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에 수백만 개가 새로 생겨난다. 몸무게가 75kg인 사람은 약 60조 개를 지닌다. 며칠도 안 돼 늙어버리는 것부터 사람의 수명만큼 오래 사는 것도 존재한다. 정답은 바로 세포. 건강한 성인이라면 몸에서 약 2조 개의 세포가 매일 탄생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쑥쑥 성장할 수 있는 까닭은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일어나기 때문인데, 임무를 다한 세포는 사멸하면서 세포 수의 균형을 맞춘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태아로 자라나는 과정도 세포분열로 일어난다. 탄생과 성장과정에서 고등생물을 키운 것은 팔할 이상이 세포분열인 셈이다.
암세포 만드는 유전자 따로 있다?
포스텍 생명과학과 조윤제 단장은 “건강한 유전자만이 싱싱한 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세포핵 속의 ‘블랙박스’인 DNA에 기록돼있는 유전정보는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딸세포로 전달되며 대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세포분열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포주기에 따라 한 번만 DNA 복제가 일어나야 하는데도 끊임없이 복제되거나, 손상을 입은 유전자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사가 일어날 수 있다. 전사란 DNA의 유전정보를 담은 ‘복사본’인 RNA를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조 단장은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고장 나면 세포의 분열 속도가 느려지면서 노화가 일어나거나 반대로 세포가 너무 왕성하게 분열해 암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노화와 암은 비정상적인 세포분열이 초래한 부작용인 셈이다. 조 단장의 관심은 정상적인 세포를 돌연 암세포로 둔갑시키는 유전자에 맞춰져있다.
박테리아 같은 원핵생물과 달리 고등생물은 세포분열 과정에서 DNA 복제가 한 번만 일어난다. 바로 제미닌이라는 단백질이 DNA 복제가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는 ‘사령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조 단장은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밝히기 위해 방사광가속기로 제미닌의 3차원 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제미닌이 긴 전화선 두 개가 꼬여있는 모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 단장은 “제미닌의 한쪽 끝은 유전자를 복제하는 단백질(Cdt1)에 붙어있고, 다른 한쪽 끝은 Cdt1이 다른 단백질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설명했다. 길게 꼬여있는 양팔로 세포분열주기 동안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연구결과는 2004년 8월 영국의 과학저널인‘네이처’에 실렸다.
그는 “세포 안에서 특정 단백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단백질의 구조를 분자 수준으로 들여다보는 일”이라며 “제미닌 단백질의 구조를 파악하면 기능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미닌에 이상이 생기면 DNA가 여러 번 복제되면서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암이나 유전병을 일으킬 수 있다.
DNA의 복제가 잘 일어나도록 조절하는 단백질도 있다. 연구단은 제미닌과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단백질인 진스(GINS)의 작동 메커니즘을 밝혀 지난해 6월 국제과학저널인 ‘유전자와 발생’(Genes and Development)에 발표했다.
DNA가 복제되기 위해서는 일단 DNA의 이중나선이 풀려야 한다. 고등생물의 세포에서 이 기능을 담당하는 단백질(MCM)은 정밀한 분자 스위치에 의해 조절된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조 단장은 MCM을 켜고 끄는 스위치의 역할을 하며 동시에 복제과정에 필요한 DNA 중합효소를 한데 모으는 주인공이 진스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전자의 복제를 돕는 단백질의 정체가 드러나며 세포의 노화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거란 기대를 해볼 수 있다.
상처 입은 유전자 보호하는 ‘주치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새살이 곱게 돋아나지도 않고 보기 싫은 흉터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유전자가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전사가 일어나면 비정상적인 세포가 태어난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Rb단백질이‘주치의’로 활약한다.
우리 몸속에 상처 입은 유전자가 발견되면 Rb단백질은 그 유전자가 기력을 회복할 동안 보호한다. 아픈 유전자인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전사인자(E2F 단백질)를 꼭 끌어안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만약 Rb단백질이 고장 나면 고삐 풀린 E2F 단백질이 유전자의 전사를 계속한다. 그 결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세포나 병든 세포도 끊임없이 분열하며 암세포로 변하고, 안암과 자궁경부암을 일으킨다.
조 교수는 Rb단백질이 활동하는 모습을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해 3차원으로 규명했다. Rb단백질에 이상이 생기는 원인은 외부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추측되지만 아직 그 메커니즘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 교수의 연구 덕분에 안암이나 자궁경부암 환자를 Rb단백질을 이용해 치료하는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
“구조생물학자인 저는 몸속 단백질이 어떤 구조와 기능을 갖는지 관심이 있습니다. Rb단백질 같은 경우 항암제를 디자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지만 결코 신약 개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먼저 세우고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순수과학자다운 면모를 보이는 그에게도 미국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낼 때 암환자들의 편지를 받고 가슴 찡했던 시절이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어려운 논문을 읽고, 신약개발 뉴스에 귀 기울일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기 때문에 조단장은 자신의 연구가 활발히 응용되는 일이 내심 반가운 기색이다.
최근 그는 DNA가 원활히 복제되게 하는 단백질 한 쌍(Mus81, Eme1)의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 중이다. DNA의 이중나선이 풀리며 복제가 일어날 때 자외선 같은 강한 자극을 받으면 세포 안에 두꺼운 벽이 생기며 복제가 멈춘다. 이때 두 단백질이 막힌 부분을 뚫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들을 만드는 유전자를 제거하면 곧바로 암이 생긴다. 조 교수는“두 단백질은 DNA와 극성이 달라 잘 결합하는 성질이 있으며 세포 복제의 장애물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며 “대장균이나 곤충세포에서 두 단백질을 배양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단장의 바람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그는 그저 자신이 연구한 결과가 차곡차곡 쌓여 후대의 생물학자나 의학자, 신약개발자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 유학시절 단백질의 ‘휘황찬란한’ 분자구조에 반해 구조생물학을 시작했다는 조 단장은 그때 품었던 초심(初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백질의 구조부터 차근차근 연구하다보면 언젠가는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암으로 돌변하는 ‘세포의 반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Interview 조윤제 단장
단백질 설계도 그리는 과학계 ‘다빈치’
인간의 17번 염색체에 위치한 p53 유전자는 종양억제유전자로 잘 알려져 있다. p53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과 아미노산의 합성물질은 DNA에 직접 결합할 수 있다. 이들은 세포의 생사여탈권도 쥐고 있어 건강하지 못한 세포는 냉정하게 자살을 유도한다. 세포가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셈이다.
암환자의 절반 이상이 p53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발병하는데, 조 단장은 p53 단백질에서 변이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아미노산의 구조를 분자수준으로 밝혔다. 미국 코넬대 유학시절의 일이다.
집의 설계도만 봐도 가정집인지 카페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단백질의 구조를 알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때 그는 단백질의 ‘설계도’를 그리는 구조생물학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한번은‘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이라는 과목의 강의가 너무 재미있어 한 학기의 수업이 끝나자 다음 학기에 또 청강하기도 했다.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조 단장이지만 이 수업만큼은 두 번 들어도 질리는 줄 몰랐단다. 수업이 끝난 뒤 교수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데, 조 단장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재직 중인 포스텍에서도 토론형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 살면서도 집과 실험실만 오가던 유학시절은 제게도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딴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죠. 하지만 제자들은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실험실에 있는 학생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는 그이기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격려하고 친형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과 함께 한 달에 두세 번씩 볼링게임을 즐기고 아름다운 포항 바다를 찾기도 한다.
그는 “포항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있는 대신 깨끗한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있어 그 어느 곳보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단백질의 구석구석을 스케치하듯 그려내는 이들의 노력이 밑거름돼 훗날 암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신약이 탄생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