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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오래 사는 별 노인성

서울에선 볼 수 없다?


보면 오래 사는 별 노인성


언덕 아래 이리 한마리 광채가 무성하네
(丘下一狼光蒙茸)
왼쪽으로는 아홉별이 둥근 활을 만들어
(左畔九箇灣弧弓) 화살 하나가 사나운 이리의 가슴을 겨누고
(一矢擬射頑狼胸)
노인 한사람이 남쪽 끝에 있는데
(有箇老人南極中)
봄가을에 나타나면 수명이 무궁하다네
(春秋出來壽無窮)


중국 별자리교본인 ‘보천가’에는 노인성(老人)이 각각 두 별로 이뤄진 손자(孫), 아들(子), 아빠(丈人)라는 별자리와 나란히 소개돼 있다.


중국 수나라(518~618년) 때 만들어진 별자리 교본인 ‘보천가’(步天歌)에 나오는 구절이다. 보천가는 ‘하늘을 밟는 노래’라는 뜻으로 별자리가 배치된 상황이나 별자리의 모양, 별의 개수 같은 정보를 담아 노래로 만든 것이다. 전통별자리는 300여개로 현대 서양별자리 88개보다 훨씬 많은데, 그 때문에 구구단처럼 리듬에 맞춰 외우는 노래가 나왔을 것이다.

보천가는 전통시대 천문학자들이 잠결에도 튀어나올 정도로 외워야 하는 지식이었다. 천문관서의 직원이 되기 위한 과거시험에서도 별자리 암송은 필수였다. 17세기부터 서양천문학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별자리에 속한 별 수가 달라지고 외우는 노래도 조금 달라졌지만, 별자리의 명칭, 모양, 의미는 변하지 않은 채 보천가 체계가 유지됐다.

서양별자리에는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카시오페이아 등 신화 속의 주인공과 별자리를 연결한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전통별자리에는 견우와 직녀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지 않는다. 이는 아마 천문학에 대한 동서양의 시각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동양에서는 천문학이나 점성술이 제왕의 학문으로 일반인이 논의할 수 없는 금지된 지식이었다. 별자리의 이름과 모습은 원래부터 국가의 운명을 점치기 위한 점성술과 함께 만들어져 민간의 재미있는 설화나 역사적인 유래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어떤 별자리에 혜성이나 유성이 나타나면 전염병이나 병란이 나타난다는 식으로 별자리마다 점성술적 의미를 붙여놓은 경우가 많다.

이야기가 없어 밋밋한 전통별자리에도 가을 절기인 추분을 맞이해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별과 별자리가 있다. 노인성(老人星)과 그 옆에 자리 잡은 아빠, 아들, 손자 별자리다.

밤하늘에 증손자까지 4대가 나란히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별 사진에서는 노인성(카노푸스)이 원래 청백색의 밝은 별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평선 부근에 있는 노인성(원 안)은 대기의 영향을 받아 붉게 보인다.


보천가에서 ‘노인 한사람이 남쪽 끝에 있는데’라는 구절에 나오는 ‘노인’이 바로 노인성이다. 전통시대에 이 별은 남극노인(南極老人), 수성(壽星), 수성노인(壽星老人)으로도 불렸다. 보천가에 ‘봄가을에 나타나면 수명이 무궁하다네’라고 한 것처럼 장수를 주관한다고 믿어져왔다. 서양별자리와 대조해보면, 보천가에 나오는 이리는 서양의 시리우스, 활은 큰개자리, 노인은 큰개자리 아래의 용골자리(Carina)에 속한 카노푸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밝기가 -0.7등급인 노인성은 밤하늘에서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아 매우 인상적인 별이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 노인성을 관측한 사람들은 ‘횃불만 하다’ ‘달만 하다’ ‘샛별만 하다’ ‘빛이 심히 찬란했다’며 하나같이 감탄조로 묘사했다.

재미있게도 노인성 주변에는 노인의 가족인 듯한 식구도 있다. 각각 두 별로 이뤄진 아빠(丈人), 아들(子), 손자(孫)라는 별자리가 나란히 있다.

노인을 할아버지로 보고 증손자까지 4대를 나란히 배치해 가족 사이에 효도하고 보살피는 미덕을 나타내려 한 셈이다. 노인성은 늘 보이는 별이 아니고 고도 또한 매우 낮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노인성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선시대 천문학자들은 가까이 있는 손자별을 지표삼아 노인성을 확인했다. 손자를 보면 곁을 지키며 보살피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셈이다.

노인성은 우리나라에서 관측하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인 제주도 대정읍 지역의 위도가 북위 33° 근처다. 지구가 기울어 자전하므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별은 이론상으로는 적위가 -57° 이상인 별이다. 노인성은 적위가 -54° 40′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의 남쪽 한계에 있다. 하지만 지평선 근처의 별은 시간을 잘 맞춰 최대 고도일 때를 잡지 않으면 잘 식별할 수 없다. 노인성은 주로 춘분(3월 21일경) 저녁과 추분(9월 23일경) 아침에 관측한다. 추분은 노인성을 처음 볼 수 있는 날이고 춘분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다. 이때도 고도가 낮아 관측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고 해도 쉽게 진다.

노인성은 수명을 관장한다는 점성술적 믿음 때문에 고대부터 숭배됐다. 동양 최초의 본격적인 점성술서라 할 수 있는 중국 한나라 때의 ‘사기 천관서’에서부터 노인성이 수명과 관련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 노인성에 장수를 빌기 위해 국가적인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노인성제(老人星祭)라고 한다. 중국의 ‘후한서’에 가을철 노인성에 대한 제사를 남쪽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후한 때부터 노인성에 대한 제사가 장수를 비는 풍습과 결합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사’에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에서 노인성 제사를 자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성을 관측했다는 보고는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었기에 노인성을 봤다는 거짓보고도 있었다. 고려 의종(1146~1170년) 때 서해도(황해도) 안렴사(도지사)를 지낸 박순가는 노인성을 관측했다고 역마를 달려 보고했다. 그러나 황해도의 위도만 보더라도 이는 거짓보고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노인성은 적위가 낮아 남해안 지역과 제주도에서나 겨우 보이기 때문이다. 박순가는 낭성(狼星, 시리우스)을 노인성이라고 속였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 영조는 노인성 관측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던 사람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80세가 넘도록 장수한 영조는 제주도에 파견됐다 돌아온 관리를 만날 때면 노인성을 봤느냐고 묻곤 했다. 또 제주도에 장수하는 노인이 얼마나 많은지 묻곤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노인성을 볼 수 있어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꽤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1763년 제주에서 열렸던 장수 잔치에 80~90세 노인이 상당히 많았고, 102세의 장수노인도 있었다는 보고도 영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1769년 신하들은 장수에 관심이 많았던 영조의 뜻을 받들어 1년에 한번 노인성에 제사를 지내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이 이미 76세나 됐으니 노인성 제사로 더 많은 복을 기원할 필요는 없다고 거절했다. 영조는 그뒤로도 83세까지 살았으니 신하들의 노인성 관측 보고를 많이 들었던 효과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수성노인, 술 취한 이유


경기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남극노인도’. 노인성을 상징하는 이 신선은 이마가 기형적으로 길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허리에 차고 있는 술병의 술을 마셨는지 취해 불그레하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는 제주도의 한라산 남쪽과 남해의 금산에서 춘분과 추분에 노인성을 관측하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또 전라도 순천 같은 남해안 지역에서도 노인성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돼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성과 연관된 유적으로 유명한 곳은 제주도 서귀포와 남해 금산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곳의 이름이 남성정 또는 남성대라고 한다. 바로 노인성을 관측하던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파견한 관측관이나 지방 수령이 이곳에서 노인성을 관측해 중앙에 보고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는 간성각이 있는데, 이곳도 노인성을 관측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들리는 말로는 지리산 법계사에도 노인성을 관측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실제 지리산에서도 노인성을 볼 수 있는지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노인성을 상징하고 수명을 관장하는 신선을 수성노인이라 불렀다. 이 신선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그림으로도 많이 그려졌는데, 모습이 좀 괴상하게 생겼다. 머리는 기형적으로 크고 길게 솟아 이마가 길쭉하고 왼손에는 지팡이를, 오른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흰머리에, 긴 수염에 키는 작다. 허리에는 술병을 차고 있으며 얼굴은 이미 취해 불그레한 모습이다. 노인성은 원래 청백색의 밝은 별이지만 늘 지평선 부근에서만 보여 대기의 영향 때문에 조금 붉게 보인다. 아마 이 탓에 술에 취해 얼굴이 불그레한 노인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수성노인도는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회갑을 축하하는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최근 경남 남해 금산과 제주 서귀포시는 노인성 관측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홍보하고 있다. 예로부터 알려진 대로 노인성을 보면 장수한다며 어르신들을 유혹하고 있다. 점성술이야 근거가 희박한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쉽게 볼 수 없는천체를 관측하면서 천문학도 체험하고 또 가볍게나마 장수에 대한 기대를 가져보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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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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