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분야만 생각하면 내년 여름 시즌에 해수욕장을 열 수 있을 만큼 복원에 진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생태계 복원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유럽공동체 및 유엔(EC/UN) 공동지원단 블라디미르 사하로프 단장, 12월 16일 태안 기름유출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It is no use crying over spilt milk.
(엎질러진 우유를 보고 울어봐야 소용이 없다.)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와 대형 해상 크레인선이 충돌해 원유 1만2547㎘가 유출된 사고가 일어난 지 5일째 되는 12월 11일, 태안 만리포 해수욕장을 가리키는 표지를 따라 핸들을 꺾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래 동안 잊고 있었던 중학교 때 배운 영어속담이 떠올랐다.
물자가 모자라 취재 끝나면 반납하라며 어렵게 내준 장화를 신고 모래사장을 지나 기름덩어리가 밀려오는 바닷가에 섰다. 신기루처럼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크레인과 유조선이 기름유출의 진원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장화는 파도에 밀려온 기름으로 검게 번들거렸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로 이어지는 태안반도의 백미(白眉)가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사람만이 희망이다
“관광 분야만 생각하면 내년 여름 시즌에 해수욕장을 열 수 있을 만큼 복원에 진전이 있을 겁니다.”
12월 16일 해양오염 방제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태안군을 찾은 유럽공동체 및 유엔(EC/UN) 공동지원단 블라디미르 사하로프 단장은 현장을 둘러보고 희망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특히 정부와 지역주민, 자원봉사자들이 하나가 돼 혼신을 다해 대처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파도에 밀려오는 기름덩어리를 바가지에 담고 양동이에 모아 나르는 ‘원시적’인 방제작업이 ‘티끌모아 태산’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특히 유(油)흡착제가 부족하다는 얘기에 헌옷가지까지 챙겨 현장을 찾은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12월 14일 태안을 찾은 미국 해안경비대 해양대기청 소속 연구원인 에드 레빈 씨도 “사고 발생 1주일 만에 해변을 이 정도로 깨끗하게 만든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하지만 바위를 덮은 기름을 닦아내는 일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한편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지형이나 발길이 뜸한 섬에 밀려온 기름은 오랜 흔적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1989년 미국 알래스카 해변을 오염시킨 엑손 발데즈 유조선 침몰사고 현장에서 일한 레빈 씨는 “알래스카에는 아직도 외진 곳의 바위에 기름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군과 전문 방제업체 인력을 투입해 이런 지역에 대한 방제를 진행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413호인 신두리 사구(모래언덕)와 희귀식물의 보고인 천리포수목원, 아시아 최대의 철새도래지인 천수만 일대에 대한 보호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신두리 해수욕장 주위로 고온, 고압으로 물을 내뿜어 바위나 모래에 엉겨 붙어 있는 기름을 없애는 고압세척기가 42대 배치됐다. 그러나 뜨거운 물을 뿌려대는 고압세척은 부작용이 크다는 우려가 높다. 기름을 생분해할 수 있는 플랑크톤이나 미생물이 죽기 때문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셈이다.
미생물, 보이지 않는 자원봉사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틈새에 껴 있는 기름이나 모래속의 기름을 없애는 것은 태양과 미생물의 몫이다. 햇빛 속의 자외선은 기름성분이 분해되는 데 촉매역할을 한다. 이를 광(光)분해라 한다. 따라서 바위나 모래에 묻어있는 기름은 서서히 분해되면서 휘발돼 날아가거나 주변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모래나 개펄에 침투한 기름이나 바다에 퍼져있는 기름을 궁극적으로 제거하는 몫은 미생물이 맡는다. 짠 바닷물에 미생물이 얼마나 살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양분이 풍부한 서해안의 경우 바닷물 1㎖에 100만 마리 이상이 살고 동해 독도 부근에서도 10만 마리가 넘는다. 한국해양연구원(이하 해양연) 권개경 연구원은 “자연계 미생물은 다양한 능력이 있다”며 “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면 그만큼 빨리 기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휘발성분이 날아간 원유는 크게 두 가지 성분으로 나뉜다. 고분자 지방족 탄화수소와 고분자 방향족 탄화수소가 그것. 지방족 탄화수소는 세포막을 이루는 성분과도 비슷해 비교적 쉽게 분해가 되고 이를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의 종류도 많다. 문제는 벌집처럼 생긴 안정된 분자인 방향족 탄화수소. 권 연구원은 “방향족 탄화수소는 반응성이 낮아 상대적으로 분해하기가 어려운 편”이라며 “미코박테리움과 스핑고모나스 등 방향족 탄화수소를 분해할 수 있는 박테리아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미생물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는 온도와 산소다. 기름성분을 분해해 섭취할 수 있는 분자로 바꾸는 것은 결국 생체촉매인 효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소의 활성은 온도가 10℃ 올라갈 때마다 2배 커진다. 권 연구원은 “미생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주변 온도가 20℃ 밑으로 내려가면 효소의 활성이 낮아져 기름을 분해하는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로 기록된 1989년 엑손 발데즈호 기름유출로 알래스카 연안이 오염된 이후 회복이 더뎠던 까닭도 추운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생물이 기름을 분해할 때는 산소가 필요하다. 따라서 산소가 원활히 공급될수록 분해속도도 빠르다. 결국 내년 여름을 나면서 강한 햇볕에 노출되고 폭풍과 태풍을 겪어야 기름찌꺼기가 없어질 전망이다.
유흡착제로 회수하고 유처리제로 분산시켜
유흡착제는 합성수지인 폴리프로필렌(PP) 재질의 얇게 뽑은 섬유를 ‘니들 펀칭’이란 기법으로 만든 일종의 압축솜이다. 따라서 확대해 보면 섬유가 복잡하게 엉켜 있어 표면적이 매우 넓다. PP는 기름과 친하고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기름이 떠다니는 바다위에 던지면 기름만 빨아들인다. 뜰채로 기름을 거둬들이는 방법과 함께 노동력은 많이 들지만 친환경적인 방제법이다.
반면 유처리제는 물과 기름이 섞이게 해주는, 즉 유화를 일으키게 도와주는 용액이다. 유화(乳化, emulsion)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이 유화제의 도움으로 섞여 우유나 크림처럼 불투명하게 되는 과정이다. 유처리제의 주성분이 바로 유화제다. 유화 상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미세한 기름방울이 물 사이에 분산돼 있거나 반대로 물방울이 기름에 분산돼 있다.
어민들이나 환경단체가 유처리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1995년 여수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의 기억 때문이다. 당시 유출된 기름으로 인한 바다 오염을 방제하기 위해 페인트 원료로 쓰이는 독성이 강한 유화제로 만든 유처리제를 대량으로 썼기 때문에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것. 그 뒤 법적 요건이 강화되면서 독성이 큰 유화제는 쓸 수가 없게 됐다. 다만 유화된 미세한 기름방울은 생물체에 쉽게 침투할 수 있기 때문에 해변이나 호수같이 잘 희석되지 않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해양경찰청 이봉길 해양오염관리국장은 “유처리제는 유출된 기름을 분산시키고 재응집을 막아 덩어리 상태의 기름에 비해 분해와 증발이 빨리 이뤄지도록 하므로 방제에 매우 효과적”이라며 “먼 바다에서 부유중인 기름에 한해 사용했고 해안 가까이에서는 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EC/UN 공동지원단 사하로프 단장은 “전문가에 따라 견해가 다르지만 한국의 경우 유처리제가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적절이 사용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출된 기름 회수엔 한계
12월 19일 현재 수거된 기름은 3281㎘로 해상에서 1815㎘, 해변에서 1466㎘를 거둬들였다. 흡착폐기물을 포함하면 유출량의 3분의 1정도로 해상기름유출사고로서는 회수율이 높은 편이다. 대부분의 해상사고는 악천후로 발생하기 때문에 초기에 기름이 넓게 퍼지는데 반해 이번 사고는 선박충돌로 인한 기름유출이라 기름확산 정도가 덜 했기 때문이다. 사고지점에서 가까운 태안반도 해변 40km에 기름이 밀려들었다.
지난 1989년 엑손 발데즈호 사고로 흘러나온 기름은 이번 사건의 3배가 넘는 4만1000㎘이었는데 기름이 덮친 해안이 1800km에 이르렀다. 미국 해상경비대의 전방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수된 양은 14%에 그쳤다. 미국해양대기국(NOAA)이 사고가 일어난 지 3년 뒤인 1992년에 벌인 현장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출된 기름의 13%가 해저로 가라앉았고 2%는 여전히 해안에 남아있었다. 다행히 70%가 생분해되거나 광분해 돼 사라졌지만 1% 정도는 여전히 바닷물에 퍼져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눈에 보이는 피해는 조만간 사라진 듯 보이겠지만 생태계가 받은 충격은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특히 갯벌과 연안에 침투한 기름이 완전히 제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태안 지역에서 국제 전문가들의 활동을 돕고 있는 해양연 강성길 연구원은 “선진국들은 많은 해양오염사고를 경험하면서 생태계 복원에 대한 노하우도 축적했다”며 “이들이 내놓을 조사보고서는 한국의 방제 당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재가 자연에 낸 상처가 빨리 아물 수 있도록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겨울 바다에 밀려온 검은 재앙 태안 원유 유출 사고
PART 1 태안의 기억을 채집하다
PART 2 유출 원유 3분의1 회수한 태안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