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정두원(鄭斗源, 1581~?)은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천리경, 서포, 자명종, 염초화(화약재료), 자목화(목화의 일종) 등 물품을 바쳤다. 천리경은 천문을 관측하고 백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다고 했다. 서포는 화승(화약심지)을 쓰지 않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서양인 육약한이란 자가 중국에 와 정두원에게 기증한 것이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망원경을 언급한 최초의 기사로 1631년(인조 25)에 등장한다. 망원경은 1608년에 네덜란드에서 발명된지 약 23년 만에 이역만리 조선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다.
오늘날 망원경이라고 하면 누구나 천체망원경을 먼저 떠올리지만, 최초의 망원경은 멀리 있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군사용 기구로 고안된 것이다. 1600년대 초 유럽에서 여러 사람이 망원경을 고안했기 때문에 최초 발명자를 특별히 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1608년 한스 리페르헤이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의회에 제출한 제품을 최초로 친다.
군사용 망원경은 얼마 뒤 천체관측용으로 개량됐다. 망원경 발명 소식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천문관측에 이용하려고 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이 발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원리를 연구하고 렌즈를 개선한 끝에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길이 1.6m짜리 30배율 천체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1610년 망원경을 이용해 달 표면, 은하수의 별, 목성의 위성 등을 새로 발견한 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책에 실어 세상에 알렸다.
갈릴레이와 동시대에 여러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작하고 개선하던 망원경은 곧이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 전해진다.
영조가 망원경 깨뜨린 이유
가톨릭 선교단체인 예수회에서 동아시아에 파견한 선교사들은 망원경을 서양의 진기한 물품으로 소개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 언급한 서양사람 육약한(陸若漢, Johannes Rodriques 1561~1634)도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였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가톨릭 탄압 정책으로 일본에서 쫓겨나 정두원을 만나던 때에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정두원은 당시 압록강 북쪽에서 세력이 강성해지던 여진족을 피해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중국 등주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그곳에서 명나라 군대의 장비를 개선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선교사 육약한을 만나 망원경을 입수한 것이다.
정두원이 육약한을 만나기 전인 1626년 탕약망(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이라는 예수회 선교사는 중국에서 망원경에 관한 책 ‘원경설’을 한문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는 갈릴레오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다룬 망원경 관측 성과를 비롯해 그 뒤 금성의 위상변화, 태양흑점, 토성의 귀(망원경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 고리로 보이지 않았음) 등을 관측한 내용, 망원경의 광학적 원리가 담겨 있었다.
흥미롭게도 병자호란(1636~7)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망원경과 ‘원경설’을 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유는 탕약망과의 친분 때문이다. 1644년 청나라는 북경을 점령하고 명나라를 굴복시켰다. 청나라는 서양천문학을 입수하기 위해 명나라에 봉사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다시 자기 나라의 신하로 받아들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는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가 북경에서 탕약망과 교류하고, 서양과학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두 사람의 친분은 매우 두터웠고, 탕약망은 1645년 귀국하던 소현세자에게 천문학 서적과 기구를 여럿 선물했다. 아마 이때의 선물에 망원경과 그 원리를 다룬 ‘원경설’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망원경에 관한 기록은 영조 시대까지 거의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숙종 때 딱 한번 등장하지만 청나라 관리가 망원경을 갖고 다니면서 지형을 살핀다는 부러움을 표현한 보고였다.
조선에서는 19세기까지 천체관측용 망원경의 중요성은 거의 인식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영조 때의 일이다. 관상감에서는 1744년(영조 20년)에 중국에서 망원경과 천문서적을 입수해 영조에게 보고했다. 영조가 확인하고 다시 관상감에 내려주면 이를 천체관측에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보고받은 망원경과 서적을 관상감에 내려주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른바 규일영(窺日影, 태양관측용 망원경)이란 것이 비록 일식을 살펴보는 데는 효과가 있으나 곧바로 햇빛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 이것은 나쁜 무리들이 왕을 염탐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므로 깨뜨려 버렸다.”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가 불경스럽다고 부숴버린 영조에 대해 신하들은 모두 잘 한 일이라고 찬탄했다. 지금 천문학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이 망원경과 이를 이용한 천문관측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요즘의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체관측용 망원경은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서 극히 드물게나마 태양관측에 사용됐던 것 같다. 1770년(영조 46년)에 관상감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망원경에 검은 칠을 해 12개의 태양 흑점을 관측했다. 18세기 후반에는 군사용 망원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영조 당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망원경의 숫자는 적으나마 서울 방위의 요처였던 남한산성에 하나, 그리고 북쪽 국경지방의 산성방어 임무를 맡은 부대에 몇 개 정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가늠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망원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조선에는 망원경의 개수도 적고 직접 본 사람도 많지 않았다. 1765년 겨울, 북경을 방문했던 홍대용(1731~1783)은 천주당(가톨릭성당)을 찾아가 서양선교사의 도움으로 망원경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낮에 태양을 관측했는데, 흐린 날씨에 해를 보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릴 필요가 없고, 아주 작은 것도 자세히 볼 수 있어 참으로 기이한 기구라고 감동했다. 홍대용은 이때 망원경을 처음 봤던 것 같다. 그가 가로로 그어진 망원경의 가늠선이 무엇인지 몰라 깜짝 놀라 물었을 때 서양 선교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망원경의 가늠선은 영국의 윌리엄 개스코인(1610~1644)이 우연히 발명한 것이다. 그는 망원경으로 관측하던 도중 대물렌즈와 접안경 사이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내려오는 광경을 봤고, 그 거미줄은 우연히도 접안경의 초점에 위치해 선명한 거미줄과 천체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발견에 기초해 접안경의 초점에 거미줄 가늠선을 설치함으로써 천체의 크기와 천체 간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이는 망원경을 통한 관측천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이규경(李圭景, 1788〜?)은 자신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태양흑점에 대해 기술하면서 서양인이나 중국인이 남긴 관측 경험에만 의존했다. 19세기 초반에 살았던 그도 망원경으로 직접 천체를 관측한 경험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1835년에 북경을 방문한 김경선(金景善, 1788〜?)이라는 조선 사신은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관측한 이야기를 자신의 여행기에 적고 있다. 여전히 19세기 중반까지도 조선 사람들에게 망원경을 보는 일은 드물고 신기한 경험이었던 셈이다.
서유럽에서는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관측이 1670년대쯤 일반화됐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지 한참 뒤에도 군사용이거나 천체관측용이거나 그리 요긴하게 사용되지 못했다. 서양에서는 망원경을 통해 우주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고 세계관을 변화시켰지만, 조선에서 망원경은 그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 천문학의 주류는 천체들의 위치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위치천문학이었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 위치를 계산하는 역법은 물론 천체들의 변화를 해석하는 점성술도 마찬가지였다. 천문관들은 햇무리나 달무리, 혜성이나 유성, 초신성을 열심히 관측했지만, 현상의 물리적 원인을 탐구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망원경은 있으면 좋기는 하되 없다고 해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천문학을 하는데 문제가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우리는 현대천문학에 익숙해 망원경은 천문학에 없어서는 안될 기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문학자들에게 망원경은 천체들의 모양을 자세히 보여주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전통적인 천문학을 뒤바꿀 만큼 획기적인 물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