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분이나 지났을까. 그 사이 한 일이라곤 인사를 주고받고 담소를 나눴을 뿐이다. 한 번씩 얼굴을 유심히 보는 것 같았지만 얘기에 집중하는 것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김종열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한의학 박사)은 기자를 ‘진찰’하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 목소리, 체형, 성격까지. 그리고 그는 소음인과 소양인의 특징을 동시에 갖춘, 한의사 입장에서는 ‘어려운 환자’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여러 가지가 ‘사맛디 아니한’ 소음인이라는.
체질=유전자, 사상의학=집단유전체학
한방병원에 갈 때면 이따금 듣는 체질 얘기였다. 그때마다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 하나. 체질은 과학일까? 한국 인구만 5000만 명인데, 이들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이라는 4가지 체질로 한데 묶어 체질별로 한 사람인 양 처방하는 일이 과학적일까?
김 박사는 “그렇다”고 말했다. 한의학에서 체질은 단순히 오장육부의 특성만이 아니다. 외모에서 체격, 성격, 행동, 오장육부의 강약까지, 타고난 개인의 특성 전체가 체질이다.
한의학에서 체질이 다르다는 말은 서양의학에서 유전자가 다르다는 얘기와 같다. 김 박사는 “체질을 객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유전자”라며 “체질을 기초로 한 사상(四象)의학은 집단유전체학인 셈”이라고 말했다.
2005년 김 박사는 ‘이제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제마는 19세기 말 조선의 유학자이자 의학자로 병증과 약리를 체질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한 사상의학의 창시자다. 사상의학은 유전자라는 개념만 없을 뿐 개인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내리는 한국판 ‘맞춤의학’인 셈.
문제는 체질 진단이 한의사의 주관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가령 어떤 사람의 체질을 진단한다고 하자. 한의사는 그 사람의 상태를 물어보고(문진), 눈으로 관찰하고(망진), 귀로 듣고(청진), 맥을 짚어(절진) 결론을 내린다. 모두 주관적인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다보니 한의사의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 체질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한의사들에게 혀의 설태(혓바닥에 끼는 흰색이나 황색 물질) 사진 몇 장을 보여주고 병명을 진단하게 한 뒤 며칠이 지나 사진 순서를 바꾸고 다시 보여주자 진단한 병명이 달라졌다고 한다. 김 박사는 “‘이제마 프로젝트’의 1차 목표는 체질진단의 과학화”라며 “누가 진단하든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태음인용 감기약, 소음인용 소화제?
‘윙~’하는 기계음과 함께 막대 센서가 손목을 살짝 건드렸다. 센서는 25초 동안 맥을 4번 측정했다. ‘명의’(名醫)의 고유 영역인 진맥을 로봇에게 맡기다니. 하지만 이 로봇 진맥기야말로 객관적인 진단 방법을 마련하겠다는 ‘이제마 프로젝트’의 야심작이다.
마치 한의사가 세 손가락으로 촌(寸), 관(關), 척(尺) 세 자리를 진맥하는 것처럼 ‘로봇 한의사’는 손목 주변을 움직이며 정확히 맥을 짚었다. 현재 28가지 맥 중 10가지를 짚는 수준이다.
최근에는 한국전기연구원과 함께 팔찌형 진맥기도 개발 중이다. 진맥기를 팔찌처럼 차고 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도록 한다는 것. 현재 연구원에 있는 로봇 진맥기는 병원용으로 개인이 휴대하기에는 너무 크다.
팔찌형 진맥기의 핵심 기술은 센서가 맥의 위치를 정확히 짚는 일. 맥의 위치가 1mm만 벗어나도 진맥 결과가 달라진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실험한 결과 같은 사람이라도 손목의 각도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졌다. 연구팀은 반복 측정을 하더라도 진맥 결과가 같게 나오도록 정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박사는 “이르면 3년 뒤 팔찌형 진맥기를 상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로봇 진맥기와 함께 설진기는 진단기기의 쌍두마차다. 설진기는 혀 사진을 찍은 뒤 혀를 4개 영역으로 나눠 각 부위의 색깔과 형태, 설태를 분석한다. 빨갛고 깨끗한 혀가 100점이라면 하얀색, 노란색, 검은색 설태 순으로 점수가 낮아진다. 김 박사는 “설진기는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아 눈으로 볼 때보다 정확히 진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마 프로젝트’가 가장 공들이는 연구는 체질별 유전자 분석이다. 가령 사상의학에서는 같은 비염 환자라도 태음인은 호흡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폐를 보강하는 치료를, 소음인은 소화기가 약하기 때문에 속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를 권한다. 만약 태음인과 소음인의 이런 차이가 유전적으로 확인된다면 머지않아 약국에 가서 ‘태음인용 감기약 주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지도 모른다.
분위기는 매우 희망적이다. 최근 연구팀이 비만 환자들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비만에 관련된 유전자 마커들이 태음인과 소음인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유전자 분석을 담당한 정상균 박사는 “효소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DNA 가닥이 벌어지는 온도가 서로 달라지는 성질을 이용해 체질 유전자를 탐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SCI급 저널에 게재하기 위해 현재 막바지 작업 중이다.
‘이제마 프로젝트’에는 이공계 대학의 축소판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여 있다. 한의학부터 물리학, 생물학, 통계학, 컴퓨터공학까지 전공 수만 10여개다. 한의사는 진맥과 설태 같은 사상의학의 기본 정보를, 물리학자는 로봇 진맥기가 얻은 맥파 분석을, 컴퓨터공학자는 분석 내용을 처리하는 프로그램 개발을, 통계학자는 분석 결과가 유의미한지 통계 해석을, 그리고 생물학자는 체질별 유전자 연구를 담당한다.
5만 명 체질정보은행 구축 중
김 박사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의학=과학’이라는 공식을 완성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뭉쳤다”며 “한국의 사상의학이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한 가지 당부도 덧붙였다. 사상의학을 객관적인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맥, 설진, 혈액 같은 신체정보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는 많을수록 좋다. 문제는 한방병원(한의원)에서 약을 처방한 뒤 체질이 확실하다고 판단된 사람의 데이터만 써야 하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 현재 1000명의 데이터를 확보한 상태다.
김 박사는 내년까지 1500명을, 프로젝트가 끝나는 2014년까지는 5만 명의 데이터를 수집할 계획이다. 그는 “수집한 데이터는 ‘체질정보은행’에 등록돼 로봇 맥진기를 개발하고 체질별 유전자를 분석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고 밝혔다. 사상의학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은 독자라면 자신이 다니는 한의원을 통해서 한국한의학연구원 ‘이제마 프로젝트’의 문을 두드려보자.
베트남 의사, 사상의학에 푹 빠지다
‘이제마 프로젝트’팀에는 사상의학에 푹 빠진 베트남 의사가 한 명 있다. 베트남 국립하노이의대를 졸업한 팜 죽 주옹 박사다. 그는 사상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지난 3월 한국 유학길에 올랐다. 현재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김종열 박사가 그의 지도교수다.
베트남 전통의학병원에서 의사로 있던 그가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온 이유는 사상의학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김 박사는 베트남 전통의학병원의 50주년 축하 차 들렀다가 팜 박사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서양의학 과정을 마친 뒤 2년 동안 베트남 전통의학 과정을 밟도록 하는 하노이의대 규정 상 양의와 전통의학 모두에 정통한 팜 박사가 사상의학에 큰 관심을 보인 것.
그는 “졸업 후 내과를 선택했지만 전통의학이 환자에게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대신 경험으로만 전해지는 전통의학을 표준화하고 체계화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제마 프로젝트’에서 베트남의 전통의학을 표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가겠다는 것.
한국어는 ‘반갑습니다’ 정도 밖에 모르는 그는 영어로 번역된 사상의학 책을 읽으며 현재 ‘열공’ 중이다. 사상의학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3년 뒤 그가 베트남에 돌아가 사상의학 ‘서포터’로 활약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