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개월간 계속된 가뭄으로 대지는 흙먼지를 날리고 옥수수 잎은 시들다 못해 바짝 타들어가고 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하다. 밤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제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시종을 불러 뭔가를 지시한다.
다음날 아침, 온 몸에 파란 칠을 한 벌거벗은 청년이 건장한 무사들에 둘러싸여 역시 파란 칠이 돼 있는 제단 앞에 등장한다. 뭔가를 단단히 각오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있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두 눈에는 불안함이 역력하다. 사발 안에 담긴 반죽에 불을 놓자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향내가 진동한다. 제사장은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무사들은 청년을 제단 위에 등을 댄 자세로 눕힌다.
순간 또 다른 무사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있다. 서서히 청년을 향해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칼을 왼쪽 가슴에 꽂는다. “으아악…!” 그동안 잘 참았던 청년이었지만 피를 뿌리며 펄떡펄떡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보는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혼절해버린다. 제사가 끝나 사람들은 흩어지고 청년의 시신은 제단 옆 거대한 우물 안으로 던져진다. 연기가 사그라진 사발 안에는 파란색 덩어리가 남아있다.
며칠 뒤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가 메마른 땅을 속속들이 적신다.
물의 신 ‘챠크’를 상징하는 마야블루
오늘날 멕시코와 과테말라 일대에서 수년 천 동안 번성하다 15세기 멸망해 매몰된 마야문명. 마야인들은 신에게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미국 위튼대 고고학자인 딘 아놀드 교수는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반도의 마야문명을 연구해왔다. 이곳에 살던 마야인들은 오랜 건기로 가뭄이 극심해지면 인간을 제물로 바쳐 비의 신 ‘챠크’(Chaak)를 불렀다. 제단과 제물에 칠해진 파란색은 챠크를 상징하는 색. 인간들의 정성에 감복한 챠크는 어김없이 비를 내렸다. 즉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1904년 고고학자들은 유카탄반도에 위치한 마야문명의 대유적지인 치첸이차(Chichen Itza)의 거대한 우물, 즉 ‘신성한 세노테’의 바닥에 쌓여있던 퇴적물을 끄집어 올렸다. 두꺼운 진흙층 아래에서 100여구가 넘는 유골과 각종 제사도구가 출토됐다. 이들은 4m이상 쌓여있는 파란 침전물에 뒤섞여있었다.
아놀드 교수는 이때 발굴한 신성한 세노테 유물을 분석해 마야인이 남긴 제사 기록에 나오는 파란색이 바로 마야블루임을 입증했다고 고고학저널 ‘앤티쿼티’(Antiquity) 3월호에 발표했다. ‘마야블루’(Maya Blue)란 하늘을 닮은 마야인의 쪽빛이다. 마야인의 쪽빛은 벽화, 도자기, 조각, 건물 기둥, 코덱스라고 불리는 기록, 의식에 사용된 옷 등 각종 유물에서 볼 수 있다. 언제부터 마야인이 이를 사용했는지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300년에서 500년경으로 추정된다.
마야블루는 천년이 지나도 색이 변치 않는 걸로 유명하다. 게다가 습기는 물론 산화와 부식, 산과 염기에도 강하다. 이처럼 견고한 마야블루를 마야인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놀드 교수는 신성한 세노테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사발 속의 향료 덩어리를 분석해 해답을 내놓았다.
사발 속의 향료물질은 과테말라 향나무의 수액인 코펄. 그런데 굳어있는 코펄 여기저기에 파란색이 얼룩져 있었고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인디고와 팔리고스카이트가 섞여있었다. 마야블루는 팔리고스카이트라는 흰 점토의 결정에 파란 색소인 인디고 분자가 박혀있는 안료로 1960년대 그 조성이 밝혀졌다. 그러나 마야인이 어떻게 마야블루를 만들었는지는 미스터리였다.
아놀드 교수는 “마야인들은 코펄을 나무의 혈액으로 생각해 연기를 피워 신이 들이마시게 했다”며 “이때 코펄과 섞여 있던 인디고와 팔리고스카이트가 가열돼 결합하면서 쪽빛 안료가 탄생했고 이들은 이를 비의 신 챠크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선명한 쪽빛, 넓은 표면적이 핵심
식물에서 추출하는 인디고는 짙은 파란색 색소로 산에 취약하고 부식이 잘 된다. 반면 마야블루는 쪽빛을 띠고 있고 강산인 질산액을 쏟아 부어도 색이 변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하다. 색소와 흰 점토를 섞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변신이 가능했을까. 1990년대 들어서 마야블루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이유가 팔리고스카이트에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와 함께 놀랍게도 마야블루가 나노구조물인 점도 밝혀졌다.
1996년 멕시코대 재료과학자 미구엘 조세-야카만은 전자현미경 등 각종 분석 장치를 동원해 마야블루에서 나노구조를 발견했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인디고 분자는 팔리고스카이트의 결정 내부에 들어 있었다. 팔리고스카이트가 유기염료인 인디고를 감싸 외부의 온도, 습도, 산, 염기로부터 보호하는 형태다.
한편 조세-야카만은 마야블루에서 철, 마그네슘, 티타늄, 망간, 규소 등의 불순물이 나노입자를 이룬다는 점도 발견했다. 이전 연구에서는 이들 불순물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푸른색과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순물이 나노입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금의 경우, 보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황금색을 띠지만 나노수준에서는 크기에 따라 빨간색에서 파란색까지 여러 색을 나타낸다. 또한 나노입자로 된 물질을 자동차에 코팅할 경우 긁힘과 같은 외부 충격에 매우 강해진다. 조세-야카만은 나노입자 크기의 불순물이 마야블루의 푸른색을 더욱 빛나게 해줄 뿐 아니라 오래 유지되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게티보존연구소 키아리 박사팀은 재료과학 저널인 ‘응용물리학A’에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상온에서 인디고는 팔리고스카이트에 스며들지 않는다. 그런데 코펄을 태우는 온도인 100~150℃에서 오랫동안 가열하면 팔리고스카이트가 서서히 파랗게 물든다. 왜 그럴까. 연구자들은 팔리고스카이트 결정의 홈 표면을 덮고 있는 물 분자에 주목했다. 상온에서는 결정과 물 분자가 서로 단단히 결합해 있기 때문에 인디고 분자가 달라붙을 자리가 없었던 것. 그런데 온도가 100℃ 정도 되면 물 분자가 수증기로 날아가 홈이 비게 된다. 이 자리에 인디고 분자가 들어간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팔리고스카이트 결정과 인디고 분자는 서로 단단히 결합해 웬만한 외부자극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한편 팔리고스카이트 결정의 영향으로 인디고 분자의 전자 분포가 바뀌면서 짙은 청색에서 쪽빛으로 빛깔이 바뀌게 된 것. 그러나 결정 표면에만 색소가 붙어있을 경우 마야블루처럼 선명한 색이 나오기 어렵다.
키아리 박사는 “팔리고스카이트 표면을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10~100nm(나노미터, 1nm=${10}^{-9}$m) 크기의 작은 섬유 같은 침상결정이 보인다”며 “그 결과 색소가 결합할 표면적이 크게 늘어나 선명한 쪽빛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고학자와 재료과학자의 노력으로 마야블루의 천년 신비가 마침내 풀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