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레고’ 블록을 조립하면 공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자동차와 비행기도 만들 수 있다. 단순한 모양의 블록들이 모여 개별 블록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갖는 복잡한 구조물로 재탄생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들도 레고 블록 같은 분자들로 이뤄진다. 분자들은 결합해 거대 분자인 초분자를 만든다. 단백질로 된 껍질이 핵산을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도 일종의 초분자이며 우리 몸을 이루는 DNA도 초분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자들이 모이면 개별 분자가 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한다.
‘헤쳐모여~’ 똑똑한 나노분자
연세대 화학과 이명수 교수가 이끄는 초분자 나노조립체 연구단은 분자가 모여 스스로 특정한 모양의 초분자를 만드는 현상을 연구한다. 초분자를 만드는 ‘블록’인 단위분자는 긴 막대에 꼬불꼬불한 사슬이 붙은 모양이다. 사슬은 물을 좋아하는 친수성을 띠고 막대는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을 띤다. 연구단은 이 분자를 ‘막대-사슬’ 분자라고 부른다.
‘막대-사슬’ 분자를 물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유유상종’(類類相從). 물을 싫어하는 막대 부분은 막대끼리, 물을 좋아하는 사슬 부분은 사슬끼리 알아서 뭉친다. 소수성 막대 부분은 물에 닿는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뭉치는 반면, 친수성 사슬 부분은 최대한 물과 가까운 쪽으로 모인다. 이런 성질 때문에 막대-사슬 분자는 특정한 조건을 주면 스스로 수십에서 수백nm(나노미터, 1nm=10-9m) 크기의 초분자를 만든다. 이런 현상을 ‘자기조립’(self-assembly)이라고 하며 이때 형성된 초분자를 나노조립체라고 한다.
초분자는 어떤 힘으로 형태를 유지할까. 초분자를 구성하는 ‘블록’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분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온결합이나 공유결합보다 세기가 약한 ‘2차결합력’이 작용한다. 2차결합력의 하나인 수소결합은 공유결합과 비교했을 때 결합력이 100분의 1 정도로 작다.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분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커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 된다. 게다가 ‘막대-사슬’ 분자들은 스스로 결합하기 때문에 초분자를 만들기 위해 복잡한 합성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이 단장은 “막대와 사슬에 쓰이는 분자의 종류와 크기, 첨가물질, 용매의 온도, pH 같은 조건만 변화시키면 자기조립 현상을 이용해 원하는 모양과 크기의 초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구멍을 열고 닫는 똑똑한 나노공
2007년 연구단은 세포 안으로 약물을 운반하는 데 쓸 수 있는 지름 500nm의 나노공을 만들었다. ‘나노공’은 온도가 변하면 표면에 있는 구멍을 스스로 열고 닫는다. 나노공은 친수성 사슬이 표면을 둘러싸고 그 안은 소수성 막대들이 채운다. 가장 안쪽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단백질이나 약물을 담아 세포 안으로 운반할 수 있다.
평소 나노공 표면에는 벌집처럼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런데 온도를 높이면 사슬들이 나노공 표면의 구멍을 막는다. 온도가 올라가면 운동에너지가 증가한 물 분자가 활발히 움직이며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게 돼 물에 풀어져 있던 사슬들이 공 표면에 달라붙는다. 수영을 할 때 물 속으로 들어가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지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머리 표면에 머리카락이 모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단이 개발한 나노공은 나노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2008년 1월 특집기사로 소개됐다.
나노공은 화장품이나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기화합물의 ‘합성공장’으로도 쓸 수 있다. 연구단은 유기화합물을 나노공과 함께 넣으면 물을 싫어하는 유기화합물이 물을 피해 나노공 제일 안쪽의 빈 공간으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교수는 “나노공을 이용하면 화장품이나 의약품을 만들 때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노공 처럼 좁은 공간 안에 갇힌 분자들은 충돌할 확률이 높아 반응이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노공은 구멍이 열린 상태에서 약물을 넣고 온도를 높이면 구멍이 막혀 약물을 가둘 수 있어 약물전달체로도 쓸 수 있다. 나노공을 이용하면 약물 전달 효율이 크게 올라간다. 이 단장은 “대부분의 약에는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분자들이 많다”며 “이 분자들은 물에 잘 녹지 않기 때문에 세포 안으로 흡수되는 비율이 낮아 약효가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약물을 친수성 사슬로 둘러싸인 나노공 안에 넣으면 세포 속으로 쉽게 들어간다. 입에 쓴 약을 아이들이 삼키기 쉽도록 하기 위해 달콤한 당분으로 감싼 것과 같다.
2007년에는 지름 1.5nm, 길이 10nm의 ‘나노스프링’도 만들었다. 연구단이 막대-사슬 분자에 금속을 첨가하자 분자들이 나선형으로 꼬이며 초분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분자는 모양뿐 아니라 실제로 스프링과 같은 기능을 한다. 나선형초분자는 냉각시키면 부피가 줄며 수축하고 가열하면 다시 팽창한다. 이 교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나노기계나 약물 운송체가 혈관 벽에 부딪힐 때 받는 충격을 완충시키는 데 나노스프링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치료에 쓰이는 인공바이러스
연구팀은 치료유전자와 약물을 세포 안으로 전달하는 인공바이러스도 만들었다. 유전자치료에 바이러스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자기 복제기능은 없애고 유전자 전달만 할 수 있도록 바이러스를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인공바이러스다.
자기조립으로 초분자를 만든 뒤 DNA나 RNA 같은 유전 물질을 넣어 세포 내에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 이 단장은 “인공바이러스는 실제 바이러스와 비교하면 아직 원시적 수준이지만 자기복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들어가 안전하게 약물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개념의 항생제도 제시했다. 몸 안에 들어온 박테리아를 꼼짝할 수 없도록 동여매는 ‘나노밧줄’이다. 기존의 항생제 대부분은 박테리아의 생체대사를 차단해 박테리아를 제거했다. 연구단은 막대-사슬분자를 수없이 연이어 폭 약 7nm, 길이 50~100nm의 긴 밧줄을 만들었는데, 사슬 부분에 만노스라는 당 성분을 사용했다. 대장균을 포함해 병원성 박테리아들 대부분은 섬모에 만노스와 잘 결합하는 단백질을 갖고 있다. 대장균을 배양한 배지에 나노밧줄을 넣었더니 섬모에 밧줄이 달라 붙어 여러 마리의 대장균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었다.
연구단은 2005년 이후로 나노조립체의 활용도를 높일 방안을 연구한다. 연구팀의 임용범 박사는 “활성도가 높은 친수성 탄수화물과 친수성 단백질을 사슬 부분에 사용하면 초분자의 기능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모양의 초분자라도 어떤 사슬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암을 찾아내 약물을 전달할 수도 있고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데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나노조립체 분야는 활용 가능성이 높은 블루오션인 셈.
연구단이‘네이처 머티리얼스’와 ‘사이언스 특집기사’를 포함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횟수는 110건이 넘고 피인용횟수는 1600회에 이른다.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연 요청에 이 단장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이 단장은 국제 학술회의의 기조강연과 초청강연을 최근 3년 동안 30회 이상 맡았다. 나노조립체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단의 성과를 보여주는 지표다. 하지만 “나노조립체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며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이 단장. 똑똑한 나노분자처럼 힘을 모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연구단의 행보가 주목된다.
인터뷰_이명수 단장
보이지 않는 세계를 디자인한다
최초로 초분자를 합성해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립한 사람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의 장 마리 렌 교수. 하지만 현재 나노조립체 연구 분야의 중심에는 이 단장이 이끄는 연구단이 있다. 이 단장은 다양한 형태의 나노조립체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와 연계시켜 세계의 흐름을 선도한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이 단장은 나노조립체 기술을 생물학에 접목시켜 초분자로 생체기능을 제어할 수 있음을 보였다.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만남’을 주선한 셈이다.
나노조립체 연구는 기본적으로 화학이 근본이지만 다양한 학문 영역을 융합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단장은 평소 “학문에는 절대적인 경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전공인 화학뿐 아니라 생물학, 나아가 물리학까지도 폭넓게 공부한다.
2002년 창의연구단으로 선정된 뒤 이 단장과 연구단은 연구비를 아껴 그토록 원했던 최첨단 투과전자현미경(TEM)을 구입했다. 7억 원이라는 거금이 들었지만 연구단은 투과전자현미경을 200% 이상 활용해 ‘네이처’, ‘사이언스’, ‘케미컬 리뷰’에 매년 새로운 논문을 게재한다. 광학현미경으로는 나노조립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와 기능을 관찰하기 위해 투과전자현미경이 꼭 필요하다.
이 단장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보다 설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연구단은 새로운 나노조립체를 만들면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며칠이고 밤을 꼬박 샌다. “바쁜 연구일정과 주변의 기대 때문에 힘들지는 않냐”는 질문에 이 단장은 이렇게 되물었다.
“취미 생활을 하면서 힘들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취미’인 연구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는데 힘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 단장은 “자기조립 현상은 조물주가 생명체를 만든 원리를 모방한 것”이라며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생명공학이나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들도 레고 블록 같은 분자들로 이뤄진다. 분자들은 결합해 거대 분자인 초분자를 만든다. 단백질로 된 껍질이 핵산을 감싸고 있는 바이러스도 일종의 초분자이며 우리 몸을 이루는 DNA도 초분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자들이 모이면 개별 분자가 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한다.
‘헤쳐모여~’ 똑똑한 나노분자
연세대 화학과 이명수 교수가 이끄는 초분자 나노조립체 연구단은 분자가 모여 스스로 특정한 모양의 초분자를 만드는 현상을 연구한다. 초분자를 만드는 ‘블록’인 단위분자는 긴 막대에 꼬불꼬불한 사슬이 붙은 모양이다. 사슬은 물을 좋아하는 친수성을 띠고 막대는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을 띤다. 연구단은 이 분자를 ‘막대-사슬’ 분자라고 부른다.
‘막대-사슬’ 분자를 물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유유상종’(類類相從). 물을 싫어하는 막대 부분은 막대끼리, 물을 좋아하는 사슬 부분은 사슬끼리 알아서 뭉친다. 소수성 막대 부분은 물에 닿는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뭉치는 반면, 친수성 사슬 부분은 최대한 물과 가까운 쪽으로 모인다. 이런 성질 때문에 막대-사슬 분자는 특정한 조건을 주면 스스로 수십에서 수백nm(나노미터, 1nm=10-9m) 크기의 초분자를 만든다. 이런 현상을 ‘자기조립’(self-assembly)이라고 하며 이때 형성된 초분자를 나노조립체라고 한다.
초분자는 어떤 힘으로 형태를 유지할까. 초분자를 구성하는 ‘블록’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분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온결합이나 공유결합보다 세기가 약한 ‘2차결합력’이 작용한다. 2차결합력의 하나인 수소결합은 공유결합과 비교했을 때 결합력이 100분의 1 정도로 작다.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분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커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 된다. 게다가 ‘막대-사슬’ 분자들은 스스로 결합하기 때문에 초분자를 만들기 위해 복잡한 합성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이 단장은 “막대와 사슬에 쓰이는 분자의 종류와 크기, 첨가물질, 용매의 온도, pH 같은 조건만 변화시키면 자기조립 현상을 이용해 원하는 모양과 크기의 초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구멍을 열고 닫는 똑똑한 나노공
2007년 연구단은 세포 안으로 약물을 운반하는 데 쓸 수 있는 지름 500nm의 나노공을 만들었다. ‘나노공’은 온도가 변하면 표면에 있는 구멍을 스스로 열고 닫는다. 나노공은 친수성 사슬이 표면을 둘러싸고 그 안은 소수성 막대들이 채운다. 가장 안쪽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단백질이나 약물을 담아 세포 안으로 운반할 수 있다.
평소 나노공 표면에는 벌집처럼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런데 온도를 높이면 사슬들이 나노공 표면의 구멍을 막는다. 온도가 올라가면 운동에너지가 증가한 물 분자가 활발히 움직이며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게 돼 물에 풀어져 있던 사슬들이 공 표면에 달라붙는다. 수영을 할 때 물 속으로 들어가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지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머리 표면에 머리카락이 모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단이 개발한 나노공은 나노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2008년 1월 특집기사로 소개됐다.
나노공은 화장품이나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기화합물의 ‘합성공장’으로도 쓸 수 있다. 연구단은 유기화합물을 나노공과 함께 넣으면 물을 싫어하는 유기화합물이 물을 피해 나노공 제일 안쪽의 빈 공간으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교수는 “나노공을 이용하면 화장품이나 의약품을 만들 때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노공 처럼 좁은 공간 안에 갇힌 분자들은 충돌할 확률이 높아 반응이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노공은 구멍이 열린 상태에서 약물을 넣고 온도를 높이면 구멍이 막혀 약물을 가둘 수 있어 약물전달체로도 쓸 수 있다. 나노공을 이용하면 약물 전달 효율이 크게 올라간다. 이 단장은 “대부분의 약에는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분자들이 많다”며 “이 분자들은 물에 잘 녹지 않기 때문에 세포 안으로 흡수되는 비율이 낮아 약효가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약물을 친수성 사슬로 둘러싸인 나노공 안에 넣으면 세포 속으로 쉽게 들어간다. 입에 쓴 약을 아이들이 삼키기 쉽도록 하기 위해 달콤한 당분으로 감싼 것과 같다.
2007년에는 지름 1.5nm, 길이 10nm의 ‘나노스프링’도 만들었다. 연구단이 막대-사슬 분자에 금속을 첨가하자 분자들이 나선형으로 꼬이며 초분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분자는 모양뿐 아니라 실제로 스프링과 같은 기능을 한다. 나선형초분자는 냉각시키면 부피가 줄며 수축하고 가열하면 다시 팽창한다. 이 교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나노기계나 약물 운송체가 혈관 벽에 부딪힐 때 받는 충격을 완충시키는 데 나노스프링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치료에 쓰이는 인공바이러스
연구팀은 치료유전자와 약물을 세포 안으로 전달하는 인공바이러스도 만들었다. 유전자치료에 바이러스를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자기 복제기능은 없애고 유전자 전달만 할 수 있도록 바이러스를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인공바이러스다.
자기조립으로 초분자를 만든 뒤 DNA나 RNA 같은 유전 물질을 넣어 세포 내에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 이 단장은 “인공바이러스는 실제 바이러스와 비교하면 아직 원시적 수준이지만 자기복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들어가 안전하게 약물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개념의 항생제도 제시했다. 몸 안에 들어온 박테리아를 꼼짝할 수 없도록 동여매는 ‘나노밧줄’이다. 기존의 항생제 대부분은 박테리아의 생체대사를 차단해 박테리아를 제거했다. 연구단은 막대-사슬분자를 수없이 연이어 폭 약 7nm, 길이 50~100nm의 긴 밧줄을 만들었는데, 사슬 부분에 만노스라는 당 성분을 사용했다. 대장균을 포함해 병원성 박테리아들 대부분은 섬모에 만노스와 잘 결합하는 단백질을 갖고 있다. 대장균을 배양한 배지에 나노밧줄을 넣었더니 섬모에 밧줄이 달라 붙어 여러 마리의 대장균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었다.
연구단은 2005년 이후로 나노조립체의 활용도를 높일 방안을 연구한다. 연구팀의 임용범 박사는 “활성도가 높은 친수성 탄수화물과 친수성 단백질을 사슬 부분에 사용하면 초분자의 기능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모양의 초분자라도 어떤 사슬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암을 찾아내 약물을 전달할 수도 있고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데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나노조립체 분야는 활용 가능성이 높은 블루오션인 셈.
연구단이‘네이처 머티리얼스’와 ‘사이언스 특집기사’를 포함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횟수는 110건이 넘고 피인용횟수는 1600회에 이른다.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연 요청에 이 단장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이 단장은 국제 학술회의의 기조강연과 초청강연을 최근 3년 동안 30회 이상 맡았다. 나노조립체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단의 성과를 보여주는 지표다. 하지만 “나노조립체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며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이 단장. 똑똑한 나노분자처럼 힘을 모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연구단의 행보가 주목된다.
인터뷰_이명수 단장
보이지 않는 세계를 디자인한다
최초로 초분자를 합성해 새로운 학문분야로 정립한 사람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의 장 마리 렌 교수. 하지만 현재 나노조립체 연구 분야의 중심에는 이 단장이 이끄는 연구단이 있다. 이 단장은 다양한 형태의 나노조립체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와 연계시켜 세계의 흐름을 선도한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이 단장은 나노조립체 기술을 생물학에 접목시켜 초분자로 생체기능을 제어할 수 있음을 보였다.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만남’을 주선한 셈이다.
나노조립체 연구는 기본적으로 화학이 근본이지만 다양한 학문 영역을 융합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단장은 평소 “학문에는 절대적인 경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전공인 화학뿐 아니라 생물학, 나아가 물리학까지도 폭넓게 공부한다.
2002년 창의연구단으로 선정된 뒤 이 단장과 연구단은 연구비를 아껴 그토록 원했던 최첨단 투과전자현미경(TEM)을 구입했다. 7억 원이라는 거금이 들었지만 연구단은 투과전자현미경을 200% 이상 활용해 ‘네이처’, ‘사이언스’, ‘케미컬 리뷰’에 매년 새로운 논문을 게재한다. 광학현미경으로는 나노조립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와 기능을 관찰하기 위해 투과전자현미경이 꼭 필요하다.
이 단장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보다 설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연구단은 새로운 나노조립체를 만들면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며칠이고 밤을 꼬박 샌다. “바쁜 연구일정과 주변의 기대 때문에 힘들지는 않냐”는 질문에 이 단장은 이렇게 되물었다.
“취미 생활을 하면서 힘들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취미’인 연구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는데 힘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 단장은 “자기조립 현상은 조물주가 생명체를 만든 원리를 모방한 것”이라며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생명공학이나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