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글쓰기를 잘하려면 기승전결을 버려라|강호정 지음|도서출판 이음|236쪽|1만2000원
PROLOGUE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정말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원고지 10매 분량의 글쓰기 숙제 때문에 끙끙거렸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글쓰기와 관계없을 것 같은 과학자가 되겠다고 일찌감치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내가 과학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학을 위해 영국에 가고 나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어렸을 때는 원고지의 빨간 네모칸이 공포스러웠고 자라서는 워드프로세서의 깜빡거리는 커서가 원망스러웠다.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안 잡혀 멀뚱히 화면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특히 이공계 학생이나 과학자에게 글쓰기는 실험실에서 밤새 연구하는 일보다 더 고역일지 모른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잘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으며 이공계를 위한 글쓰기 책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무조건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식의 글쓰기 요령을 일러주는 책이 대부분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최근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적 글쓰기 노하우를 일러주는 ‘과학 글쓰기를 잘하려면 기승전결을 버려라’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잘나가는 생태과학자이자 과학 글쓰기 ‘전도사’인 저자는 국어시간에 배운 ‘기승전결’의 함정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논리성을 중시하는 과학 글쓰기에서 기승전결 구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무조건 쉽게 써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글 읽는 대상을 분석해 형식이나 어휘, 표현을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로그에서 보듯 저자도 글쓰기를 두려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 국제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거절당하며 글쓰기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그는 우연히 ‘Scientific Writing’(과학 글쓰기)라는 교양강좌를 듣게 됐다. 단 몇 주간의 수업에서 그동안 품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두 날려버릴 만한 충격을 받았다. 그 뒤 과학 글쓰기란 정해진 원칙에 따라 연습하면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 글쓰기의 원칙을 정리한 일종의 매뉴얼이다.
이 책에는 실험보고서, 학위논문, 학술지 논문, 연구계획서처럼 목적이나 대상에 따라 글쓰기 방법을 어떻게 달리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정리돼있다. 특히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세계적인 과학저널에 논문을 발표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학술지에 투고할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을 꼼꼼히 알려준다. 논문초록 잘 쓰는 법, 학술대회에서 성공적으로 발표하는 법처럼 실용적인 ‘테크닉’도 실려 있다.
논문표절이나 자료조작 시비가 빈번한 요즘 과학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을 잃지 않는 일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선배 과학자로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따끔한 지침서 역할도 하는 셈이다. 글쓰기가 두려운 이공계 학생이라면 이 책을 교과서 삼아 기본 원칙부터 충실하게 다져보는 건 어떨까.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 탄탄한 논리로 무장한 자신의 글에 흡족해할 날이 곧 올 것이다.
강호정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웨일스대에서 습지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과학자에게 연구능력 못지않게 글쓰기 능력이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과학작문 특강’ ‘영어논문작성법 특강’등 활발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