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청자는 어떤 기술이 어떻게 유리한지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 시청자는 신기술이 적용된 생활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 ● 엔지니어도 아니고 정책결정권자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기술은 제품화됐을 때에야 비로소 관심의 대상이 된다. 기술 자체의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기술이 적용된 생활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끔씩은 인간의 적응력을 뛰어넘어 개발되는 기술이 있다. 지금처럼 멀티미디어가 보통 명사가 되기 전인 1988년 멀티미디어에 뛰어난 컴퓨터라며 출시된 ‘넥스트머신’이 그 예. 현재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광자기 디스크 드라이브와 디지털 음향 장치를 갖추고 등장한 넥스트머신은 최상의 사치를 부린 초호화 사양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 ● 그러나 넥스트머신은 일반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졌다. 호사가들의 말처럼 10년을 앞선 넥스트머신은 너무 빨리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오히려 빛을 보지 못한 경우다. 시장이 기술에 적응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 ● 최근 다시 논란이 불거진 디지털 방송을 보자.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화질 안방극장을 실현하는 디지털 방송은 갓 3년을 넘긴 태동기다. 현재 미국과 영국, 스웨덴, 스페인의 4개국에서 방송되고 있고,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남미에서 시범 방송을 하거나 기술검토가 진행중이다.
● ● 디지털 방송은 전파수신율을 향상시켜 난시청을 해소하고 차량이나 선박에 장착해 이동중일 때에도 또렷한 화면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디지털화에 따른 부가적인 혜택도 있다. 효율적인 전파자원 관리, 쌍방향 통신, 데이터 방송 등 디지털 방송이 이루는 변혁은 1920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첫선을 보인 아날로그 방송의 80년 역사를 대체할 예정이다.
● ● 디지털 방송은 방송과 시청자에게 기존의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쌍방향 의사전달이 가능한 양방향 TV,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채널과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PPV(Pay Per View) 기술, 화면과 음향뿐 아니라 데이터까지 전송하는 데이터 방송 등 다채로운 서비스가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텔레비전은 안방 또는 거실에 머물러 있는 바보상자에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배우고 즐길 수 있는 ‘똑똑한 TV’로 변하는 것이다. 디지털 방송을 통해 기술은 생활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 ● 미국의 시장조사 기관 ABI는 2006년이면 디지털 방송을 시청하는 가구수가 2억 4천만 가구, 시장규모는 1백92억 달러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현실은 불투명하다. 미국의 경우 방송 송출 3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방송 가입자는 40만 가구에 불과하다.
● ● 디지털 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할 내용이 부족할 뿐 아니라 역으로 소비자들이 아직은 디지털 방송을 수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 ● 여기에는 기술적인 난점도 한몫하고 있다. 처음 디지털 방송을 선보인 미국에서도 이동시 수신율 저하와 난시청 지역 해소를 위해 기술 변경을 꾀하고 있다. 현재 디지털 장비 제작의 선두 주자인 일본도 디지털 방송 개국을 차일피일 미루며 기술적 완성도를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디지털 방송 기술이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다.
● ● 현재 디지털 방송은 국제 표준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아날로그 방송이 우리나라와 미국 등에서 사용하는 NTSC방식과 유럽의 국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PAL방식으로 나뉜 것처럼 디지털 방송도 미국이 주도하는 ATSC방식과 유럽에서 제정한 COFDM방식으로 구분된다. 일본처럼 독자적인 방식을 제창한 나라도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유럽식을 개조한 것으로 넓게는 유럽식 방송의 범위에 든다. 상이한 기술 표준을 채택한 나라에서는 시스템과 수상기가 호환되지 않는다.
● ● 사실 시청자는 어떤 기술이 어떻게 유리한지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기술이 적용된 결과가 중요하다. 어떤 방식의 기술이 도입되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방송을 볼 수 있고,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또렷한 영상을 즐길 수 있으면 족하다. 기술의 수용자는 신기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기술이 적용된 생활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시장은 기술의 진보에 따라 변화하지만, 기술은 시장에 적용돼야 비로소 인정받는다. 기술 선도 기업들이 국제 표준 점령을 위해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 디지털 방송은 시대적 흐름이다. 지금은 시장과 기술의 선점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디지털 방송을 위해 방송사는 제작장비부터 송출장비, 그리고 중계기와 수신기까지 모든 시스템을 변경해야 한다.
● ● 사용자도 새롭게 적용되는 디지털 TV를 구입해야 한다. 국내 시장규모만 따져도7백조원에 해당하는 이 엄청난 사업 규모를 볼때 적극적이면서도 유연한 사고가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