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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부르는 겨울자나방의 세레나데

초저녁 숲에 가득한 페로몬의 유혹

수컷 겨울자나방은 숲 속에 떠도는 암컷의 페로몬을 감지한다.


▒ 빛을 비추는 각도에 따라 날개의 색이 바뀌는 왕오색나비의 애벌레가 낙엽 밑에 웅크리고 있다. 또 길 한가운데 서서 지나가던 수레를 멈출 정도의 위용을 지닌 사마귀는 알집을 메마른 나뭇가지에 붙였다. 살을 에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의 곤충이 추위를 피해 나무 뒤로 숨는다. 여름 내내 포충망을 들고 곤충을 찾던 사람들도 탐색을 멈춘다. 곤충이 모두 겨울잠을 자거나 낙엽 뒤에 숨었다고 막연하게 추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겨울이나 초봄의 밤에 두 눈으로 직접 낙엽 위 곤충의 사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입춘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3월의 초저녁은 겨울자나방을 찾기에 안성맞춤이다. 겨울자나방은 성냥꼭지를 3개 정도 모은 크기의 작은 곤충이다. 겨울밤에 사랑을 연주하는 키작은 ‘구애자’를 관찰하려면 5시간 이상을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부스럭 소리도 내서는 안된다. 다리에 쥐가 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릴 정도의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곤충의 세레나데를 만끽할 수 있다.
 

암수 겨울자나방이 짝짓기를 하고 있다. 나뭇잎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모습이 경이롭다. 날개가 없는 쪽이 암컷이고 날개가 달린 쪽이 수컷이다.


날개 잃은 암컷의 ‘숨은 무기’

국내에 서식하는 자나방은 600여 종이다. 자나방의 애벌레는 독특하게 몸의 6번째와 10번째 마디에 배다리가 있다. 이를 이용해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자(尺)로 재는 것처럼 보여 ‘자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겨울에 발생 과정을 거쳐 나방이 되는 종을 겨울자나방이라 부른다.

암컷 겨울자나방은 나방이지만 날개가 없다. 앙상한 몸통뿐이다. 날지 못하고 기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주변 환경의 색과 비슷하게 바꾼다. 자신의 몸을 숨기려는 방어 전략이다. 반면 수컷은 더듬이가 쭉 뻗었고 다리도 길다. 특히 두 날개도 정상이다. 날개는 낙엽색으로 표면에 커피색 문양이 새겨 있다.

암컷 겨울자나방은 왜 비행을 포기했을까? 비행(飛行)이란 사랑을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암컷 겨울자나방은 추운 밤에 올빼미나 고양이 같은 천적에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컷을 찾아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소용없어진 날개는 자연히 퇴화했다. 대신 수컷에게 사랑의 행로를 알리는 역할은 전적으로 암컷의 몫으로 남았다.

암컷 자나방은 페로몬으로 수컷을 부른다. 암컷이 이동하는 것보다 수컷이 위험을 감수하고 암컷을 찾아오는 방식이 자손을 퍼뜨리는데 효과적이다. 페로몬은 곤충이 의사소통을 할 때 이용하는 화학 물질로 몸에서 분비된다. 페로몬은 암컷 겨울자나방이 날개를 퇴화시킨 대신 선택한 비책인 셈이다.

마른 낙엽이 즐비한 3월의 숲에 포근한 날이 찾아오면 겨울자나방 암컷이 수컷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낸다. 낙엽 밑에서 ‘외투’도 걸치지 않은 암컷이 바스락거린다. 어둠을 틈타 낮은 나뭇가지에 살금살금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이윽고 바람의 영향이 적은 곳에 다다른 암컷은 꽁무니의 페로몬 샘을 부풀린다. 암컷은 꽁무니를 높이 쳐들고 숲 속 수컷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쉴 새 없이 부챗살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마치 말미잘의 촉수 같다.

암컷이 술 달린 갈퀴 같은 풀무질로 꽁무니를 실룩실룩하면 숲에서 갈색 수컷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는 곧 꽁무니에 맑은 물방울 하나를 매단다. 이것이 냄새 방울, 페로몬이다.

겨울자나방은 냄새방울을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날씨를 잘 이용한다. 눈이나 비가 올 것 같은 날 저녁이 안성맞춤이다. 대기 중 습도가 높으면 페르몬 알갱이와 수증기가 접촉하는 횟수가 많아져 페로몬이 공기 중에 잘 퍼진다.

냄새는 구혼의 메시지다.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숲 여기저기에 ‘나 결혼하고 싶어요’라는 메시지가 퍼진다. 온화해진 날씨에 행여나 오늘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던 수컷들도 ‘초대장’을 받고 마음이 설렌다.
 

암컷 겨울자나방이 나무껍질 위에 알을 낳고 있다. 겨울자나방은 알 표면을 솜털로 덮는다.


해가 진 직후 90분간 연주되는 사랑 노래

겨울자나방이 사는 활엽수 숲에 ‘사랑의 메시지’가 퍼지면 수컷 40~50마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모여든다. 이윽고 수컷 한 마리가 암컷의 근처 나뭇가지에 앉는다. 야행성 곤충은 시력이 약하기 때문에 페로몬의 화학적 자극을 따라갈 뿐 암컷의 위치를 정확하게 시각으로 파악할 순 없다. 수컷은 재빨리 가지를 기어오른다. 페로몬 냄새의 근원지가 어딘지 알았다는 듯이 곧장 돌진할 기세다. 그곳에는 망토도 두르지 않은 뚱뚱한 암컷이 망부석처럼 기다릴 테니까.

이 모습을 본 수컷은 암컷을 발견하자 곧바로 다른 수컷을 경계한다. 남이 볼 새라 자신의 날개망토로 암컷을 감싸 안는다. 이들이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 숲 속을 떠돌던 구혼의 메시지와 경쟁자는 사라진다. 일단 짝짓기를 시작하면 수컷은 암컷이 페로몬을 더 이상 방출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나방은 밤을 좋아한다. 겨울자나방도 야행성이다. 그런데 3월의 밤은 뼈 속까지 시리도록 춥지 않은가. 살을 에는 추위를 곤충들이 좋아할 리 없다.

겨울자나방은 해가 진 직후 90분 동안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한다. 야행성인 나방이 활동하는 시간 중 가장 기온이 높은 시간은 해가 진 직후다. 해가 하루 종일 데워놓은 공기의 열기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레나데 연주를 마친 수컷은 죽음을 맞는다. 이들은 죽음을 맞기 전 비교적 기온이 높은 계곡으로 모여든다. 3월의 계곡에 가득한 겨울자나방 주검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리다. 사랑 메시지, 비행 그리고 짝을 만날 때까지 과정을 한번이라도 지켜본 적이 있다면 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뭇등걸에 누가 볼세라 털로 위장해 놓은 그들의 알무더기를 보자. 추운 밤을 애틋하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울린 그들의 성스러운 결실이다. 그 주변의 어느 나무 틈에는 말라서 쪼그라진 암컷의 시신이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알을 깬 애벌레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삭막한 겨울 숲에서 다음 세레나데를 위해 겨울자나방은 또 나뭇잎을 갉아 먹는다.

겨울자나방은 왜 결혼 시즌을 겨울로 택했을까? 생존은 곧 전략이다. 그들 삶의 경쟁에는 천적도 있고 모진 날씨란 악조건도 있다.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서는 위험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초저녁이면 낮에 활동하던 천적인 새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들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치 않다. 추위라는 악조건을 그들만의 공간으로 만든 겨울자나방의 현명함에 박수를 보낸다.
 

겨울자나방의 짝짓기 과정^암컷 겨울자나방은 꽁무늬에서 노란색 페로몬 액체를 내놓는다(A), 페로몬 냄새를 맡은 수컷이 암컷의 주위로 몰려든다(B). 암컷과 짝짓기에 성공한(C) 수컷은 계곡으로 날아가 최후를 맞이한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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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성기수 생태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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