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자의 주조와 활판인쇄기의 개량으로 조선식 청동활자인쇄술은 일단 완성되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에는 갑인자로 인쇄해 펴낸 여러가지 천문·역법 서적들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세종 때의 유명한 역법(曆法) 책,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도 이 갑인자로 인쇄됐다. 그리고 창의적인 책으로 평가되고 있는 수시력(授時曆) 계산 조견수표(數表), 즉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일식 월식의 예측계산법 등을 논한 '교식추모법' 등 갑인자로 인쇄된 책은 십여가지에 이른다.
이 책들은 갑인 청동활자로 1434년에서 1450년 사이에 인쇄, 천문·역법 관련학자들과 관리들에게 나눠준 서적들이다.
손과 압착기의 차이
나는 1960년대 초에 규장각에서 이 책들을 처음 봤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15세기 전반기에 청동활자로 인쇄한 책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궁중도서관에 있었던 장서들 이었기에 상태도 거의 완벽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책들의 외관이었다. 당시 나는 인쇄기술이나 고서(古書)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던 터였으나 그 책들은 한마디로 너무 이름다운 책이었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고 훌륭하게 인쇄된 책이 15세기 전반기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역사에서 배우고 입으로 논하고 머리로 생각만을 해오던 우리에게, 특히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15세기 세종 때 인쇄기술자들이 남긴 유산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15세기에 인쇄된 책 중에서 갑인자 인쇄본만큼 이름답고 훌륭한 것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이볼 수 없다. 더구나 청동활자 활판인쇄로 그러한 책들을 찍어냈다는 것은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기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세종 때의 조선에는 좋은 인쇄, 훌륭한 책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다 갖춰져 있었다. 얇고 질기고 하얀 종이와 좋은 먹이 있었고, 꼭 짜인 조판이 가능한 활판시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서유럽에서 구텐베르크는 프레스, 즉 기계장치를 써서 인쇄를 했는데 반해 조선에서는 손으로 박아내는 방법 밖에 활용하지 않았으니 기술적으로 비교가 안된다고.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올리브기름을 짜던 압착기, 즉 프레스를 쓰지 않으면 인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조선에서는 손으로 밀어도 깨끗하고 신속한 인쇄가 가능했으므로 굳이 압착기를 시용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것은 종이와 잉크 때문이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를 시작했을 때, 서유럽의 종이는 조선의 닥종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뻣뻣한 것이었다. 그러니 손으로 탁본하듯 밀어서는 깨끗이 박아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압착기로 꽉 내리 눌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종이와 인쇄된 책들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잘 나타난다. 조선의 책들은 부피도 작고 아주 가볍다. 그러면서도 책으로서의 품위가 당당했다.
조선의 종이는 손으로 살짝 밀어도 인쇄가 잘 됐다. 따로 기계장치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전근대적인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그렇게 쉽게 인쇄가 잘되는 바람에 조선에서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과학사가 버날(B.D. Bernal)의 '역사속의 과학'(Science in History, 1954)에는 이런 글이 있다.
"움직이는 금속활자는 14세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그것은 15세기 중엽에 유럽에 도입돼 처음에는 기도서로, 나중에는 책으로 이상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고려에서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술이 서유럽에 전파돼 1450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금속활자 인쇄가 시작됐다는 해석이다. 14세기에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사용됐다고 본 것은 고려가 서적원을 설치, 활자인쇄를 맡게 했다는 1392년을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버날의 이런 견해는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케임브리지대학의 중국과학사가 니덤(J.Needham)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반과학사의 개설서에 이런 견해가 서술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서양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직 일반적으로 정설화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가설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 거론되고 있을 따름이다. 목판인쇄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반면 활자인쇄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설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그런 견해를 부정하는 버날의 글은 한발 더 나아간 것임에 틀림없다.
고려에서 청동활자 인쇄가 시작된 시기는 13세기 초 또는 그 이전이다. 그러므로 그 기술과 아이디어가 몽고인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유럽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시기에 많은 유럽인들이 중국에 왔다. 특히 13세기에서 14세기 초에 장사하러 중국에 내왕한 유럽인의 수가 최고로 많았다. 더욱이 유럽에서 쓰던 로마자는 활자인쇄 하기가 너무도 편리했기 때문에 그 아이디어가 급속히 전파됐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청동활자 인쇄술과 그 아이디어는 몽고인이 지배하던 광대한 지역을 거쳐 15세기 중엽에 이탈리아나 독일지역에 도달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글자의 고유성질 때문에 그리고 잉크나 종이의 문제 때문에 목판 인쇄가 계속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책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목판인쇄의 경제성이 충분했다. 중국 사람들은 책을 만드는데 그렇게 큰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값싸게 책을 펴내고 있었던 것도 큰 요인의 하나였다.
한편 일본사람들은 고려판 대장경을 여러번 구해가고 청동활자 인쇄본도 가져갔지만 금속활자로 그토록 훌륭한 책을 조선에서 인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청동활자와 인쇄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청동활자를 사용한 인쇄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고문효경'(古文孝經)이라는 책이다. 그것은 조선에서 약탈해 간 활자와 인쇄기로 찍어낸 서적이다.
일본사람들이 목활자로 인쇄한 '권학문'(勸學文)의 발문에는, "공장(工匠)에게 명해 한자씩 따로 새겨 조판, 글자를 찍어내게 했다. 이 방법은 조선에서 온 것인데, 조금도 불편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일본에서는 조선의 글씨체까지 모방, 활자인쇄를 해 나갔을 정도로 조선의 인쇄기술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일본인을 매료시켜
조선의 활자인쇄는 그 수준이 매우 높다는 점이 중국에서도 평가되고 있었다. 1773년에는 중국의 황실인쇄소가 설립됐다. 그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조선인의 후손인 김간(金簡)이었다. 그는 1776년 무영전취진판(武永殿聚珍版) 활자정식(活字定式)을 만들어내서 청(清)나라의 인쇄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렇게 주변인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문화사에서, 기술사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은 공헌이었다.
그러나 그 기여도는 '평가절하'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그 기술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구텐베르크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중 일부는 파급효과와 영향이 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학문적 노력과 활동이 부족했다는 데 기인한다.
신기술이자 고유기술
갑인자의 주조와 활판인쇄기의 개량으로 조선식 청동활자인쇄술은 일단 완성됐다. 갑인자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금속활자인쇄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세종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조선의 많은 책들을 갑인자로 인쇄했다. 그 책들은 인쇄물로서 흠 잡을데가 없다. 전통적인 수공업적 방법에 따른 인쇄치고는 그 능률도 수준급이라 할 수 있다. 인쇄공정도 분업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활자의 주조와 분류 보관, 원고에 따라 활자를 골라내서 식자 조판하는 일, 인쇄·제본하는 모든 공정이 잘 분업화되고 조직적으로 관리됐다.
인쇄공장인 주자소(鑄字所)는 정부직할의 국영체제로 관리·운영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주자소 공장(工匠)들의 노고를 높이 보상해 주었다. 장인들이 처자의 끼니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급료를 올리고 특별히 우대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갑인자는 세종 때 처음 주조된 이후 조선시대에 다섯 번이나 거듭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25번 실시했던 금속활자 주조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갑인자 자체(字體)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물의 적어도 25% 이상을 점한다. 따라서 책 읽는 선비는 갑인자가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종 때의 과학자와 공장들은 활자의 자체와 적당한 경도(硬度)를 갖게 하는 데 주력했다. 또 가장 알맞는 청동합금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계속했다. 청동활자의 분석결과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준다. 예를 들어 1455년의 을해자(乙亥字)는 구리 79.45%, 아연 2.30%, 주석 13.20%, 납 1.66%, 철 1.88%다. 이에 비해 1677년의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는 구리 64.7%, 아연 3.1%, 주석 18.4%, 납 4.4%, 철 2.1 %로 배합비율이 달라진다. 또 한구자(韓構字)에 와서는 구리 79.8%, 아연 1.4%, 주석 10.6%, 납 2.1%, 철 2.0%로 바뀐다.
현재까지의 분석 예는 이밖에도 10여종이 더 있다. 그것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조선시대 청동활자들은 전통적인 한국청동의 구리와 주석의 비율인 75 대(對) 25, 또는 80 대 2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적당한 양의 아연과 납을 섞어 만들었다.
조선 초의 기술자들은 한국청동이 활자로 활용하기에 알맞은 금속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의 전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청동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의 개량을 기술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런 노력은 세종 때의 갑인자 주조로 열매를 맺었다. 갑인자도 활자의 식자·조판방법으로 밀랍을 사용한 전통적인 고정법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출판문화는 이러한 청동활자를 활용한 인쇄로 대표된다. 이것은 한자를 쓰는 동아시아의 이른바 중국문화권중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술적 특징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국인이 찾아낸 신기술이고 고유기술이다.
특히 인구가 적은 나라라는 점을 고려한 인쇄술이었다. 책의 발행부수가 많아야 2백부 정도고 펴내야 할 종류는 수천가지가 넘었으니 그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맞추자면 금속활자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가장 적합한 것이 금속활자 인쇄였기 때문이다. 전란 등 어려운 시기가 아닌 때에 주자소에서는 대개 10~20년마다 새로 청동활자를 부어 만들었다. 이는 활자의 수명이 10~20년은 충분했다는 것을 뜻한다.
목판은 한 가지 책을 찍어내면 같은 책을 찍을 때 외에는 다시 쓰지 못한다. 또 그 보관도 어렵다. 게다가 목활자는 몇 번 쓰면 '사용불가'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청동활자는 수십 번을 써도 문제가 없다. 청동은 녹여 다시 재활용하게 되므로 손실분만 보충하면 된다. 만들 때 노력이 많이 들긴 해도 오히려 경제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