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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만드는 핵물리학자

국가핵융합연구소 KSTAR연구센터 박사 박영민

‘평지에서 자전거와 자동차가 겨루면 자전거가 이길 수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평지에서 자전거의 최고 속도는 시속 130km에 달한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속도와 맞먹는 셈. 일명 ‘누워서 타는 자전거’라 불리는 리컴번트는 일반 자전거보다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국가핵융합연구소(NFRI) K-STAR 연구센터 박영민 박사는 리컴번트가 일반 자전거보다 빠른 이유가 궁금했다. 물리학자답게 과학의 눈으로 리컴번트를 살펴 비결을 스스로 찾아냈다. 차체가 낮고 상체를 뉘어 타므로 전체적으로 리컴번트는 유선형이다. 이 때문에 공기 저항이 적어 속도를 내기에 좋았던 것. 이내 박 박사는 리컴번트의 속도감에 빠져들었고 이제는 손수 리컴번트를 만든다.

그의 본업은 ‘한국의 인공태양’이라 불리는 K-STAR 연구제작. K-STAR는 태양 속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을 지상에서 인공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게 목표다. K-STAR는 지난 6월 시운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억℃에 달하는 불길을 연일 내뿜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자전거와 K-STAR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그가 K-STAR란 거대장치를 만들기까지 리컴번트를 만들며 갈고 닦은 실력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그의 아지트는 신탄진 공업단지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를 좋아했다. 자전거를 타면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다. 박 박사는 “영화 ‘ET’(1982년 작)에서 ET와 남자주인공 엘리엇이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초등학생 때부터 자전거를 타면 자유롭게 모험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경상남도 사천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타던 자전거를 볼 때마다 가족을 추억했다. 틈만 나면 그 자전거를 타고 산과 들을 돌아다녔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에 자전거를 타고 더 멀리 달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의 자전거 사랑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핵융합연구센터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탔고, 자전거 동호회까지 만들었다. 2000년 세미나 참석차 방문한 일본에서 처음 리컴번트를 접하고는 이 자전거를 직접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탄진 공업단지 안에 있는 K공업사 한쪽에 ‘아지트’를 꾸렸다. 이곳에서 쇠조각과 각종 부품으로 자전거를 제작했다. 이제까지 이곳에서 2대의 리컴번트가 ‘생명’을 얻었다.

그는 지난해 빨간색 리컴번트를 완성했다. 제작기간 1년, 제작비는 150만 원 이상이었다. 리컴번트는 부품의 약 90%가 일반 자전거와 비슷해 구하기 쉬운 편이다. 그러나 프레임과 일체형 체인(2개의 체인이 동시에 걸리는 부분)을 고정하는 나사가 국내에 없다. 리컴번트의 프레임은 일반 자전거보다 높이가 낮으면서 길이가 길고, 리컴번트는 체인이 1개인 보통 자전거와 달리 체인이 2개다. 체인 하나는 앞바퀴와 연결되고 나머지 하나는 뒷바퀴에 연결된다. 그만큼 동력이 좋아진다. 박 박사는 중고시장을 샅샅이 뒤져 겨우 중고 리컴번트 프레임을 찾아냈다. 일체형 체인을 고정하는 나사는 손수 부품설계프로그램인 오토캐드(Auto CAD)로 설계한 뒤 쇠를 깎아 만들었다.

그는 이 자전거를 아내에게 선물했다. “자전거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내의 모습에 그간의 노고가 사르르 녹아내렸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의 첫 리컴번트는 자전거에 대한 열정이 녹아있는 ‘사랑의 메신저’였던 셈이다.

못으로 만든 칼에서 두랄루민 소금까지
그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손재주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어린 시절 그는 종종 할아버지를 따라 대장간에 놀러갔다. 대장장이가 불에 달궈진 무쇠를 망치로 두들겨 낫과 괭이 같은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과정이 호기심 많은 소년의 눈을 사로잡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대장장이 흉내를 냈다. 할아버지의 연장통에서 못을 꺼내 부뚜막 아궁이에 넣어 달군 뒤 두드려서 칼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문제는 쇠를 이용해 장난감을 만들다 보니 손에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날카로운 칼에 찔리거나 베이는 것은 보통이고 불에 데는 일도 흔했다. 어느 날 못으로 만든 칼에 왼손 엄지손가락을 깊이 베었는데, 3일 동안 손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르고 견뎠다. 평소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상처를 숨겼고 밥을 먹을 때도 절대 식탁 위로 왼손을 올리지 않았다. 박 박사는 “조부모께서 손에 상처가 난 것을 알면 더 이상 대장간에 데려가지 않을 것 같아서그랬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어린 그에게 ‘만들기’는 매력적이었다.

그는 전통악기도 만들었다. 중학교 때는 대나무를 깎아 만든 관악기인 단소가 그의 첫 작품.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음악시간에 단소를 배웠던 그는 “플라스틱 단소를 불었는데 소리의 깊이가 낮아 맘에 안 들었다”며 “깊은 소리를 내기 위해 할아버지를 졸라 대나무를 구하러 다녔다”고 말했다. 단소를 직접 만들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단소와 비슷한 굵기의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소리를 살폈다. 특히 입을 대는 부분인 치구를 만들 때 시행착오가 많았다. 치구의 크기에 따라 소리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발전시켜 지난해 12월에는 비행기에 쓰는 알루미늄의 한 종류인 두랄루민을 이용해 관악기인 소금을 만들었다. 그는 “리컴번트를 만드는 아지트에서 우연히 두랄루민 관을 봤는데 소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두랄루민 소금은 개성이 있단다. 일단 여름과 겨울의 소리가 다르다. 하루 중에서는 점심과 저녁에 소리가 다르다. 두랄루민의 열전도율이 높아서 온도에 따라 소리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주 전 10분 정도 악기를 불어 따뜻하게 만든 뒤에야 제 소리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렇듯 그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이런 경험이 모여 현재 그는 NFRI에서 ‘잡기인’으로 불린다.

‘끼’는 못 숨기는지 그는 현재 바퀴가 세 개인 ‘트라이커’ 리컴번트를 만들고 있다. 2007년 대전에서 열린 지역 자전거대회에서 부상으로 받은 MTB자전거의 프레임을 잘라 바퀴를 세 개 달 수 있도록 개조했다. 특히 바퀴가 세 개인 자전거는 앞에 양쪽으로 달린 바퀴는 양쪽으로 기울어져야 고속주행에서 안정감이 있으므로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 그는 “머릿속에 구상하던 것이 훌륭하게 움직일 때 희열을 느낀다”며 “바퀴가 세 개 달린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행복하다”고 말했다.

공사 현장의 엔지니어도 인정한 ‘기술자’
그가 만든 리컴번트 프레임에는 불꽃무늬가 디자인돼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국가핵융합연구소 K-STAR에서 핵융합 불꽃이 활활 타오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실제로 그는 이 염원을 담아 K-STAR 공사현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그는 명지대에서 실험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지만, 현장 인부들이 인정한 엔지니어기도 하다. 보통 물리학자는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설계한다. 그러나 현실과 이론의 차이 때문에 현장에서 이를 구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현장에서 못 만드는 기계는 애초에 설계를 안 한다”고 말했다.

그도 처음엔 K-STAR를 물리이론으로만 설계하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건설현장을 방문한 첫날 연구실에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던 것과 현실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장 인부들은 박 박사의 설계대로 기계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아우성이었다. 인부들은 시간도 없고 기술도 부족하다는 이유를 댔다.

핵융합반응이 일어날 때 K-STAR 내부에서는 1억℃로 고온의 플라스마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플라스마를 용기 안에 붙잡아두려면 영하 269℃(4.5K)인 초전도체가 필요하다. 저항이 O에 가까운 초전체는 전류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도를 낮추는 데 헬륨가스가 쓰인다. 이런 헬륨가스가 지나가는 배관은 일명 K-STAR의 ‘혈관’이라 불린다. 헬륨배관에는 용접할 곳이 최소 1만 5000 곳이나 됐다. 만약 인부들이 용접을 꼼꼼하게 안 하면 헬륨배관에 금이 가 10년 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는 손수 팔을 걷어붙이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키워 온 제작 감각을 믿었다. 인부들의 주장대로라면 기계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작정 일주일 동안 공장을 멈추고 실전 용접설명서를 10권이나 읽었다. 그는 직접 기술자들 앞에서 용접 시범을 보였다. 그제야 현장인부들은 그를 기술자로서 인정했고, 기기도 꼼꼼히 조립해줬다. 그 결과 한 곳에서도 헬륨이 새나오지 않았다.

박 박사의 노력으로 K-STAR는 중형급 핵융합장치 중 세계 최초로 진공누설 없이 시운전 검사를 단번에 통과했다. 진공누설이 일어나면 진공용기를 재조립해야 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2006년 말 완공된 중국 핵융합장치 ‘EAST’는 저온 용기에서 두 차례 진공누설이 일어났고, 인도에서 개발 중인 ‘SST-1’도 진공누설이 일어나 완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 박사가 손수 건설현장을 찾아 용접하는 과정을 철저히 감독한 덕분에 K-STAR 시운전 검사를 단번에 통과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그의 감각이 없었다면 K-STAR는 지금처럼 매일 불꽃을 내뿜지 못했을 것이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박 박사는 “1%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 99%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연구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장미를 보면서도 장미꽃잎 배치의 규칙을 찾는다. 향기가 좋다며 넘어갈 수 있는 데서도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평소 꾸준한 노력을 바탕으로 그가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자전거를 만들며 받은 영감이 K-STAR의 가동에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말이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와 함께

1. 리컴번트가 비싸다고 하던데, 자전거 살 때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
현재 타고 있는 리컴번트는 약 300만 원이다. 당연히 가계를 책임지는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몇 달 동안 아내를 설득했는데, ‘자전거가 없으면 못 산다’고 우겼다. 두 손 두 발 다 든 아내는 그제야 ‘그렇게 사고 싶으면 사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더라. 곧바로 자전거 전문점에 달려가 리컴번트를 사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2. 장마철에는 자전거를 못 타서 아쉽지 않은가
리컴번트가 비에 젖으면 부품에 녹이 슬거나 상할 수 있어 되도록 비가 오는 날 타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리컴번트가 너무 타고 싶은 날에는 비가 그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때도 있다. 이 때문에 장마철에는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렸다가 늦은 밤에 퇴근할 때도 더러 있다.

3.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연구는 언제 하나?
자전거와 악기를 만드는 일이 연구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비밀은 100가지 일에 두루 관심을 갖고, 한 가지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라 말이 있다. 99가지 일이 1가지 일에 영감을 주고 시너지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취미생활과 경험이 K-STAR 연구에 영감을 주고 있어 앞으로도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자전거 타고 전국을 누빈다’

자전거는 가족의 사랑을 싣고 달린다. 리컴번트는 함께 타야 그 맛이 산다는 생각에 아내의 리컴번트와 예쁜 딸아이의 자전거를 마련했다.

아내의 자전거는 내가 지난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손수 제작한 리컴번트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자전거인 셈이다. 아직 어려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딸을 위해서 리컴번트를 개조해 뒤쪽에 안장을 한 개 더 달았다. 딸은 아빠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며 하늘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올해 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대전에 있는 유원지인 ‘탄천공원’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여느 가족 같으면 먼저 자동차 시동을 걸겠지만, 우리 가족은 헬멧을 꾹 눌러 쓴 채 리컴번트 페달을 굴린다. 탄천까지는 왕복 1시간 거리. 운동도 하고 가족의 정도 나누면서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 여행을 처음 떠난 건 대학교 때다. 그땐 일반 자전거를 타고 여행했는데, 임진각, 변산반도 등을 돌아다니며 젊음의 혈기를 불태웠다. 1999년 대전으로 이사를 온 뒤에도 대전 곳곳을 자전거로 누볐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가슴에 부딪히는 바람의 느낌이 상쾌하고 좋았다. 이것이 내가 자전거를 타고, 주변에 자전거를 권하는 이유다.

지난해에는 같은 팀 상사와 자전거를 타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갔다. 1번 국도로 가는데 누워서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모습이 독특했는지 지나가던 운전자마다 인사를 건넸다. 인사 해주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례를 하느라 고생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전류 접합부의 저항도 최소화했다. 현재 K-STAR 전류 접합부의 저항은 최소 2nΩ(나노옴, 1nΩ=Ω)이다. K-STAR 본체는 외부와 연결되는 포트가 210개, 용기 내부를 관통하는 헬륨냉각 배관길이가 1960m, 용접 부위가 5000여 곳이나 된다. 이들을 연결하는 배관을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든 덕에 비용을 100억 원 정도 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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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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