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사랑의 레시피’의 주제는 간단하다. 인생의 최고 요리는 사랑이라는 것. 사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도 지루함과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 사는 맛을 느끼게 해줄 사랑을 바란다. 그러나 사랑을 한다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최고 요리 가운데는 달콤한 요리만 있지 않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매운 요리도 있기 마련이다. 사랑도 경우에 따라서 슬픔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심리학자에게 남녀 간의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어떤 답을 줄까?
애인을 친구로 만드는 스토르게적 사랑
윤도현밴드는 히트곡‘사랑 two’에서 ‘처음엔 그냥 친군줄만 알았어. 아무 색깔 없이 언제나 영원하길’이라고 노래했다. 아무 색깔 없이 그저 언제나 한결같으리라 생각했던 관계에 여러 가지 색이 입혀지면서 사랑의 감정도 다양해진다.
캐나다 토론토대 심리학과 존 리 교수는 1973년 “기본 3원색이 섞이면 다양한 색이 나오듯 사랑도 기본 요소가 혼합되면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알려진 사랑 유형인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가 있고, 이들 중 2가지씩 짝을 지어 섞으면 ‘혼합사랑’이라 불리는 3가지 유형이 더 생긴다. 즉 사랑의 종류는 총 6가지다.
에로스적 사랑은 정열이다. 첫 눈에 반한 사랑, 천생연분이라는 믿음으로 상대방에 몰입하는 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면 정서적으로 너무도 강렬한 충격을 받아서 기꺼이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눈에 반해 사랑을 하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루두스적 사랑은 유희다. 사랑을 즐기기 위해 특정한 상대에게 몰입하지 않는다. 최근 개봉한 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의 주인공들처럼 문어발식 ‘크로스 연애’도 불사한다. 스토르게적 사랑은 우정과 같다. 상대방을 특별히 애타게 그리워하는 감정 없이 애인을 친구처럼 만난다.
에로스+루두스=마니아적 사랑
미국 텍사스공대 심리학과 클라이드 핸드릭 교수팀은 6가지 사랑의 종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연구결과를 1986년 성격과 사회심리학 저널에 발표했다. 핸드릭 교수팀은 존 리 교수의 6가지 사랑 유형의 특징을 담은 설문지로 사랑에 빠진 대학생 348명을 조사했다. 설문 참가자는 각 문항에 대해서 ‘매우 그렇다’에서 ‘매우 그렇지 않다’까지 자신의 생각을 5개 척도로 나눠 대답했다.
모든 실험참가자들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답을 ‘요인 분석’(factor analysis) 한 결과 6개의 소집단으로 나눌 수 있으며, 애초 설문지를 설계한 대로 리 교수의 6개 사랑 유형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또한 특정 사랑 유형에 속한 사람은 다른 사랑 유형에 대한 질문에 소극적으로 답했다. 예를 들어 스토르게적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에로스적 사랑에 해당하는 문항, 즉 상대방을 볼 때 흥분하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데 비해 상대방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느냐는 질문에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로써 리 교수의 6가지 사랑 유형이 실재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랑이 서로 섞이면 또 다른 사랑이 만들어진다. 마치 혼합색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지면 마니아(Mania)적 사랑이 된다. 혼합사랑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두 사랑의 요소가 더 극적으로 혼합된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매달리는 한편, 자신의 경험 때문에 상대방도 다른 사람을 찾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한다. 결국 마니아적 사랑에 빠지면 소유욕에 불타 상대방에게 의존하면서 질투하고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어떻게든 상대방을 묶어 놓으려 한다. 바람둥이가 한 사람에게 정착해서 오히려 매달리며 살게 되는 것도 마니아적 사랑의 특성 때문이다. 영화 앙코르(원제: Walk the line)의 주인공 ‘조니 캐쉬’가 ‘준 카터’의 노래에 빠져 그녀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좋은 예다.
루두스적 사랑과 스토르게적 사랑이 합쳐지면 프래그마(Pragma)적 사랑이 된다. 프래그마 사랑은 논리적이고 실용적 사랑이다. 그래서 마치 물건을 꼼꼼히 따져보고 구매하는 것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요건에 맞는 상대방을 고른다. 그렇게 고른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이나 헌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한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연희(엄정화 분)가 조건을 보고 남자를 고르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리저리 잰 뒤에 선택한 상대이니만큼 삶의 안정을 깨뜨린다면 사랑도 깨지기 쉽다. 반대로 상대방과 함께 살더라도 특별히 만족하지도 못한다. 상대방이 출중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요건에 그나마 맞아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에 맞는 다른 사람과 맺어졌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살아보면 누구나 다 똑같다’라고 말한다.
에로스와 스토르게적 사랑이 합쳐지면 아가페(Agape)적 사랑이 된다. 아가페적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헌신을 당연한 의무라 여긴다. 아가페적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고난도 두렵지 않다. 마치 순교도 불사하는 신자처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헌신을 한다고 해서 마니아적 사랑처럼 소유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나온다면 기꺼이 물러난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상대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에서 십년이 지나도 서로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비슷한 예다.
당신의 사랑은 어떤 유형인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랑
사랑의 유형이 같으면 연인이 될 확률도 높을까? 199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에든버러대 그레고리 모로우 교수팀은 연인 가운데는 애정 유형이 같은 경우가 유형이 다른 경우보다 많고, 사랑 유형이 같으면 관계의 만족도가 높고 상대에게 더욱 헌신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6개의 유형 중에 특히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커플과 아가페적 사랑을 하는 커플이 다른 유형의 커플보다 만족과 헌신이 더 높았다. 또 루두스적 사랑을 하는 커플은 만족도와 헌신도가 최하위였다.
2004년 일본 오사카대 유지 카네마사 박사팀은 현재 사랑에 빠져 있다고 응답한 대학생 343명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조사 결과 존 리 교수의 이론대로 사랑 유형이 6가지로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핸드릭 교수팀의 결과와 비슷하게 남자는 루두스적이고, 여자는 프래그마나 스토르게적인 사랑의 경향이 강했다.
문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보편적인 사랑 유형이 있다는 뜻일까. 연구팀은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에도 주목했다. 남녀 모두 열정적인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을 선호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소설‘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두 주인공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후를 맞기 전에 두 주인공이 벌인 아름다운 첫날밤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가슴 떨려 했었는지 기억하면 에로스적 사랑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은 이유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사랑의 보편성 때문에 ‘춘향전’ 이야기에 매료되는 외국인이 있고, 이란 영화 ‘올리브나무 사이로’에 공감하는 한국인이 있다. 나아가 다른 나라에서 사랑하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고도 국경을 초월해서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을 한다.
이 가을, 어느 나라의 사랑 이야기든 많이 보고 이야기를 해보자. 영국의 격언집에 나오는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격언이 실현돼 영화 ‘러브 액추얼리’의 주인공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기 이전에, 그래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행복의 씨앗이니 부디 사랑에 헌신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