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어느날 오후. 인터넷 지도 서비스를 이용해 미국 시카고의 미시간 애비뉴에서 쇼핑을 했다. 쇼핑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드레이크 호텔 앞에서 영국에 있는 친구와 화상 캠으로 만났다.
길을 따라 매장을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30% 특별세일 표시가 붙은 건물을 선택하자 매장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매장이라고 시카고 트리뷴에 두 차례나 소개됐고 많은 블로거들이 옷의 질이 좋다고 평가한 괜찮은 옷 가게였다.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한번 입어나 볼까. 지난달 스캐닝한 내 몸 정보를 전송하니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나타났다. 친구가 ‘잘 어울린다’고 평가하기가 무섭게 ‘지름신’은 어김없이 내 손을 ‘구매 버튼 클릭’으로 이끌었다.
이번 주말 새로 산 옷으로 치장하고 봄나들이 갈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들뜬다.
*‘가상공간상의 현실’이 생활 속 깊이 파고든 미래의 모습을 그려봤다. 이런 일이 마냥 소설 같은 얘기만은 아니다. 최근 시각과 청각에 관련된 정보는 물론 촉각과 심지어 후각에 대한 정보를 현실과 똑같이 전송해 재생하는 기술이 개발 중이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에 현실과 똑같은 공간을 만드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첨단 IT회사의 대명사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수 조원을 투자하며 세상의 복사판을 구축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걸까.
핵심가치는 ‘정보의 공간화’
2004년 10월. 구글이 대용량의 위성영상을 인터넷에 서비스하는 ‘키홀’이라는 회사를 인수 합병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인터넷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구글이 왜 지도서비스를 하는 작은 회사를 인수했을까.
당시 미국 시카고에 있는 지도정보 벤처기업 ‘포레스트 원’의 기술담당이사(CTO)로 근무하던 필자는 회사의 경영진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다. 그리고 구글이 대용량 영상지도서비스 사업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2005년 6월. 구글은 지구 전체의 위성사진을 모아 ‘구글어스’라는 서비스를 시작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곧이어 구글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도 ‘버추얼어스’라는 비슷한 영상지도서비스를 시작했다.
1998년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가 처음 주창한 ‘디지털어스’, 즉 사이버공간에 실제지구의 복사본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국가가 아닌 기업이 먼저 실현한 셈이다. IT 업계의 두 ‘공룡기업’은 왜 수 조원에 이르는 돈을 지도정보서비스에 쏟아 부은 걸까.
21세기 들어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래서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는 패러다임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많다보니 이젠 ‘쓸모 있는 정보가 중요하다’는 패러다임이 곧 이를 대체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관리하는 일이 더 중요해 졌다는 뜻이다.
지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컨텐츠지만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고품질의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현실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 서비스를 제공해 브랜드파워를 높이고, 나아가 이를 이용해 정보 검색이나 상품 판매 같은 핵심 비즈니스영역을 강화하려는 속셈이 있다.
지도의 가치를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정보의 공간화’다. 정보의 공간화는 현실의 모든 정보에 위치 정보를 붙여 관리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 검색어로 ‘중국집’을 검색했다고 하자. 1초도 안 돼서 중국집의 역사부터 전국에 있는 수많은 중국집 전화번호가 모니터에 뜨겠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는 검색한 사람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집이다.
만약 세상의 정보에 위치 정보를 붙인다면 정보를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검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검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사는지 따라 차별화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길을 걷다가 쇼핑하듯 가상공간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정보의 공간화’를 구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구축해야 할 기초가 바로 전 세계를 정밀하게 재현한 영상지도다. 이런 흐름을 재빨리 파악한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재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위성사진과 항공사진의 대결
가상공간에 ‘또 하나의 지구’를 각각 구축하고 있는 구글어스와 버추얼어스가 제공하는 지도정보 서비스의 방향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 구글어스가 지도를 만드는데 고해상도 위성영상을 사용하는 반면, 버추얼어스는 항공사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구글어스가 사용하는 위성영상은 지상사진 촬영용 위성이 한꺼번에 넓은 지역을 찍기 때문에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의 위성영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직방향에서 도시를 내려다 본 위성사진이라 건물의 높이를 구분하기 힘들다.
구글어스는 최근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지상에서 찍은 사진을 연결해 만든 ‘스트리트뷰’라는 거리지도를 만들어 주력 상품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반면 버추얼어스는 전통적인 항공사진측량기술을 혁신해 두 장 이상의 영상을 이용해 정밀한 3차원지도를 제공하고 있다. 항공사진은 위성사진에 비해 고도가 낮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 입체감이 더 난다. 그러나 항공사진은 위성사진에 비해 한 번에 좁은 지역만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주요 도시에 대한 3차원 지도만 서비스하고 있다.
구글어스와 버추얼어스의 평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구글어스는 넓은 지역의 영상지도를 구축하고 있지만, 주요지역에 대한 영상지도 질에서는 정교한 3차원 지도를 제공하는 버추얼어스가 앞서있다.
이런 구도에서 최근 두 기업의 경쟁은 지상 3차원 맵핑과 항공 3차원 맵핑의 경쟁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 카메라 한 대로 찍은 연속사진을 모자이크해서 거리지도로 제공하는 구글어스는 머지않아 두 대 이상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만든 정밀한 3차원 지도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버추얼어스는 더 많은 항공사진을 확보해 서비스 지역을 넓혀 나간다는 전략으로 응수하고 있다.
지구 영상지도 쥐는 자, 미래를 얻는다
네티즌들은 일단 구글어스의 지상 3차원 맵핑 방식이 사용하기에 더 편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지상 3차원 맵핑 영상지도를 만드는 비용이 버추얼어스가 사용하는 항공 3차원 맵핑 방식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또 현시점에서는 거리의 자세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글어스의 ‘스트리트 뷰’보다 넓은 지역을 3차원으로 대략 보여주는 버추얼어스에 손을 들어주는 네티즌도 많다.
앨빈 토플러는 최근 저작 ‘부의 미래’에서 “필요한 정보에 얼마나 쉽고 빠르게 접근하느냐가 권력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가 전작 ‘권력이동’에서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 비하면 좀 더 정교해진 표현이다.
현재 구글어스가 영상지도 서비스 산업의 선발주자로써 시장을 이끌고 있지만, 앞으로 이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아울러 미래 정보산업의 패권을 어느 회사가 쥐게 될지 예측하는 일도 흥미롭다.
전 지구 영상지도 서비스는 가상의 지구를 여행하는 재미를 준다는 점을 넘어, 미래 정보관리 방식에 큰 틀을 제공할 것이다. 나아가 권력의 수준을 결정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지도가 미래 정보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가상공간상의 현실*
가상공간상의 현실은 가상현실과 다르다. 가상현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가상으로 구현했다면, 가상공간상의 현실은 실제 존재하는 세상의 축소판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