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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나고 우리나라가 평화유지군을 이라크에 파병했잖아요. 우리 평화유지군이 과거, 특히 동학혁명 시기로 가면 어떻게 될까 고민하다가 습작 삼아 소설을 썼죠. 또 중간에 쓴 내용을 한편씩 인터넷사이트에 올렸는데, 조회수가 최고 100만 회를 넘을 정도로 네티즌의 반응이 뜨거웠고 출판사에서도 연락이 와 책까지 냈어요.”

벚꽃과 개나리가 핀 캠퍼스를 지나 연구실을 방문하자 안도열 서울시립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자신이 쓴 ‘임페리얼 코리아, 대한제국 대백과사전’(이하 임페리얼 코리아)을 집필한 동기를 들려줬다. 총 5권의 시리즈물인 이 책은 2003년 말에 출간된 SF역사소설인데, 2004년 한국군대와 과학자들이 중동에 파견되던 중 웜홀(우주시공간의 ‘벌레구멍’)에 빠져 1894년 조선으로 가는 내용을 사건의 발단으로 삼고 있다. 이어 이들은 동학혁명의 우금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 산업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세계적 강국으로 키운다는 내용이 전개된다.

2005년 안 교수는 양자컴퓨터 전문 벤처기업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스릴러물인 ‘소설 양자컴퓨터’를 ‘문학동네작가상’에 투고해 예심에 오르기도 했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역학이라는 미시세계의 물리학을 이용해 정보를 처리하는 차세대 컴퓨터다. 그가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전문작가상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갑자기 그의 전공이 의심스럽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양자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IBM 슨연구소에 재직하다 1996년 서울시립대 교수로 부임했다. 소설의 소재였던 양자컴퓨터가 사실 그의 연구대상이다.

안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지원하는 ‘양자정보처리연구단’을 10년간 이끌며 반도체를 이용한 양자컴퓨터를 구현하기 위한 실험과 연구를 해왔다. 그동안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 저널에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들 논문의 총 인용횟수는 2000회가 넘는다. 2005년 그는 반도체 양자우물 레이저 이론과 양자정보통신 연구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전기전자학회 석학회원’(IEEE Fellow)으로 선정됐다. 물론 양자컴퓨터 연구만큼이나 소설 집필에 대한 열정도 불태우고 있다.
 

서울시립대 교정에 꽃이 아름답게 핀 벚나무 아래에서 자신이 쓴‘임페리얼 코리아’를 들고 포즈를 취한 안도열 교수.


작가인 아버지의 영향 커

그의 ‘다빈치’기질은 어릴 때부터 싹텄다. 초등학교 때 그는 미국의 아폴로 탐사선이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고 막연히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다.

그의 소질을 눈여겨 본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고등학교 때까지 유화를 그렸지만 화가의 꿈은 접었다. 대신 최근 소설을 쓰며 회화 실력을 뽐내고 있다. 직접 삽화도 그려 넣고 있는 것.

그는 다분히 소설가인 아버지(안동민)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대학 1학년 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어느 날의 아담’ ‘2064년, 우주소년 삼총사’ 같은 소설작품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한테 따로 글쓰기를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 집에 책이 많아 어려서부터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아이작 아시모프나 폴 앤더슨이 쓴 SF문고판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 틈만 나면 읽었다. 영어로 된 이 책들을 읽으며 영어도 공부했지만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지구 존재도 기억하지 못하는 머나먼 미래에 우리은하의 수많은 행성에 퍼져 살고 있는 인류의 역사를 그린 아시모프의 장편 SF시리즈 ‘파운데이션’은 보고 또 보며 수십 번은 읽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때는 1998년부터였다. 서울시립대 교수로 부임한 지 2년 뒤 단조로운 논문만 쓰다 보니 왠지 모르게 조금은 새로운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 중 아침에 1시간씩 짬을 내 2년 남짓 애쓰며 탈고한 작품이 ‘임페리얼 코리아’다.
 

안 교수가 한 연구원에게서 끝부분에 인공원자가 들어 있는 탐침을 건네받고 있다. 이 탐침을‘극저온 고자기장 장비’에 넣어 인공원자의 양자역학적 특성을 측정할 수 있다.


소설은 사고실험?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건과 등장인물을 조합해놓고 제한조건을 주면 이들이 상호작용하며 이야기가 전개되죠. 마치 과학실험을 하는 것과 비슷해요.”

‘임페리얼 코리아’에는 웜홀 외에도 양자컴퓨터, 반도체, 레이저, 상대성이론 등 과학적 요소가 많이 등장해 이들 요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또 기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기원전 1만 년에 건설됐을지 모른다는 주장과 아틀란티스 전설처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힘들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소설에 끌어들였다. 이 대목이 소설에서 안 교수가 인상적이라고 꼽은 장면이다.

“화성과 목성 사이에 수백만 개의 암석이 떠도는 소행성대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첨단문명을 가진 오시리스(이집트 신)라는 행성이 하나 있었는데, 기원전 1만 년쯤 지구를 식민지로 삼아 이집트에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도 만든다. 오시리스문명은 강력한 외계문명과의 우주전쟁에서 패하면서 지구(아틀란티스)로 망명하지만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오자 자신들의 첨단기술을 기록한 장치를 백두산에 숨겨놓는다. … 1940년대 대한제국 사람들이 이 고대기록장치를 발굴한 뒤 일부 기술을 해독해 개발에 나선다. 반도체기술과 핵융합기술을 개발하고 양자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전 세계 컴퓨터를 ‘해킹’하면서 무슨 정보든지 알아내는 한편, 우주공간에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축한다. 다른 나라를 먼저 침입하지 않으며 자국을 지킬 군사력을 갖춘 ‘무장중립국’인 대한제국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초일류국가로 발돋움한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시끄러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얻었으리라. 그는 ‘임페리얼 코리아’를 쓸 때만 해도 과학적 요소를 중시했지만 요즘엔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소설 양자컴퓨터’의 경우 문학동네작가상 예심에서 문체는 깔끔하지만 등장인물의 성격이 평면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에 자극을 받아 복합적인 인물을 그려내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후배와 함께 갈등을 많이 넣은 미스터리소설 ‘홀리 바이블’을 집필하고 있다.
 

설계된 인공원자를 반도체 제작공정으로 만드는 장비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안 교수. 반도체 인공원자를 이용한 양자컴퓨터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안 교수의 꿈이다.


소설 덕분에 탄생한 양자블랙홀 논문

공교롭게도 그는 소설을 쓰다가 논문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임페리얼 코리아’에 나오는 웜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블랙홀이론을 독학으로 3년가량 공부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블랙홀도 일종의 양자컴퓨터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정보를 블랙박스에서 처리한 다음 새로운 형태의 양자정보로 바꿔 내보내는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블랙홀에서 양자정보가 보존될 것인가를 두고 영국의 스티븐 호킹이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존 프레스킬과 내기를 했다가 졌죠. 연구를 하다 호킹이 왜 졌는지 알아냈어요. 그가 경계조건 하나를 안 썼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쓴 논문이 2006년 10월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 D)에 발표한 논문이다. 지난해 3월에는 초기조건을 조절하면 블랙홀의 진화를 제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로 논문을 써 ‘고에너지 물리학 저널’(Journal of High Energy Physics)에 발표했다.

“소설에서처럼 과거로의 시간여행까지는 모르지만 웜홀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죠. 소설을 쓰면서 인세도 받았지만(웃음) 양자블랙홀과 관련한 논문을 10여 편 쓴 게 더 큰 소득이랍니다. 최근에는 우주 초기에 생성된 원시블랙홀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안 교수는 4년 전부터 미국의 3대 출판사 중 하나인 와일리(Wiley)의 요청을 받아 공대생을 위한 양자역학 교과서도 집필하고 있다. 총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양자역학의 기본, 양자컴퓨팅, 양자역학의 다른 응용 등을 담을 예정이다. 그는 “현재 80% 정도의 분량을 썼는데, 소설 쓰기보다 어렵다(웃음)”며 “6월 데드라인을 늦춰 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1998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으로 출범한 ‘양자정보처리연구단’은 지난해 도약연구사업단에 뽑혀 양자컴퓨터의 실현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안 교수는 “아직까지 인공원자 1개의 양자상태를 제어하는 수준”이라며 “2012년쯤 3~4개의 양자정보(큐빗)를 제어해 양자컴퓨팅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원자를 반도체로 만들면 전자가 양자역학적 상태가 되므로 이를 양자정보로 이용하고 제어하는 원리다. 인공원자로 2개 이상의 연산(덧셈, 뺄셈)을 한꺼번에 하는 게 연구단의 목표다.

사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면 기존 슈퍼컴퓨터로 수억 년 이상 걸리는 복잡한 계산을 몇 분 내에 끝낼 수 있다. 지금의 컴퓨터보다 10억 배나 빠른 양자컴퓨터가 나오면 초 단위로 기상 예보를 하거나 유전자 지도를 해석해 태어날 아이의 외모와 지능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 같은 세상을 구현할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그는 오늘도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특별한 장르 안 가리는 ‘잡식성’


1. ‘임페리얼 코리아’ 몇 권이나 팔렸나?
2만 부 좀 넘게 나갔다. 인터넷사이트에서 볼 만큼 봐서 많이 안 팔렸나 보다.

2. SF영화 시나리오를 쓸 생각은 없나?
글쎄. 누가 돈을 주고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해오면 생각해보겠다. 사실 소설을 집필할 때 시나리오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시나리오처럼 장면 하나하나를 구상하며 글을 쓴 뒤 전체 소설을 완성한다.

3. 책은 얼마나 읽나?
1주일에 한두 권씩 본다. 주로 소설을 많이 읽는다. 특별한 장르를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소설을 읽는 ‘잡식성’이다. 주로 작가 한 사람을 정한 뒤 그의 작품을 다 읽는다. 마이클 크라이튼, 존 그리샴 같은 작가의 소설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미국 추리소설작가 레이몬드 챈들러,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00번쯤 읽은 것 같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나의 미발표작 ‘코마’ 이야기


“현우와 수민은 결혼기념일에 설악산에서 일출을 보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남편인 현우는 타박상만 입었지만 아내인 수민은 뇌를 다쳐 깊은 코마(식물인간 상태)에 빠진다. 

담당의사는 원자나 분자 크기의 아주 작은 로봇인 나노머신을 이용하지 않으면 수민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나노머신 치료법은 이제 막 임상시험을 시작하는 단계지만, 현우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이 치료법에 동의한다. 의사가 수민에게 나노머신을 주입하자 나노머신은 대뇌에 자리하고 분자 수준에서 고장 난 조직을 복구한다. 한 달 정도 지난 뒤 수민은 의식을 되찾지만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겪는다. 10년 이상 젊어진 것. 나노머신이 생체시계를 20대 후반에 맞춰 수민을 복구했기 때문이다. 담당의사는 수민이 영영 늙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우는 이대로라면 젊은 아내 옆에서 백발노인이 될 자신을 떠올리며 다시 괴로워한다. … 순간 몸을 기대려던 벽이 흐물흐물해지며 암흑의 심연으로 빠진다. 이때 아내가 흔드는 바람에 꿈에서 깨는 현우.”

2005년에 쓴 단편소설 ‘코마’다. 어디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작품이다. 수술 부작용으로 젊어진다는 내용이 황당하다고 생각하거나, 뒷부분이 김빠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래서 올해 초 ‘코마’의 시나리오 버전은 결말을 좀 더 참신하게 썼다. “… 부작용으로 젊어진 아내에 대해 남편이 오해를 해 두 사람은 크게 다투고 아내가 집을 뛰쳐나간다. 뒤늦게 자기 잘못을 깨달은 남편이 아내를 찾아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코마에 빠진 남편의 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남편은 나노머신 치료법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간다.”

사실 독자들이 읽고 나서 무릎을 탁 치며 속았다고 말할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스타트렉’처럼 나노머신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영화를 보고 소설 ‘코마’를 구상했다. 미래에는 나노머신이 항암제 같은 약물을 암세포에만 전달하는 치료법이 등장할 테지만, 잘못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을까.

200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현진
  • 이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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