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전통적인 종교 상징물인 솟대,장승,서낭당 등이 북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로 발견된다.이들이 제작된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다만 고대에 한반도와 북아시아에서 동일한 무속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세계에 익숙해져 있다. 땅, 기후, 식물, 동물, 계절과 시간, 그리고 자연환경 속에서 배태된 여러 물질적 또는 정신적 문화가 그렇다. 자신의 세계에서만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며 유일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유사한 문화를 만났다면, 그 문화를 이루었던 사람들과 우리는 어떠한 관계에 있을지 궁금해할 것이다. 예를 들어 농부들이 밭을 일구다가 우연히 찾은 여러 고고학 유물은 그 땅에서 그 농부가 처음으로 정착한 것이 아니었음을 일러준다. 이때 농부는 그 이전의 문명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서낭당과 비슷한 몽골의 오보
고고학자나 민속학자는 간혹 낯선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만나는 체험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광활한 북아시아 전지역에서 가끔 현재의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만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석기나 청동기 시대의 우리와 유사한 문화를 찾아낸다.
민속학자는 특히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신앙의 형태와 내용은 다른 문화요소에 비해 비교적 장구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신앙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느 지역까지 퍼져있었는지를 알아내면 우리의 조상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민속학적 자료만으로는 언제 우리의 조상이 시작됐는지 밝히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 자료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조상이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는지를 밝혀낼 뿐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이후부터 우리는 북아시아와 한국의 일부 민속에 많은 친연성(親緣性)이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1920·30년대에 이미 육당 최남선 선생은 한국의 무속을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견주어 이해하기 위해 폴란드 출신의 여류 인류학자인 챠플리카의 ‘시베리아의 원주민’(1914)을 초역해 발표했다. 또 남창 손진태 선생은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소도(蘇塗), 장승, 누석단(累石壇: 돌무더기 서낭당)과 같은 민속이 북아시아 민속과 깊은 관계 속에서 형성됐음을 밝혔다. 일본인 학자인 아끼바도 한국의 장승·솟대에 대응해 퉁구스계의 골디족(Goldi), 소론족(Solon), 오로치족(Orochee), 오로촌족(Orochon)의 목우신상(木偶神像: 나무로 사람 모습을 만든 신상), 신간(神杆: 신성한 기둥이나 장대), 조간(鳥杆: 나무나 쇠로 만든 새를 꼭대기에 앉힌 기둥이나 장대) 등을 소개하고, 서낭당 역시 몽골의 오보(Obo, 鄂博)와 유사해 북아시아 문화 계통에 속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 민속학 선구자들이 일러준대로 우리는 북아시아에서 오랜 ‘시간의 깊이’를 지닌 민속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유사성 때문에 한국인과 그 문화의 원류를 흔히 북아시아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곧 유사성은 북아시아로부터의 문화전파나 영향 또는 교류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유사성을 ‘동일성’으로만 여겨온 것 같다. 유사성은 글자 뜻 그대로 ‘서로 비슷한 성질’을 일컫는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한국과 북아시아가 고대로 소급할수록 함께 가지고 있던 공통분모의 민속이 그 이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변화된 것이다.
우주를 왕래하는 새 오리
이제 유사성만 강조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유사성 안에서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왜 달라졌는지에 대한 자연·역사·문화적 측면의 해명이 중요한 것이다. 서양의 교향곡을 들을 때 각 악장을 구성하는 주제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모르면서 단순히 동일한 선율의 반복이라 말한다면, 음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각 민속에 보이는 유사성 안에서 같고 다른 점을 정확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민속의 형성·전개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과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코자크족 중심의 러시아 탐험대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와 예니세이 강변에서 퉁구스족의 샤먼(주술사)을 만난 후로부터, 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확대됐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샤머니즘이 베링 해협으로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보편화된 종교현상임을 알게 됐다. 샤머니즘 연구자들은 이를 ‘샤머니즘의 문화파동’이라고 부른다.
한때 우리 민속학자들 사이에는 ‘한국의 무속이 샤머니즘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무속은 샤머니즘이라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무속이 샤머니즘 바로 그것이라든지, 또는 샤머니즘과는 별개의 종교체계라든지 하는 식의 논리 전개는 때로는 무의미할 수 있다. 검은 말은 말이 아니고, 흰말만 말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 안에 검은 말과 흰 말이 있는 것이다. 중미 지역의 기독교가 우리 기독교와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우리나 그들의 기독교 하나를 가리켜 기독교가 아니라 한다면 이는 온당하지 못하다. 곧 한국의 무속은 샤머니즘의 한 계통으로서 한국이라는 환경 안에서 특수하게 발달된 종교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무속’은 한국 샤머니즘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민속 요소인 장승·솟대, 서낭당, 신목(神木)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솟대란 장대나 돌기둥 위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앉힌 신앙대상물이다. 솟대에 대한 신앙도 북아시아 여러 민족에게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이 지역 청동기 시대의 종교 의식에 사용된 그릇에도 나뭇가지나 기둥에 새를 앉힌 조형물이나 문양이 간혹 발견된다. 이처럼 넓은 지역성과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되는 시간성은 솟대가 고대로부터 북아시아 전 지역에 공통되게 퍼져나간 보편적인 신앙임을 암시한다.
솟대의 발생은 이른바 우주나무(Cosmic Tree)와 하늘새(Sky-Birds)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우주나무가 뚜렷한 하나의 신앙 관념으로 자리잡고 강화되는 것은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수직적 우주관과 관계된다. 곧 각 우주층을 연결시킬 수 있는 우주축으로서 우주나무가 쓰여지는 것이다. 이런 우주나무는 우주층의 교통로로서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이때 각 우주층을 왕래하는 하나의 사자(使者)로서 새가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우주나무에 새를 앉힌 것은 결국 우주 중심의 역할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셈이 된다.
애니메이션 기법 사용
간혹 새를 앉히지 않은 솟대가 발견되는 것은 사자로서의 새의 기능이 생략된 경우에 불과하다. 솟대의 새는 모두 물새이며 철새인 오리다. 오리는 천상·지상·지하(물 속)를 오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일정한 주기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철새이기도 해서 능히 초월적인 세계와 인간 세계를 넘나드는 신조(神鳥)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동일한 상징에서 비롯된 솟대는 그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서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북아시아의 솟대는 샤머니즘의 우주관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여러 개의 솟대를 일렬로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까지 세워놓아서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양을 연출하는 ‘애니메이션 기법’이 활용됐다든지, 샤먼의 굿 장소에 반드시 솟대를 세운다든지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솟대는 무속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아주 간혹 무당이 솟대 앞에서 간단한 굿을 벌이지만, 이는 마을의 평안을 비는 하당굿을 베풀 때에만 그런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솟대는 마을의 풍농을 위한 신앙 대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솟대의 장대를 ‘용(龍)트림’ 모양으로 장식해 비바람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비는 일이 많아졌다.
이밖에도 오리는 물새라서 홍수가 빈번한 마을에 홍수맥이(맥이는 방어의 뜻)로 세워지거나, 도깨비불이 심한 마을에 화재뱅이(뱅이는 방어의 뜻)로 건립되기도 한다. 또 조선조 때에는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급제 솟대’도 흔히 세워졌다.
한편 시베리아나 만주의 목우신상과 달리 한국의 장승에는 사모관대와 족두리가 표현돼 있다. 또 가슴에는 장승의 액막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주술적 문구로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니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니 하는 문장이 쓰여져 있다. 장승과 솟대는 한짝이 돼 매년 음력 정초에 마을을 지키는 하당신으로 모셔졌다.
예전에는 웬만한 시골 고갯길에는 대개 돌무더기 서낭당이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에는 왼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주머니에 있는 무엇인가의 물품을 약간 던져주었다. 주변의 돌을 주워서 던지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간혹 서낭당을 만날 때가 있다. 이러한 서낭당 말고도 마을 입구에 잡석을 원뿔대 모양으로 쌓아올린 탑도 있다. 불교 사찰의 탑이 아니라, 마을 입구의 하당신인 할아버지탑, 할머니탑인 것이다.
음력 정초가 되면 나쁜 액운이 들었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은 마을 부근의 서낭당에 무당과 함께 가거나 식구들만이 가서 간단하게 손을 비비면서 행운을 기원한다. 그러나 마을 입구의 탑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매년 음력 정초에 마을의 안녕과 화평을 위하여 제사를 올린다.
서낭당과 탑에 대응해 북아시아의 돌무더기 신앙대상물도 흔히 거론된다. 몽골에서는 오보라고 부른다. 티베트, 부탄, 네팔, 몽골, 만주 등지에서 우리 서낭당과 비슷한 오보를 볼 수 있고, 탑과 다소 유사한 잘 조성된 오보도 쉽게 발견된다.
오보에는 헝겊이나 종이, 라마교 경문, 말이나 양의 머리뼈, 그 밖의 여러 물품들이 현란하게 휘날린다. 역시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는 시계바늘 방향으로 세번을 돌고 무엇인가 바쳐야 한다. 이때 흔히 하얀 우유가 뿌려지며 오보의 신령에게 행운을 비는 기도문을 읽는다.
초원 곳곳에 세워진 오보는 분명히 경계표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한국의 서낭당과 탑, 북아시아의 오보는 그 외형이나 신앙상의 형태와 기능에 있어서 근원적인 유사성이 찾아진다.
신목에 볏짚 금줄이 걸린 이유
그러나 세부적인 차이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곧 서낭당과 오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문화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만큼 양 지역의 자연·역사 환경에 적응해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숲속의 어떤 나무나 넓은 들판에 홀로 서있는 나무에는 역시 많은 가죽, 헝겊, 가축의 뼈들이 봉헌돼 있다. 한국의 신목(神木)에서도 흔히 그렇다. 그러나 짐승의 뼈나 가죽들은 신목에 걸리지 않는다. 벼농사 위주의 농경 마을이라서 볏짚을 왼쪽으로 꼬아서 만든 금줄이 신목에는 필수적으로 걸리는 종교적 상징물이 된다.
북아시아와 한반도의 민속은 고대로 소급할수록 강한 친연성을 보이며, 또한 광대한 북아시아 전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민속이기에, 그 유사성은 근원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이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오랜 세월 경과했기 때문에, 유사성이라는 전제하에 그 안에 나타나는 차별성도 적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차별성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현재로서는 밝히기가 어렵다. 다만 북아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문화가 전파됐다기 보다, 고대에 북아시아와 한반도가 함께 지니고 있던 문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양 지역 민속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낳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