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은 신의 노여움을 사며 물거품이 됐다. 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다시 한 번 하늘에 이르기 위해 5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을 전 세계 곳곳에 세우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2009년 말 완공을 앞 둔 162층, 높이가 808m에 이르는 ‘세계의 마천루’ 버즈 두바이며 그 뒤를 대만의 타이베이101타워(101층, 509m)가 잇는다. 국내에도 2016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인 용산드림타워(150층, 620m)와 인천타워(151층 587m), 잠실 제2롯데월드(112층, 555m)가 ‘하늘 길’을 연다.
초고층 건물의 적, 바람
신은 하늘에 이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꺾는 데 바람을 사용했을까. 초고층 건물의 가장 큰 적은 바람이다. 일반적으로 건물 높이가 올라갈수록 지진에 더 약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 그럴까. 비밀은 고유진동수에 있다.
고유진동수는 외부에서 물체에 힘을 줄 때 물체가 흔들리는 진동수로 물체의 무게나 강성(외부에서 변형을 줄 때 변형에 저항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고층건물은 고유진동수가 작고 저층건물은 고유진동수가 크다. 그런데 저층건물의 고유진동수는 지진파와 비슷해 공명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공명현상이 일어나면 진동이 증폭돼 피해가 크다. 그네를 밀 때 주기에 맞춰서 밀어주면 그네의 진폭이 점점 커지는 원리다.
일반적으로 50층 이상, 높이 250m 이상의 건물을 초고층 건물로 구분하는데, 약 5층 건물 높이인 지상 20m에서 초속 5m의 바람이 분다면 250m에서는 초속 약 12m의 바람이 분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태풍 중심 풍속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세기로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은 이보다 더 빨라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홀로 우뚝 솟은 초고층 건물은 바람에 약하다. 바람이 초고층 건물에 일으키는 진동은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고층건물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어지러움과 불안감을 일으킨다. 국제표준화기구는 건물의 진동을 기준(ISO6897)을 정해 제한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건물이 흔들릴 때 생기는 진동가속도가 중력가속도의 0.3%인 약 3cm/s2 이상이 되면 거주자가 불편함을 느낀다. 개인차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정도 세기 진동부터 느낄 수 있다.
부산 해운대관광리조트(117층, 511m)를 포함해 많은 초고층 건물이 건설되고 있는 부산은 100층 건물 높이인 지상 500m에서 최대 초속 90m의 바람이 분다. 2003년 전국에 큰 피해를 준 태풍 매미의 최대 풍속(초속 60m)보다도 1.5배 세기 때문에 건물은 크게 흔들린다. 이 경우 건물이 받는 하중은 1m2당 1500kg에 이른다. 이 정도면 초고층 건물의 유리창 1m2당 승용차 1대가 누르는 힘을 견뎌야 하는 셈이다.
바람에도 끄떡없는 건물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비법은 바로 바람을 잡는 제진기술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건물의 뼈대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이다.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는 벽을 두껍게 하거나 콘크리트 벽을 추가로 설치해 건물의 흔들림이나 변형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체육관처럼 넓은 공간이 있는 건물보다는 내부에 벽이나 기둥이 많은 건물이 외부 충격을 견디는 데 유리하다.
하지만 강하고 튼튼한 뼈대를 사용한다고 무조건 바람에 잘 견디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철골 구조물도 외부에서 힘을 받으면 변형이 생기거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양구조안전기술 정광량 박사는 “무조건 바람에 맞서기보다는 바람이 건축물에 미치는 특성을 파악해 바람의 영향을 줄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건물 모서리 깎고 단면적 줄여 바람 피한다.
바람이 일으키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초고층건물에는 건물의 모양을 바꾸는 방법이 사용된다. 건물 모서리 형태나 높이에 따라 건물 단면 형태, 단면적을 바꾸면 바람을 피해 갈 수 있다. 그래서 초고층건물 설계에는 설계자의 미적 취향뿐 아니라 바람을 피하는 기술이 숨어 있다.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본 단면이 사각형인 경우 바람이 건물의 모서리에 부딪히면 일부 공기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다. 이 공기 덩어리는 건물 뒤로 돌아가 소용돌이를 만드는데, 이 소용돌이는 바람이 불어 온 방향의 직각방향으로 건물을 흔든다. 그런데 건물 모서리를 둥글게 하면 모서리에 부딪혀 떨어져 나가는 공기 덩어리를 작게 만들 수 있다.
정 박사는 “건물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면 바람이 건물 벽면을 타고 흘러나가기 때문에 바람이 일으키는 진동을 10~20% 감소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선형으로 생긴 물고기와 잠수함이 물의 저항을 덜 받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부산에 건설된 포스코 더샵 센텀스타(60층, 210m)도 이 방법으로 건물의 진동을 줄였다.
산이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뿔 모양인 것처럼 건물 상층부의 단면적을 줄여 바람과 부딪히는 면적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높이가 증가할 때 건물의 단면이 작아져 진동이 줄어드는 현상을 테이퍼링 효과(Tapering Effect)라 한다. 국내 초고층 건물 중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이 방법이 쓰였다. 타워팰리스는 위에서 보면 단면이 마치 세잎 클로버처럼 생겼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 최상층부는 잎이 하나만 남은 형태다. 정 박사는 “타워팰리스는 테이퍼링 효과를 이용해 진동을 20~50% 가량 줄였다”고 말했다.
바람이 건물에 부딪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건물 상층부에 큰 구멍을 뚫는 방법도 있다. 높이 505m의 상하이 세계금융센터 정상에는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축구장 절반만 한 구멍이 있다. 정 박사는 “바람이 건물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풍동실험을 한 결과 380m 고층건물 상부에 바람구멍을 만들 경우 약 10% 정도 진동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꽈배기처럼 건물을 뒤틀어 바람의 영향을 상쇄할 수도 있다. 건물이 비틀린 경우 각 면마다 바람을 받는 양이 달라져 건물이 특정 방향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들어서는 동북아무역센터의 경우 1층은 사다리꼴 모양이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건물이 비틀려 최상층은 삼각형 모양이 된다. 바람을 가장 많이 받는 사다리꼴의 밑변 부분이 최상층으로 올라가면 삼각형의 꼭지점이 돼 바람을 가장 적게 받는다.
건물과 함께 흔들리며 진동 흡수
피해갈 수 없다면 나눠라. 백짓장도 맞들면 가볍듯 진동도 나누면 작아진다. 바람을 잡는 또 다른 방법은 건물과 함께 흔들리며 진동을 흡수하는 제진장치를 설치하는 것.
제진장치는 어떻게 건물의 진동을 흡수할까. 예를 들어 250m 높이의 50층 아파트 옥상에 제진장치를 설치한다고 가정하자. 50층 아파트는 무게가 약 3만t 정도 나가기 때문에 건물 무게의 약 300분의 1인 100t의 제진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무게 100t의 제진장치를 철로 만들면 크기는 가로 4m, 세로 4m, 높이 3m 정도. 티이솔루션 김윤석 박사는 “제진장치는 건물의 상층부에 설치할수록 진동 제어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건물의 진동폭이 고층으로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면 제진장치도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진장치는 건물보다 정확히 4분의 1 주기만큼 느리게 움직이며 건물의 진동을 흡수한다. 건물이 중심축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향하면 제진장치는 중심축 위치에 그대로 있다가, 건물이 왼쪽에서 다시 중심축을 향해 움직일 때 이와 반대로 움직이며 건물의 진동을 상쇄한다. 진자가 좌우로 운동할 때 중심축 부분에서 속도가 가장 빨라지는데, 중심축을 향해 움직이는 진자에 반대방향으로 바람을 불면 진자의 진동을 줄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제진장치는 건물보다 무게가 작기 때문에 10배 이상 큰 진폭으로 운동한다. 만약 건물이 좌우로 초당 5cm 흔들린다면 제진장치는 초당 50cm를 움직인다.
하지만 진동 폭이 지나치게 커지면 제진장치가 차지하는 공간도 늘어나기 때문에 제진장치에는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자동차의 서스펜션 역할을 하는 감쇠장치가 있다. 감쇠장치는 제진장치의 진동흡수 능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진폭만 10분의 1로 줄인다. 수조에 손을 넣고 좌우로 움직이면 물의 저항 때문에 공기 중에서 손을 움직일 때보다 힘이 많이 든다. 마찬가지로 감쇠장치 안에는 물보다 더 끈적끈적한 기름이 차 있어 제진장치의 움직임 폭을 줄인다. 김 박사는 “만약 감쇠장치가 없다면 건물이 5cm 움직일 때 진동을 흡수하기 위해 제진장치는 5m를 움직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진장치는 바람이 일으키는 진동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김 박사는 “제진장치가 건물의 진동에너지를 흡수해 진동이 50% 이하로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국내에는 2000년 인천공항 관제탑에 제진장치가 가장 먼저 설치됐으며 양양공항관제탑과 평창 스키점프대, 부산 해운대에 건설 중인 고층 아파트에도 제진장치가 설치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제진장치는 철로 만들지만 물탱크에 생활용수나 소방용수를 담아 만들 수도 있다. 물을 사용하면 철을 사용했을 때보다 비용이 줄지만 대신 제진장치의 부피가 커진다.
건물의 진동을 센서로 파악해 진동이 생기면 반대방향으로 건물에 힘을 줘 진동을 줄이는 방법도 가능하다. 버스에서 넘어지려는 쪽의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반대로 기울여 균형을 잡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하지만 진동의 강도와 방향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면 더 큰 피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이 방법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지반과 건물이 맞닿는 부분에 고무와 철판을 겹쳐 쌓은 구조물을 삽입하는 방법도 있다. 고무는 유연성이 크기 때문에 충격을 흡수해 건물의 진동을 줄인다.
500층, 높이 2001m로 한라산(1950m)보다 높고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30만 명)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 ‘에어로폴리스2001’. 일본이 1990년대 중반 설계한 초고층 건물이다. 김 박사는 “허무맹랑할 것 같은 이런 건물도 제진기술이 발달한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500층 건물에서 일어나 구름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꿈같은 일이 정말 ‘꿈’만은 아니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