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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히트곡 '연' 만든 생명과학자 조진원

“안녕하세요. CBS ‘꿈과 음악 사이에’ 조진원입니다. 오늘의 신청곡은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오수정 씨(가명)가 보내오셨습니다. 1982년 6월 4일 조진원, 홍종임의 ‘사랑하는 사람아’를 꼭 틀어달라고 하셨군요. 소중한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사연 함께 적어주셨습니다.”

커다란 LP판이 춤추듯 돌아갔다. “사랑하는 사람아 나의 말 좀 들어 보렴. 두 눈을 꼭 감고 나의 말 좀 들어 보렴~♪”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청취자 수만 명의 가슴에 스민 노래의 선율은 어쩌면 누군가의 입가에 바람처럼 머물고, 눈가에 이슬로 맺혔을지도 모른다.

연세대 생물학과 조진원 교수가 기자에게 오래된 앨범을 보여줬을 때 25년을 훌쩍 뛰어넘은 그의 과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조 교수가 DJ로 활동하던 시절 받은 엽서들을 정리해둔 앨범이었는데, 정성들여 쓴 글자의 잉크 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연세대 과학원 건물과 기타를 든 조 교수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는 연세대 재학시절 음악적 재능을 꽃피웠다.


과학과 음악적 재능 물려준 부모님

“가슴이 답답하거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 척 맨지오니의 ‘Children of Sanchez’를 듣습니다. 무아지경에 빠져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지 아니면 직접 연주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죠. 마음이 동하면 연구실에 있는 기타를 잡고 신나는 록음악을 치며 노래를 불러요. 밖에서 들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흉을 볼지도 모르겠지만….”

인기 DJ 겸 싱어 송 라이터 출신 생물학자라니 조금 낯설다. 하지만 조 교수는 음악과 생물학 중 어느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그의 연구 분야는 음악만큼이나 달콤한 당(sugar). 포도당 같은 탄수화물은 몸 안에서 에너지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생체 분자와 결합해 세포를 보호하거나 세포 사이의 교신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당생물학(Glycobiology)은 인체의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당을 연구하는 분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당뇨병 환자들이 치명적인 합병증에 시달리는 원인을 밝혀 2006년 10월 ‘네이처 셀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암 억제 단백질로 잘 알려진 p53에 당 조각(O-GlcNAc)이 달라붙자 정상 세포가 사멸하며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을 보인 것. 당뇨병 환자의 혈액 속에는 포도당이 많이 존재하는데, 포도당이 세포 속으로 들어오면 O-GlcNAc 형태로 바뀐다. 현재 그는 p53이 당뇨 합병증을 유발하는 정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혹시 생명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였고 교육부 장관을 지낸 부친 조완규 교수 때문이었을까.

“어렸을 때 늘 연구만 하시던 아버지의 단조로운 삶을 목격하며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아버지 덕분에 음악에 빠질 수 있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미국으로 교환교수를 가셨는데, 바로 그때 한국에 남아 조부모님과 지내며 맘껏 음악을 들었거든요(웃음).”

사실 조 교수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로부터 왔다. 조완규 교수는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 단원이었고 외조부는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핏줄은 못 속인다고 조 교수는 아장아장 걷던 시절 폴 앵카의 노래만 나오면 전축을 잡고 춤을 췄다. 중학교 때는 비틀즈의 ‘yesterday’를 기막히게 불러 학교 안에서도 제법 유명세를 탔다.
 

조 교수는 미래의 생명과학자로 자라날 제자들에게 진정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음악도 연처럼 훨훨~!

직접 노래를 만들 결심을 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친구 백경국 씨 때문이었다. 그는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 씨의 아들로 그 당시 이미 노래를 만들어 유명가수에게 주기도 했다. ‘음악 하면 나’라는 자신감이 무너지며 조 교수는 겁 없이 작곡을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연’의 초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조 교수의 음악적 재능은 연세대 생물학과에 진학한 뒤 활짝 꽃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시국이 어수선할 때라 음악하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1학년 때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마음마저 날아라”는 후렴구로 유명한 ‘연’으로 연세대 무악가요제에 참가했다. 아쉽게 입상하지 못했고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교내 밴드 ‘라이너스’가 연으로 동양방송(TBC) 주최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우수상과 작사상을 받으며 조 교수의 음악인생도 연처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조 교수를 라이너스의 멤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딘가에 얽매이길 싫어했던 그는 혼자 음악하길 즐겼고 라이너스에 보컬로 참여하는 대신 자신의 곡을 줬다.

산울림의 김창완 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스크립터로 일하던 무렵,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1979년 말 TBC FM에서는 ‘사랑의 듀엣쇼’라는 대회를 개최한 뒤 입상작을 모아 앨범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록할 곡이 모자라자 조 교수에게 노래를 부탁했고 얼떨결에 그는 ‘사랑하는 사람아’란 노래를 만들었다.

가수 홍종임 씨와 함께 부른 이 곡은 맑은 기타 소리와 남녀보컬의 화음이 잘 어우러진 노래로 당시 여대생이 뽑은 최고의 가요로 선정됐다. 1980년대 초반 조 교수는 CBS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활약하며 엄청난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곧 혼란에 빠졌다. 생물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여전히 노래를 만들었지만 음악을 계속해야할지, 아니면 공부를 할지 선택해야 했다.

이때 막역한 사이였던 김창완 씨가 ‘음악 그만 두고 공부하라’는 충고를 건넸다. 생물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조 교수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로 유학을 떠났다. 당생물학을 처음 접하고 앞으로의 연구 분야로 점찍은 것도 이때였다.
 

액체크로마토그래피로 단백질 시료를 분리해 질량을 분석하는 장비는 기타와 마찬가지로 그의 연구를 도와주는 든든한 친구다.


언제나 곁에 있는 편안한 친구

조 교수와 음악과의 인연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서도 이어졌다.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얼굴이 알려지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사실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 짐을 꾸릴 때 기타를 슬그머니 뺐다. 하지만 박사후연구원이 된 뒤 생활이 안정되자 다시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간다고 조 교수는 학교 근처 악기점에서 1000달러 정도 주고 중고기타를 구입했다. 윤기가 흐르는 밤색 빛깔의 이 기타는 지금도 조 교수의 연구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 음악은 생각날 때마다 편하게 찾아가는 친구다. 외로울 때나 잠시 복잡한 생각을 잊고 싶을 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특히 유학을 마치고 연세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한 1996년, 조 교수는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연구 분야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성과만 강요받던 시절, 그는 거의 매일 음악과 함께 했다. 밤에는 동료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음악으로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조 교수는 O-GlcNAc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관련 논문을 읽으며 느낌이 왔다지만 그 당시 세계적으로도 연구 성과가 드물 정도로 낯선 분야였다. 그러나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음악이 직업이 됐다면 지금처럼 즐길 수 없었을 거예요. 음악을 하면서 생물학을 연구하기는 어렵지만 생물학 교수가 된 뒤 음악을 할 수는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취미를 얻은 셈이죠.”

‘흘러갈 때는 내가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비로소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는 이문열 ‘삼국지’의 한 구절처럼 음악은 그에게 잠시 연구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는 나무 그늘과도 같다. 과학적 발견을 이끄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바로 이 여유에서 나온다.

“제 몸에서는 뜨거운 생물학자의 피가 흐르고 있나봅니다. 다시 한 번 생물학과 음악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고 해도 공부를 할 겁니다. 그리고 음악도 함께 해야죠. 저는 욕심쟁이거든요(웃음). 내년이면 ‘연’과 ‘사랑하는 사람아’를 발표한지 30년이 됩니다. 미발표곡까지 모아 기념음반을 제작하고 공연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벌써 30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죠? 그래도 마음은 아직 청춘입니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MUSIC IS MY LIFE~!

 

연세대‘노래짱’인 조 교수가 제자들과 교정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1. 공부 잘 하는 학생보다 노래 잘 하는 학생을 좋아하나?
‘프레시맨 세미나’라는 신입생 교양강좌에서 ‘대중음악과 함께 하는 대학생활’이란 강의를 하고 있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노래방 가는 일이 수업이고, 작곡도 가르친다. 사실 마이크만 제대로 잡아도 노래 잘 한다는 소릴 들을 수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이 없기에 노래 잘 하는 친구들을 좋아할 수밖에.

2. 노래 실력을 겨루기 위한 ‘결투’도 마다않는다고 하던데?
1996년 연세대에 부임하자마자 정치외교학과 김기정 교수가 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연세대 최고의 보컬로 유명했는데, 나와 노래 실력을 겨루고 싶어 했다. 결국 우린 만나 노래를 불렀고 지금은 손잡고 함께 노래방 가는 사이가 됐다. 결투의 결과는 김 교수를 생각해 비밀로…(웃음).

3. 가장 좋아하는 미발표곡을 소개해 달라. 혹시 자신의 노래를 주고 싶은 가수가 있다면?
미발표곡 가운데 친구의 죽음을 떠올리며 만든 ‘그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을 지난해 라이너스의 보컬 최광수 씨가 죽었을 때 연주했는데, 눈물이 가슴에 고였다.

요즘 가수는 잘 모르지만 최근 신화의 앤디에게 전화가 왔다. 26년 전 내가 만든 ‘얼굴 빨개졌다네’를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후배가수가 부르는 내 노래가 어떨지 궁금하다(실제로 1월 중순 발매된 앤디의 솔로앨범에 ‘얼굴 빨개졌다네’가 실렸다. 이 곡은 조진원 교수가 대학원 재학 시절 만든 곡으로 그룹 ‘휘버스’의 이명훈 씨가 불러 1982년 KBS와 MBC에서 10대 가수상과 신인상을 받았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23년 만에 부른 ‘사랑하는 사람아’


1970~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즉 7080 세대를 위한 ‘추억의 빅콘서트’가 2004년 봄 열렸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캠퍼스밴드들이 총출동한 무대였는데, 수원 야외음악당 공연 때 내가 작곡한 노래 4곡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공연 10분 전 대기실에 들려 라이너스 멤버들을 만났다. ‘연’을 작곡하긴 했지만 그 노래를 세상에 알린 것은 라이너스지 내가 아니었다. 간단히 안부만 전하고 나오려다가 라이너스가 연을 부를 때 뒤에서 코러스를 돕기로 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자 보컬 최광수 씨가 갑자기 나를 무대로 불러 소개했고, 라이너스와 나는 내가 만든 곡인 ‘우리들의 축제’를 함께 불렀다. 연습이나 예고 없이 이뤄진 갑작스러운 공연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 가슴 속의 응어리들이 모두 풀리는 듯 했다. 뜨거운 앙코르를 받고 23년 만에 ‘사랑하는 사람아’를 불렀는데,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따라 부르던 관객들 사이로 열심히 가족의 얼굴을 찾던 기억도 난다. 아빠가 무대에 선 모습을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봤지? 아직도 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동안 ‘작곡가 조진원’이라는 타이틀이 쑥스럽고 또 너무 오래 전 얘기인 것 같아 의식적으로 숨기려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밴드 경험도 없고 대학가요제 출신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날 동시대에 음악을 하고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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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신방실 기자
  • 사진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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