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뚝딱거리며 실험실에 앉아 있을 것 같은 공학자가 책상에 앉아서 숫자들과 끝없이 씨름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신호검파이론으로 통신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쓰려고 하는 송익호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정보를 최대한 안전하고 정확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동통신 시대의 열쇠, 서명수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론공학자를 만나본다.
흔히 ‘전자공학자’ 하면 복잡한 전선과 전기기구들이 널려있는 실험실에서 납땜을 하고, 오실로스코프로 뭔가를 지켜볼 것 같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상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공학자가 있다. 바로 신호검파이론으로 이동통신의 새로운 모형을 제안한 송익호(40, KAIST 전자전산학부) 교수가 그렇다.
1876년 벨이 그의 조수와 최초의 통화를 성공시킨 후 통신의 역사는 숨가쁘게 달려왔다. 통신은 현재 이동통신이란 이름으로 변화한 후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바꿔주는 위치에 올라있다. 예를 들어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구입하는 것을 비롯해 무선 전자상거래, 패스트푸드점, 주유소 등에서 카드를 대체할 이동통신 단말기(CDMA2000-1x)가 등장하면서 신세대에게는 휴대폰으로 물건값을 결제하는 일이 직접 돈으로 지불하는 것보다 편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손안의 개인비서로 불리는 PDA는 모바일 컴퓨터 환경이 필요한 사용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기다 이제 곧 상용화될 차세대 이동통신 IMT-2000은 전세계 어디서나 상대방을 보고 통화할 수 있는 초고속 이동통신시대를 열 것이다. 그야말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버린 이동통신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의 기본은 신호에 정보를 실어서 보내고 받는 것, 그리고 신호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통신의 역사에서 가장 고전적인 문제인 검파다.
잡음 속에서 신호 잡아내는 검파이론
보통 신호를 검파한다는 말은 잡음 속에서 신호를 효율적으로 잡아내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잡음이 넘쳐난다. 여기에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잡음도 있지만 들을 수 없는 잡음이 더 많다. 이러한 잡음들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또는 상대방이 보내준 신호를 찾으려면 잡음보다는 더 큰 세기의 신호가 필요하다. 더 큰 세기라 함은 더 큰 전력을 소모한다는 말로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얘기다.
송교수의 신호검파이론에 따르면 작은 세기의 신호도 검파할 수 있는 방식이 제시돼 있다. “검파이론과 관련해 계속 특허를 내고는 있지만 아직 실제로 구현된 시스템은 없어요”라고 말하면서도 “물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가상 공간에서는 새로운 통신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죠”라며 미소짓는다. 이것은 통신 시스템이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방식, Code Division Multiple Acess)는 우수한 보안성 때문에 19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군사통신 기술로 인정됐고 벤처기업인 퀄컴이 개발해 1993년 미국의 이동통신 표준으로 채택됐지만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것은 1996년 우리나라에서다. 통신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상용화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이론이 상용화란 빛을 보기까지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82년부터 서울대 대학원에서 시작한 새로운 신호검파이론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수학하던 시절을 거쳐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은 지난 1999년. 송교수의 신호검파이론이 실제 세계에서 유용한 통신시스템으로 거듭난다면 18년간 한 문제에 매달려 온 보람을 찾을 것 같다는 말에 “통신의 기본적인 문제를 풀었다는데 만족해요”라며 순수과학자 같은 면모를 내비친다. 공학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둘만한 응용성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할 만큼 태연한 모습이다.
사실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던 그의 고등학교 때 꿈은 물리학자였다. 초등학교 때 길에서 사본 헌책 ‘재미있는 수학’을 방 한구석에서 보며 신기한 눈망울을 굴리던 그는 수학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재미있는 수학이란 책이 정말 재미있었어요”라며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얼굴에서 초등학생의 천진난만함이 묻어나왔다. 그 후 고등학교때는 물리에 매료됐다. 틈틈이 현대과학신서를 보며 입자물리학자로서의 꿈도 키웠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순수과학도로서의 꿈은 접어야 했다. 보다 실용적인 공학이 자신의 진로에 더 적당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공학분야에서 이론적인 기초 연구를 하는 그를 보면 길게 돌아온 듯 하지만 자신의 꿈은 이룬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의 대학원 수업
송교수는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한다. 대학원 전공필수 과목인 ‘확률과정’이라는 그의 수업이 시작하면 학생들은 초긴장상태로 접어든다. “확률이란 무엇인가?” “확률변수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봐라” 등 수업이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대학원생 박사과정에 있는 윤석호씨는 “교수님은 첫시간에 대학원생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수업내내 질문을 던지세요. 처음에는 좀 황당했죠. 철학 수업도 아니고. 하지만 한학기가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남아요”라면서 이제는 송교수의 수업에 난색을 표하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입장이 됐다고 말한다.
사실 송교수가 수업을 이렇게 진행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물리선생님이 “공부는 너희들이 하는 거다. 즉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라고 했던 말씀으로부터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한테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또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모호한 말로 대충 그럴듯하게 포장한 설명에는 일격을 가한다. 그는 수업시간에 배워야 할 것이 교과서의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의 공유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고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철저한 예습과 더불어 조리있게 말해야하는 이중고가 있으니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송교수를 어려워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한글 사용이다. 말을 할때 우리나라 말과 영어를 혼용해 쓰거나 적절하지 못한 용어를 쓰면 즉각 지적을 받기 때문이다. “앰플리퓨드(amplitude)가 하이(high)하다거나, 쌍둥이인데 얼굴이 틀리네(틀리다 대신 다르다를 써야 한다)라고 하면, 바로 교정문이 날아옵니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박소령씨의 말이다. 실제로 송교수는 국문 논문에서 가능하면 외래어를 모두 한글로 바꿔 쓰기 때문에 국내 학회에서는 이미 이름이 나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1990년부터 한글학회 회원으로 가입돼 있었다. “특별히 하는 활동은 없어요. 그저 학생들에게 바른말 바른글을 쓰라고 꽤나 잔소리만 하죠”라며 겸연쩍어 한다. 특별한 계기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면 당연히 한글을 사랑해야 하고, 한글을 아끼고 가꿔야 하는 생각을 이어가자면 한글학회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눈앞의 사람이 공학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특이함과 평범함의 양면성
한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그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뭔가 계획하고 규칙을 세우면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송교수가 그의 대학원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논문을 쓸 때 아이디어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적절한 용어 선택, 문장 부호, 맞춤법, 띄어쓰기 등이 모두 중요합니다.” 이렇듯 논문지도에 철저하다는 것은 송교수가 ‘빨간 채찍’이란 별명으로 불린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외의 것에서 송교수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최대한 보장해주려고 한다. 자신의 연구 관심사가 학생들과 일치하면 제일 행복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관심과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학생들 고유의 아이디어,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으라고 시간을 주는 편이다. 부과되는 과제에 익숙했던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어려운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학생들은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 힘들게 얻은,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려는 자세가 그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송교수를 ‘특이하다’는 한단어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수준에 가까운 식성, 특별한 이유도 없이 양복을 입지 않으며, 권위있는 교수님보다는 선배처럼 대학원생을 대하는 태도, 학생들을 위해(?) 6-7시간 동안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자신은 술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 위해 온갖 좋은 술은 다 준비해 놓으며, 마이티(포커와 같은 카드 게임의 일종)에 대한 알 수 없는 충성심을 보인다는 점, 몸이 약하다면서 등산이나 조깅 때 보여주는 놀라운 체력 등 그 예는 이루 다 들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일상적인 기쁨에 감사할 줄 알고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완벽주의자로 비춰진다는 점이 특이하게 보이는 이면의 실체다.
정보보안 열쇠 서명수열
송교수의 친구인 이한재씨(한성건설)가 “그 친구 공부를 잘 했지만 평범했어요”라며 동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 어려서 집안이 어려웠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모교인 고려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어요”라고 귀띔한다. 자신이 어려웠기에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있는 모습 속에 평범함과 특이함이 모두 들어있다고 하면 좋을까.
이동통신이 생활 깊숙히 자리하면서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초고속으로 주고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중요한 정보를 보다 정확하고 안전하게 보내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CDMA 방식의 휴대폰을 사용한다고 하자. 이 시스템에서는 보통 하는 말을 변조한 다음 폭이 짧은 수열을 곱해서 보낸다. 그리고 이 정보를 수백 kHz 또는 몇만 Hz 대역으로 퍼뜨린다.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정보를 받을 때는 이전에 곱해준 수열을 다시 곱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수열(0과 1이 1천개 또는 그 이상 다양하게 반복된 수의 열)이다. 서울에 있는 송교수와 빌 게이츠가 통화를 할 때 쓰이는 수열과 다른 사람들이 쓰는 수열은 달라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송교수와 빌 게이츠 사이에 주고받는 정보를 알 수 없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통신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 간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교차상관을 줄인다라고 하는데 이때 쓰이는 수열을 ‘서명수열’이라 한다.
교차상관을 줄여주는 수열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신호의 세기를 충분히 세게하는 것도 간섭되는 신호를 상대적으로 줄여주므로 정보를 안전하게 실어나르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력을 세게해야 한다는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교차상관이 적은 서명수열을 찾으려는 이유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몰래 들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교차상관이 0인 수열이 좋다. 하지만 그러한 수열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송교수는 새로운 수열들의 집합을 찾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지금 쓰는 수열의 교차상관이 0.1인데 만약 교차상관이 0.05인 수열을 만들었다고 하자.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통화를 할 때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국가나 산업체의 중요한 정보가 수시로 교환되는 통신환경에서 정보의 보안성 측면에서 발생하는 그 효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여기다 화상정보인 경우에는 간섭이 없기 때문에 화질까지 담보할 수 있어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론적으로 식을 만들어 교차상관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그 값이 적당하지 않으면 다시 이론을 세운다. 교차상관이 기대하는대로 낮게 나오면 모의실험을 통해 실제 세계에서 통신이 이뤄질 경우 교차상관이 얼마나 될지를 확인한다. 여기까지가 그의 연구다. 실제 세계에서는 또다시 수많은 변수들 때문에 예측했던 결과와는 다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한 모의실험에서 가능한한 그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수학자들의 영역같다는 말에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수학이란 학문에 점점 매력을 느끼게 돼요”라며 껄껄 웃는다. 그러면서 형식적인 언어의 유희라 불리는 고차원적인 수학을 새롭게 공부해보고 싶다고까지 했다.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TI)를 소재로 한 영화‘콘택트’를 보면 외계로부터 전해지는 신호를 수신하는 전파망원경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작년 4월 SETI연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근교에 지름 약 4m짜리 위성용 접시안테나 7기를 설치했으며 앞으로 더 설치해 세계에서 가장 큰 구경의 전파망원경을 만들 계획이다. 물론 목적은 지구와 가까운 1천여개의 별에서 시작해 우리은하가 포함돼 있는 1백만개의 가능성 있는 별들로부터 올것이라고 믿어지는 신호 포착이다. 그런데 이때 우주에서 날아오는 신호들은 모든 파장의 영역에서 가능하고 세기가 미약하며 서로 간섭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의미있는 신호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일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적어도 송익호 교수에게는 그런 모양이다. 콘택트의 주인공 엘리 애로위가 우주의 신호를 들었던 것처럼 천문학자들이 우주의 신호를 읽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