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이 발표되며 무한에 가까운 질량과 중력을 가진 블랙홀이 존재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존재는 동시에 그 어떤 물질도 들어갈 수 없고, 나오기만 하는 화이트홀이란 개념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두 천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의 개념도 탄생했다. 웜홀이다. 블랙홀에 빠진 빛과 물질, 정보는 웜홀을 통해 이동하고, 화이트홀로 방출될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화이트홀의 존재가 부정되며 현재 웜홀은 블랙홀을 잇는 통로라는 것이 중론이다.
웜홀을 통한 우주여행 할 수 있을까
SF영화나 소설 등 각종 미디어에서 웜홀은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 묘사돼 왔다. 웜홀의 목(throat)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에너지나 물질 등이 다른 우주에 있는 블랙홀의 내부로 이동하게 한다. 이렇게 이동해 다른 우주의 블랙홀을 통해 방출되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 블랙홀에서 에너지나 입자가 방출될 수 있다는 이론이 뒷받침된 덕이다. 양자역학적 현상으로 블랙홀이 열복사선을 방출할 수 있다는 ‘호킹 복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웜홀의 존재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또 수학적 풀이에 따라 웜홀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불안정성이 커서 물리적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있다. 웜홀에 대한 주류 이론에 따르면 웜홀이 유지되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웜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음의 질량을 갖는 미지의 물질을 계속해서 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수학적으로는 웜홀을 통한 시공간의 이동이 가능하더라도, 실제 웜홀을 통해 누구나 쉽게 시공간을 여행할 수는 없다는 게 통념이다.
중력과 양자역학 잇는다
반면 웜홀은 존재하고, 웜홀을 통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여전히 있다. 박무인 서강대 양자시공간연구센터 교수는 “현재 웜홀은 서로 다른 우주의 블랙홀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로 설명된다”며 “웜홀은 이들 블랙홀 내부에 위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리학적으로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이론물리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라며 “특히 중력이나 끈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웜홀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존재로 기대된다. 멀리 떨어진 두 입자 중 하나의 정보가 결정되면 다른 입자의 정보 역시 결정될 수 있다는 ‘양자얽힘’은 분명 관측으로 확인된다. 이때 두 입자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정보가 빛보다 빨리 전달된다는 모순이 발생하는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만약 상대성이론의 결과인 웜홀이 두 입자를 연결하고, 상태 정보가 웜홀을 통해서 전달된다면 상대성이론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직 가설이지만, ‘ER=EPR’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웜홀을 고안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웜홀은 수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지만, 이렇게 풀어낸 웜홀이 갖는 물리적 특징은 에너지 조건을 만족하지 않거나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다. 설명할 수 있으면서 안정성이 보장되는 웜홀을 찾는 이유다. 2018년 박 교수를 비롯한 국내 연구팀은 비선형 전자기 이론의 일종인 아인슈타인-보른 인펠트 중력 이론과 우주상수를 활용해 웜홀을 설명하는 방식을 담은 논문을 국제학술지 ‘유럽물리학술지 웹오브콘퍼런스’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제시한 접근법에 따르면 웜홀 구조의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되던 웜홀의 목이 가진 불연속성이 해결된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고, 웜홀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웜홀을 제시했다. doi: 10.1051/epjconf/201816809003
파스칼 코이랑 프랑스 리옹사범학교 연구원팀도 지난해 10월 국제학술지 ‘국제 현대물리학 저널D’에 웜홀을 재해석한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코이랑 연구원은 웜홀에 대한 새로운 풀이를 통해 웜홀 목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웜홀의 안정성은 알려져 있는 것보다 높을 수 있다”며 “질량이 있는 입자가 웜홀의 목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doi: 10.1142/S0218271821501066
박 교수는 “이외에도 중력파를 관측할 수 있게 되면서, 블랙홀과 우주에 대해 밝혀진 새로운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웜홀을 찾는 연구도 있다”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만남, 블랙홀 내부에 관한 연구까지 웜홀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웜홀 존재, 관측으로 확인 가능할까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웜홀의 정확한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실제 웜홀을 관측하고, 그 결과를 해석해야 한다. 그렇기에 웜홀 관측 방법에 대한 의논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2020년 8월 러시아 풀코보 중앙천문대 연구팀은 감마선 관측을 통해 웜홀을 찾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영국왕립천문학회지 월례회보’에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초대질량 블랙홀로 여겨지던 활동성은하핵(AGN) 중 일부가 웜홀일 가능성이 있으며, 웜홀과 블랙홀의 물리적 특징 차이에 따른 감마선 방출량의 차이를 구분해낸다면 웜홀을 찾을 수 있다. 물질은 물론 빛까지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블랙홀과 달리 웜홀에서는 빨려 들어가는 물질과 반대로 빠져나오는 물질이 충돌하며 엄청난 양의 감마선을 방출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doi: 10.1093/mnras/staa2580
중력파를 활용해서도 웜홀을 관측할 수 있다. 특히 블랙홀 내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웜홀의 경우에는 이미 관측한 중력파에 웜홀의 신호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오고있다. 실제로 중력파 검출 성능이 계속해서 발전하며 기존의 이론이나 관측 결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천체물리학적 발견이 이어지고 있다.
여러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웜홀의 이미지는 상상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우주의 탄생과 진화의 비밀을 풀려는 과학자들에게 웜홀은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다.
김성원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명예교수는 “초끈 이론에서는 블랙홀과 웜홀이 우주 끈과 상호작용하며 현재의 팽창하는 우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가설도 있다”며 “웜홀을 통해 우주의 진화와 암흑에너지 등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