람이 한순간에 눈을 떠 앞을 보는 일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망막은 생후 수개월 이내에 시세포에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퇴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기의 망막에 잘 생기는 신경모세포종의 경우 너무 늦게 발견하면 암 덩어리를 제거해도 시력을 되찾지 못한다. 다만 백내장처럼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는 망막의 시세포가 정상이기 때문에 수술과 같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

강석훈 전문의 >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006년부터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방송된 SBS 의학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보조작가로 활동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의학회에서 건강정보심의위원회 실무위원을 맡아 잘못된 건강정보를 바로잡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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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훈 가정의학과 전문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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