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뒤 창덕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벚꽃나무를 잔뜩 심었다. 조선왕조가 27대 519년만에 멸망하자 비운의 임금 순종은 오락장으로 변한 창덕궁에 머물며 하릴없이 동물원을 오갔다. 일본이 수탈해간 것은 비단 쌀과 광물자원뿐이 아니었다. 이들은 조선을 누비던 동물을 채집해 표본으로 제작했다. 표본 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부는 창덕궁 동물원의 표본관에 전시됐다. 일제는 순종을 ‘이왕’(李王)이라고 낮춰 불렀기에 표본관의 이름도 ‘이왕직박물관’ 또는 ‘이왕가박물관’이라고 붙였다.
1984년 필자는 국립과학관으로부터 흥미로운 요청을 받았다. 이왕직박물관의 표본을 국립과학관으로 이관하는 작업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70년 넘게 일제가 모아둔 동물표본에 대한 궁금증으로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다 드디어 3월 24일 이왕직박물관에 첫발을 내딛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오래된 목조건물 안에 있던 표본들은 겹겹이 쌓인 먼지 속에서도 거의 변질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지로 만든 질긴 라벨에 채집한 시기와 장소를 꼼꼼히 기록해둔 점도 놀라웠다. 박물관에는 포유류, 어류, 파충류 그리고 조류의 박제와 골격표본이 있었다. 여기서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한 세기 전 조선의 하늘을 누볐던 조류이야기를 전한다.
예민한 겨울 신사 뿔호반새
Megaceryle lugubris
학명 : Megaceryle lugubris
분류 : 파랑새목 물총새과
크기 : 몸길이 37.5cm
서식장소 : 하천 상류나 해안
뿔호반새는 너풀거리는 깃털 모자를 쓰고 흰색과 검정색이 점점이 박혀있는 문양의 외투를 입었다. 지리산반달곰처럼 가슴에 브이(V)자 모양의 띠가 있는데, 그 색깔이 수컷은 갈색이고 암컷은 회색이다. 뿔호반새의 사냥법은 물총새나 호반새와 비슷하다. 계곡이나 호수가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물고기를 발견하면 재빨리 뛰어들어 낚아챈다. 잡은 먹이는 나뭇가지 위에서 먹는다. 길고 뾰족한 부리로 딱딱한 게의 껍데기를 부수고 먹기도 한다.
“캬랏캬랏”하며 날카롭게 우는 뿔호반새는 경계심이 무척 강하다. 주로 물가의 언덕이나 흙벽 속에 터널을 파서 둥지를 짓는데, 자신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고 사람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미련 없이 정든 둥지를 떠난다. 이런 예민한 성격 탓에 뿔호반새는 급속한 산업화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됐다. 서식지의 환경이 파헤쳐지고 강과 호수가 농약과 폐수로 오염되자 갈 곳을 잃었다. 과거에는 한반도 전역에 분포했지만 개체수가 점차 줄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왕직박물관에 소장돼있던 표본은 1909년 11월 경기도 광릉, 1910년 1월 서울, 1917년 2월 강원도 춘천에서 채집했다. 현재 뿔호반새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일본, 중국에 텃새로 분포한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산천이 과거처럼 때 묻지 않은 상태로 복원되면 아름다운 뿔호반새가 다시 한반도를 찾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따오기
Nipponia nippon
학명 : Nipponia nippon
분류 : 황새목 저어새과
크기 : 몸길이 약 75cm
서식장소 : 늪이나 냇가 주변 습지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따오기는 동요에 등장할 정도로 과거 우리나라에 흔한 철새였다. 보통 10월 말쯤 찾아와 이듬해 3월 중순까지 머물며 겨울을 보냈다. 원로 조류학자인 원병오 박사가 지은 ‘한국의 조류’에 따르면 1888년 조선을 누비며 조류 채집에 열중한 영국대사관 영사 캠벨은 “따오기 스무 마리 정도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사냥총으로도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회고했다. 이미 이때부터 따오기의 수난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따오기는 1980년 이후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췄고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따오기는 여름과 겨울에 각기 다른 옷을 입는다. 여름에는 목과 등의 깃털이 탁한 흑색을 띠고 겨울에는 순백색이나 옅은 분홍색을 띤다.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4~5월쯤 2~3개의 알을 낳는데, 한 달 뒤 새끼가 태어나면 암컷과 수컷 따오기가 함께 개구리나 물고기 같은 먹이를 토해 먹이며 정성껏 키운다.
과거 일본에서 따오기는 최북단의 홋카이도부터 최남단인 오키나와까지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정도로 흔한 새였다. 그러나 산림이 파괴되면서 따오기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1980년 멸종했다. 하지만 일본은 따오기 인공증식사업을 진행해 수십 개체를 환생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10월 경남 창원에서 열리는 람사협약 (국제습지조약) 당사국 총회를 앞두고 ‘우포늪따오기복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동물표본관의 박제로만 남은 따오기가 다시 살아나 ‘따옥따옥’ 우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 하지만 환생한 따오기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서식지를 마련하기 전에는 진정한 복원의 의미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 잘 따르는 애교쟁이 염주비둘기
Streptopelia decaocto
학명 : Streptopelia decaocto
분류 : 비둘기목 비둘기과
크기 : 몸길이 약 33cm
서식장소 : 마을 주변 숲
1968년 12월 이화여대 의예과 동물학교실 재직시절 부산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중앙동의 허름한 뒷골목을 지나는데, 포장마차에 참새와 개똥지빠귀, 딱따구리, 황여새가 새끼줄에 묶인 채 매달려있었다. 이 가운데 꼬리 빠진 염주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났는지 주인에게 묻자 경남 기장군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염주비둘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표본으로라도 제작해둘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염주비둘기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목도리비둘기(Streptopelia risoria)와 다른 종인데도 겉모습이 비슷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몸길이가 30cm 정도로 크고 잿빛이 도는 갈색이며 목 뒷면에 좁은 검정색 띠가 있다. 눈과 다리는 붉은색이다. 지상에서 2~3m 높이의 나뭇가지에 둥지를 짓고 메추리알 크기의 흰색 알을 낳는다.
좋아하는 먹이는 식물의 씨앗이나 열매, 곡물이다. 민가 근처에 사는 염주비둘기는 사람이 준 과자 부스러기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염주비둘기는 영국, 인도, 중국 등 유라시아대륙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서식한다. 그러나 한반도 전국에 분포하던 염주비둘기는 그 수가 차츰 줄어 현재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성질이 온순하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염주비둘기의 천성은 멸종을 불러왔다. 특히 둥지를 낮은 곳에 만들기 때문에 악동들의 새총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왕직박물관의 염주비둘기 표본에는 1910년 2월 서울과 1916년 2월, 1917년 5월과 6월 황해도에서 각각 채집했다고 적혀있다. 그 뒤 한 미국의 아마추어 조류학자가 1947년부터 20년간 한국에 머물며 수집한 4000여점의 박제표본 명단에도 염주비둘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끼악끼악” 경쾌한 울음소리 크낙새
Dryocopus javensis
학명 : Dryocopus javensis
분류 : 딱따구리목 딱다구리과
크기 : 몸길이 약 46cm
서식장소 : 고목이 우거진 혼합림
크낙새의 뒷머리는 진홍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흰색인 배 부분을 빼면 대부분 윤기 있는 검정색 깃털로 덮여있다. 잣나무나 참나무, 소나무, 밤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살며 나무구멍에 마른 진흙과 나뭇가지로 둥지를 짓는다. 분포지역은 일본의 대마도와 우리나라뿐이었는데, 전세계적으로 크낙새가 생존해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1886년 폴란드인 칼리노우스키가 서울과 개성에서 여러 마리를 채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한국산 표본은 미국 뉴욕자연사박물관, 워싱턴국립자연사박물관, 하버드대 비교동물학박물관으로 반출됐다. 이왕직박물관의 크낙새 표본은 1909년 6월과 1914년 2월 서울, 1909년 6월 수원, 1912년 10월 양평에서 각각 채집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모두 일본으로 반출된 뒤라 이관작업을 하면서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크낙새의 주된 서식지는 경기도 광릉이었다. 1974년 7월 필자는 광릉 내 수령 100년 된 참나무고목에서 크낙새 둥지를 발견했다. 1979년 5월에는 고사한 소나무의 나무구멍에 둥지를 튼 크낙새가족을 약 40일 동안 조사했다. 그 결과 크낙새가 흰색 알 서너 개를 낳아 2주일간 품으며 특이하게도 수컷이 알을 품는 시간이 다른 새보다 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끼가 태어나면 소나무좀이나 딱정벌레의 애벌레, 개미 알을 먹여 키운다. 당시 소형녹음기를 켠 채 “끼악끼악” 하는 크낙새의 울음소리와 둔탁하게 나무를 두들기던 소리를 녹음하던 일은 모두 추억이 됐다.
원래 개체수가 많지 않았던 크낙새는 좁은 지역 에서 근친번식을 하다 건강한 자손을 낳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살충제나 농약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고 먹이인 곤충이 줄어 멸종 위기에 처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크낙새 표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이다. 과거 창덕궁 동물원에서도 1943년에 사육한 적 있다고 전한다.
목각표본으로 남은 비운의 원앙사촌
Pseudotadorna cristata
학명 : Pseudotadorna cristata
분류 : 기러기목 오리과
크기 : 몸길이 약 64cm
서식장소 : 해안이나 호수, 저수지
원앙사촌은 지구상에 단 3점의 표본만 남아있는 진귀한 물오리다. 주로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연해주에 분포했는데, 생태나 번식지, 이동방법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87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채집한 표본은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나머지 표본은 1916년 우리나라 금강과 낙동강에서 채집했으나 애석하게도 일본 조류연구소로 넘어갔다.
일본의 조류학자인 나가미치 구로다 박사가 조선 땅의 원앙사촌을 먼저 발견해 국제학회에 보고한 탓에 영어로는 ‘구로다 쉘덕’(Kuroda shelduck)이라고 부른다. 표본을 단서로 원앙사촌의 ‘외모’를 추론해보면 부리 길이 4.15cm, 부리에서 꼬리까지의 몸길이는 64cm이며 다른 오리보다 다리가 약간 길다. 수컷은 머리꼭대기에 긴 댕기를 드리우고 있다. 윗가슴은 짙은 녹색, 나머지 부분은 회색, 항문부분은 오렌지색이다. 암컷의 몸은 전체적으로 갈색을 띠고 눈 주변은 흰색이다. 물오리는 원래 담수 또는 해수에 살지만 원앙사촌의 경우 양쪽 모두에서 서식했다고 추측한다. 한반도에는 겨울에 찾아온 철새였다.
1984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원앙사촌을 직접 봤거나 누가 채집했는지 제보하는 사람에게 각각 500달러를 주겠다는 전단을 서독 조류연구소가 전세계 조류학자에게 뿌리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일본에는 원앙사촌을 그린 오래된 화조도가 남아있는데, 그림제목이 모두 ‘조선원앙’이라고 쓰여있는 점에서 원앙사촌을 한국에서 무분별하게 채집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새인 원앙사촌이지만 박제조차 없이 목각표본만 덩그러니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있어 아쉬움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