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수학이 수‘악’의 기억으로 남아있으리라. ‘악’ 소리가 날 만큼 어려운 수학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겠다는 건지. 그런데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조용승 소장은 “잘 모르는 소리”란다. 약방의 감초처럼, 수학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긴, 과학수사대의 범죄 수사를 다루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 ‘C. S. I.’에서 거의 매회 등장하는 지문 대조 기법은 ‘헨리 시스템’이라는 분류법에 기초해 용의자의 지문에 분류값을 부여한 뒤 범인을 찾아내는 수학이고, 인터넷 뱅킹이나 인터넷 쇼핑을 이용할 때 쓰는 암호는 소인수분해의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며, 심장의 심박출량을 계산할 때는 적분이 이용된다.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연구원 10명에게도 ‘부전공’이 하나씩 있다. ‘DNA 칩’이니 ‘유전자 발현’이니, 생명공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부터 ‘빅뱅 이론’ ‘끈이론’ 같은 물리 이론을 줄줄 쏟아내는 사람까지, 이제는 그 해박함에 놀라 ‘악’ 소리가 난다.
유전자 네트워크는 미분방정식으로
남덕우 박사는 지난해 2월 국가수리과학연구소에 둥지를 틀었다. 그 전까지 4년 남짓 그의 보금자리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었다. 확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생명공학자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뭘 했을까. 그는 “유전자들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질병은 관련된 유전자가 여러 개다.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으로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한두 개 찾아낼 수도 있지만 최근 생명공학자들 사이에서는 부분만 들여다봐서는 결코 복합적 요인으로 생기는 질병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생물정보학 또는 시스템생물학이다. 여기서는 유전자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남 박사는 “유전자 네트워크가 어떤 구조인지 밝혀낸다면 이 네트워크로 질병에 관련된 유전자들이 어떻게 조절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네트워크만 찾아내면 직접 유전자 실험을 하지 않고도 질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보 유전자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이런 네트워크 모델을 만들 때 수학적인 기법이 필수다. 가령 DNA칩에서 유전자가 발현하는 정도를 관찰한다고 하자. 이때 10분, 20분, 30분 등 시간에 따라 유전자 발현 정도가 달라지면 시간을 변수로 하는 미분방정식을 사용해 네트워크 모델을 만든다. 반면 실험과 결과가 반복되는 형태일 때는 *불리안(Boolean)이나 *베이지안(Bayesian) 네트워크 같은 수학 모델을 사용한다.
지난해 남 박사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윤성호 박사, 김지현 박사와 함께 시간에 따라 발현 정도가 다른 유전자 데이터로부터 네트워크를 정확히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듬을 개발했다. 윤 박사와 김 박사는 유전자 실험 데이터를, 남 박사는 이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알고리듬 개발을 맡았다. 이 연구 결과는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가 발간하는 생물정보학 분야 전문학술지인 ‘바이오인포매틱스’ 10월 31일자에 실렸다.
남 박사는 “유전자 발현 정보는 통계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데이터라 수학자의 입장에서도 연구할 때 신이 난다”며 “괜찮은 모델을 하나 만들면 마치 병이라도 치료한 듯 뿌듯하다”고 말했다. 남 박사는 현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들과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준비 중이다.
“‘끈이론’이라는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벽돌을 제공한다고나 할까요.”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성찬영 박사는 지난해 9월부터 한국천문연구원 김홍서 박사와 머리를 맞대고 ‘끈이론’(string theory)을 연구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끈이론의 수학적인 모델을 만들기 위해 거의 1년째 머리를 싸매고 있다.
끈이론은 우주의 구성요소가 쿼크 같은 점입자가 아니라 고유의 진동 패턴을 갖는 끈이라고 가정한다. 지금까지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입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본 입자의 수는 오히려 늘어만 갔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끈이론이다. 끈이론에서는 기본 입자들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 이유를 끈의 진동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바이올린 현(끈)이 다른 진동수로 진동하면서 도, 레, 미 같은 다양한 음(기본 입자)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끈이론과 빅뱅 이론엔 기하학
끈이론이 등장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를 완벽하게 기술하는 수학적인 모델은 없다. 이론의 형태도 여러 가지다. 끈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지 조차 미지수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끈이론을 ‘모든 것의 법칙’(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지지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Theory of Nothing) 믿는 사람도 있다.
다만 에드워드 위튼이 1995년 제시한 M이론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끈이론 연구자들은 M이론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인 업적을 세울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우리는 4차원 시공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초대칭 끈이론이나 M이론이 성립하려면 공간이 10차원 또는 11차원이어야 한다. 나머지 6차원 또는 7차원은 어디로 갔을까? 이에 대해 수학자들은 칼라비-야우 공간(6차원), 조이스 공간(7차원) 같은 해답을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만족하며, 초대칭이 존재할만한 *균일성을 갖고 있다.
성 박사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만족하면서 균일성이 다소 깨어진 다른 공간을 찾기 위해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공간을 찾아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정확히 기술하는 기하학적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성 박사는 “끈이론에서 나온 ‘초대칭성’이나 ‘이중성’ 같은 개념은 기하학뿐 아니라 수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수학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물리 연구에서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편 빅뱅 이론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연구도 국가수리과학연구소에서 진행 중이다. 빅뱅 이론은 우주의 모든 물질과 힘이 모래알보다 작은 한 점(특이점)에 집중돼 있다가 폭발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가정이 들어 있다.
조용승 소장은 홍순태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와 공동으로 10차원 시공간에서 끈이론을 이용해 특이점에 대한 방정식을 세우고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현재 논문은 거의 완성된 상태. 조 소장은 지난해 6월에도 홍 교수와 함께 끈이론을 이용해 측지곡면에 관한 논문을 ‘피지컬 리뷰 D’에 발표했다.
조 소장은 “수학은 어느 연구 분야에나 도움을 주는 산소 같은 학문”이라며 “수학과 다른 학문의 만남은 앞으로 막대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다.
수학으로 석유 묻힌 곳 찾는다?
요즘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세계적으로 ‘석유 전쟁’이 불붙었다. 기름이 귀해지면서 유전을 보유한 나라들은 강대국 행세를 한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은 유전 개발에서 약자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국가수리과학연구소 하태영 박사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귀띔했다.
사실 석유나 가스는 지하 깊숙이 묻힌 경우가 많다. 게다가 지층 구조도 복잡하다. 영국의 북해나 미국의 멕시코만이 대표적인 예다. 이 때문에 지하 내부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유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최근 수학자들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지질학자가 암석의 분포를 연구하고, 지구물리학자가 지하구조를 조사해 매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분별하면, 수학자들이 이를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알고리듬을 제공하는 것.
현재 이 알고리듬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이론이 ‘파형역산’이다. 파형역산이론은 지층 구조에 따라 진동파의 전달 속도가 다르다는 원리에 착안해 인공적으로 지진파를 발생시킨 뒤 되돌아오는 파형의 속도를 계산해 이를 3차원 영상으로 재구성한다. 하 박사는 “파형역산이론은 ‘꿈의 기술’로 불린다”며 “지층 1km를 파형역산 기술로 분석하는 데 300달러(약 30만 원)를 호가해 기존 기술보다 20~30배 비싸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의 여러 대학과 석유탐사 업계에서는 파형역산이론을 이용한 석유 탐사에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국석유공사나 SK에너지, 대우인터내셔널, GS칼텍스 등 석유개발 업체가 파형역산 기술을 개발 중이다.
한편 파형역산이론은 병원에서 초음파 진단으로 태아를 관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이밖에 반도체 내부 결함을 찾아내거나 문화재의 균열 여부를 확인하는 데도 이용된다.
불리안*
불대수(Boolean algebra)는 19세기 중반 수학자인
조지 불이 고안한 논리 수학의 대표적인 형태다. 2진수로 논리적인 동작을 취급하기 때문에 컴퓨터 같은 디지털 회로 설계에 활용된다.
베이지안*
조건부 확률 개념이다.
A가 먼저 발생하고 그 뒤 B가 발생하는 두 사건 A, B가 서로 종속적일 경우 A 사건에 의해 B 사건의 확률이 달라진다. 질병과 증상 사이의 확률 관계를 나타내는 표준 모델로 많이 사용된다.
균일성*
수학 용어로는 홀로노미(holonomy)라 부른다.
초대칭을 얻기 위해서는 공간 전체에 연속적으로 잘 정의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그 공간의 위상과 곡률이 아주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만 가능하다. 이런 공간의 비틀림 정도를 나타낸 것이 홀로노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