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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뜨는 멀티즌 지는 네티즌

당당히 얼굴 드러내고 사이버 공간 활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티즌하면 가장 신세대고, 첨단을 달리는 젊은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구세대가 되고 있다. 2001년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멀티즌 때문. 최첨단으로 무장한 멀티즌의 세계를 따라가보자.

컴퓨터를 앞에 두고 말없이 키보드만 두드리던 ‘침묵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 요즘 PC방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는 청소년들, 그리고 컴퓨터 화면과 대화하듯 중얼거리며 깔깔 웃는 표정의 젊은이들로 넘친다.

멀티미디어 통신기술은 온라인상에서도 감(感)을 느끼게 해준다. 문자가 전해주던 적막감에서 벗어나 신체 접촉은 없지만 친구와 만나서 웃고 즐기는 오프라인의 현실을 고스란히 전한다.

1990년대 PC통신족과 네티즌에 이어 2001년 멀티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디지털 선배인 PC통신족과 네티즌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지내온 반면, 멀티즌은 당당히 얼굴을 내놓고 사이버공간을 활보한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 적극적이다.

디지털 문화의 선두주자 네티즌

1997년의 한 모습. 집에 돌아오면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는 대학생 ‘마타’. 마타는 여성주의 동호회의 시솝이었고, 얼마 후에는 한 인터넷사이트의 웹마스터를 맡았다. 이즈음 마타는 ‘난다’로 아이디를 바꿨다. 난다는 딸기, 묘루, 완두, 야옹 등의 친구가 있다. 왠지 모두 만화주인공 같아보이는데 그럴까. 아니다. 각자의 아이디는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짓듯이 신중하게 생각하며 만든 ‘사이버 정체성’이다. 사이버 공간의 ‘또 다른 나’인 셈이다.

그들의 무기는 키보드와 문자다. 그들은 온라인 상에서 키보드로 문자를 두드리며 유머를 즐기고, 영화와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채팅으로 수다를 떨었다. 수많은 현실세계의 모습과는 다른 익명의 아이디들이 ‘글’로 온라인 공간에서 이들과 만났다.

디지털 기술은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서의 새로운 시민 ‘네티즌’들을 탄생시켰다. 문자, 익명성, 유선이라는 특징과 함께.

멀티미디어로 최신 춤을 배우는 멀티즌

2001년. " 저요? 네티즌이라기보다는 멀티즌이죠." 인터넷방송회사 캐스트서비스에서 일하는 정은아(26)에게 사이버세상은 익명의 공간이 아니다. 네티즌인 어느 여성학자가 1990년대 초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비트(bit)와 바이트(byte)일 뿐”이라고 말했다지만, 요즘 세상의 비트와 바이트는 문자와 아이디보다 많은 것을 포함한다.

은아는 미국 새너제이에 있는 지사와 매일 화상회의를 한다. 평소에도 화상을 이용하는데 채팅이 미팅으로 이어질 때 ‘폭탄’을 만날 염려가 없어 좋다. 영화 ‘접속’에서처럼 ‘해피엔드’와 ‘여인2’라는 아이디가 한석규와 전도연같은 멋진 남녀라는 보장이 어디있단 말인가.

취미생활도 멀티미디어다. 가끔씩 스트레스를 풀러 강남의 J나이트클럽에 갈때면 멀티미디어로 ‘화려한 외출’을 준비한다. 인터넷방송의 나이트클럽 생중계를 보면서 최신유행을 따라잡고, 다음날엔 스테이지 위에서 ‘화려하고 멋진 은아’를 확인하러 자신의 모습을 중계하는 사이트를 찾는다.

은아는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켤 필요가 별로 없다. 팜탑컴퓨터와 개인정보단말기(PDA)를 항상 ‘데리고 다니기’ 때문. 인터넷으로 산 팜탑컴퓨터는 데스크톱을 완벽하게 보완해준다. 외근때나 출장때 E메일 확인은 물론 PC와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어 편하다.

디지털 기술의 한단계 발달은 2001년 ‘멀티즌’을 낳았다. 음성과 동영상, 공개되는 비익명성, 그리고 종종 무선이라는 특징과 함께.

참여와 익명성에서 출발

인터넷을 뜻하는 ‘넷’과 시민을 뜻하는 ‘시티즌’이 합쳐진 용어 네티즌은 1993년 미국 대학생 마이클 하우벤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넷과 네티즌'이라는 논문을 올리면서 쓰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 외에도 네티즌이라는 용어에는 현실세계의 모습, 즉 정체성과는 다르다는 ‘익명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서 피해를 볼 염려가 없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참여도 높고, 확산 속도가 빨라서 익명성이 현실의 문제를 구석구석 파헤치는 참여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네티즌은 대안정치의 가능성으로 사회적 기대를 받았다.

지난해 5월 남편 J씨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폭행을 당한 아내 K씨의 사연이 한 여성단체를 통해 사이버 공간에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행동’했다. 오프라인에서는 남의 집안일에 눈감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공론화가 되지 않던 이 사건이 온라인에서 사회여론화 되는데는 3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 서명장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통신기술의 편리성과 할말을 눈치보지 않고 속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익명성의 결과였다. 사이버 공간에는 가정폭력에 대한 네티즌의 글이 이어졌고, J씨는 법정최고형을 언도받았다.

지난해 7월 남대문경찰서에서 자신이 잘못하고도 난동을 부린 모방송사 기자의 어이없는 행태도 이런 네티즌의 특성으로 드러난 경우다. 억눌려 있던 말단경찰 네티즌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경찰청과 해당방송사 홈페이지에 의견을 개진했다.

또 이러한 익명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아이디로는 남녀·계층·학력 구분이 없다. 이런 점에서 사이버 공간은 차별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적인 세계가 되리라는 전망이 여성·인권·노동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일기도 했다.

한편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익명성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례에 대한 반성도 생겨났다. 책임지지 않는 가벼운 말들,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여론, 또 이러한 특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들이 만연했던 것.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오보의 바다이기도 했다.
 

노트북, PDA, 디지털 카메라, 스마트폰 등 첨단 멀티미디어 기기로 무장한 멀티즌.


초고속 인터넷이 큰 역할

통신기술이 한단계 발달하면서 익명의 네티즌에 변화가 생겨났다. 멀티즌이 등장한 것이다. 멀티즌은 ‘멀티미디어’와 ‘시민’의 합성어. 문자나 정지화상을 이용하는 기존 네티즌과는 달리 문자, 음성, 동영상 등이 복합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동시에 활용하는 사용자다. PC카메라로 화상채팅을 하고, 자신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메일을 보내는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낸다.

멀티즌은 대용량 정보교류가 가능한 초고속인터넷 때문에 가능해졌다. 인터넷에서 음성과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스트리밍 기술의 발전도 멀티즌의 등장에 큰 몫을 했다. 스트리밍 기술은 파일을 내려받기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동작을 시키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주고받을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새로운 정보기기를 다루는데도 어려움이나 거부감이 없는 신세대의 특성이 멀티미디어 정보기기의 발달과 결합한 산물이다.

사생활까지 공개한다

멀티미디어로 자신을 드러낸 예는 199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여대생 제니퍼는 ‘제니퍼캠’(www.jennicam.com)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했다. 기숙사 방에 PC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신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웹캠 서비스를 했던 것. 본인의 의지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영화 트루먼쇼와는 다르다. 영화에서 트루먼은 꿈에도 모른채 자신의 사생활을 보여줬다.

이후 미국 CBS방송의 생존자게임, 네덜란드의 빅브라더쇼, 미국 CBS의 빅브라더쇼 등 사생활 중계 게임이나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한국통신 주최의 ‘트웬티아이즈쇼’와 드림라인 등이 주최한 ‘5천만의 선택! 최후의 생존자’와 같은 리얼리티쇼가 열렸다. 게임 참가자들의 생활을 웹카메라에 담아 인터넷에서 생중계했다.

네티즌이 ‘또하나의 자아’로 자신을 표현했다면, 멀티즌은 사이버 공간에 현실의 자신을 그대로 갖고 들어간다. 물론 멀티즌이 된다고 네티즌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멀티즌이 사용하는 멀티미디어에는 문자미디어도 당연히 포함된다. 결국 정보기기의 발달은 사이버공간을 포함한 세상의 여러 영역과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 셈이다.

‘드러내기’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은 ‘엿보기’ 문제를 동반했다. 네티즌 시절 타인에 대한 비방과 욕설,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에 대한 문제가 논란이 됐다면, 멀티즌의 시대에는 직접적인 사생활 침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B양의 비디오에 대한 소문이 돌자 이 동영상 자료를 받은 멀티즌들을 통해 B양 비디오는 순식간에 퍼져, 네트워크와 사생활보호에 대한 논쟁이 더 심해졌다.


사생활까지 공개하기 시작한 제니퍼캠 홈페이지.


정보공유 대 저작권보호

또 멀티미디어 기술은 인터넷의 저작권 논란을 ‘글’뿐만 아니라 음악, 소리, 동영상으로까지 옮겨놓았다. 이에 따라 ‘정보공유 대 저작권보호’의 문제를 비롯, 멀티즌 시대에 걸맞은 법리와 윤리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해 5월에 나온 P2P음악파일 공유사이트 ‘소리바다’(www.soribada.com)는 하루만에 가입자가 1만명을 넘어섰고, 6개월이 못돼 1백10만을 돌파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 애호가들은 오프라인에서 대중적으로 상업화가 어려워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예술 분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활성화시킬수 있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 통신기술을 반기고 있다.

한편에서 ‘정보의 공유’를 한층 더 가능하게 했다며 멀티미디어 관련 기술에 환호하는 반면, 저작권에 대한 논란도 끊임없이 일고 있다. 대용량의 멀티미디어 파일을 빠른 시간에 유통시킬 수 있는 기술들은 정보의 확산속도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바다를 만든 양일환·양정환 형제는 “궁극적으로 음악과 관련한 모든 집단에 이익이 되는 사업모델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눔’이라는 인터넷의 기본정신을 합법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중이라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익명성에 가려진 진실’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도 많다. 물건을 보고 시뮬레이션으로 시연도 해보고 구입하게 돼 온라인 쇼핑의 피해를 줄인다거나, 오프라인에서 앨범을 내기 전에 온라인에서 음악성을 검증받는 일, 또 오프라인 유통망이 취약한 중소업체들이 사이버공간을 이용해 효과적인 홍보를 할 수 있는 점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의미만큼이나 해악도 경계해야 한다. 순기능이 혁신적인만큼 해악도 폭발적이기 때문이다.

똘똘한 냉장고 등장할 날 멀지 않아

한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남자가 결투를 한다.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맥없이 밀리다 픽 쓰러진다. 이때 남자의 휴대전화 화면에 여자의 엄마가 실시간 동영상으로 나타나며 “니 그래가지고는 내 딸 못준다”라고 말하자, 쓰러졌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결투에 승리한다. 한 이동통신 업체의 차세대 서비스 광고다.

멀티즌의 기반은 이와 같은 멀티미디어 통신기기의 발달이다. 즉 멀티즌의 등장을 가능케 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내년쯤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최근에는 PDA나 핸드헬드 PC처럼 손바닥만한 크기의 정보기기만을 위한 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엄청나게 짜증나는 필름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영화제에 출품된 69개의 작품은 모두 소니사의 핸드헬드 PC ‘클리에’에서 상영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영화의 길이는 4분, 초당 12프레임을 넘지 않게 제작됐다.

국내통신업계도 발빠르게 멀티즌 시대에 맞는 서비스들을 강화하고 있다. 유니텔은 1월13일 ‘PC통신이 아닌 영상통신 시대’를 선포했다. 영상 문서공유 파일전송 등의 기능을 추가한 영상전화서비스, TV홈쇼핑처럼 제품을 시연해보는 영상쇼핑몰을 비롯, 영상게시판, 영상게임, 영상인터넷방송 등 영상관련 콘텐츠를 확보해 나간다는 것.

휴대폰을 단지 전화를 걸고 받는 도구로, 컴퓨터를 문서정보 입출력 기기로만 여긴다면 휴대폰과 컴퓨터가 자존심 상할 일이다. 웹 기능이 장착된 휴대폰, 화상채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PC카메라 등 멀티즌을 위한 하드웨어가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근거리간 무선 네트워크 장비인 블루투스 기술이 상용화되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똘똘한’ TV·휴대폰·냉장고·컴퓨터 등이 주위에 포진할 날도 멀지 않았다.

멀티즌이‘자신을드러내는것’과‘멀티미디어를 일상 생활에서 활용 하는것’은 2001년정보통신 이용자들의 새로운 패턴을 말해준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방식의 정보 격차를 막고, 이러한 문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성화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멀티즌 시대가 풀어가야 할 숙제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200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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