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9일, 중앙일보에 실린 한 문장이 온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띄어쓰기도 없는 이 문장은, 루게릭병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전 농구 선수 겸 코치인 박승일 씨가 당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쓴 메일이었다. 2002년, 그토록 바라던 농구단 코치로 발탁되자마자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박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루게릭병이라는 희귀난치병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9년 뒤인 올해 8월, 루게릭병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미국루게릭병협회(ALS)가 기부금을 모으려고 시작한 ‘아이스버킷 챌린지’ 캠페인이 미국은 물론, 전세계 SNS를 뜨겁게 달군 것. 먼저 얼음물을 뒤집어 쓴 사람이 3명을 지목하면 지목된 사람은 24시간 이내에 얼음물을 뒤집어 쓰거나 100달러를 ALS재단에 기부해야 한다. 사회 각계 인사와 일반인이 앞다퉈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국내 기부자만 1만여 명에 달했다.
남은 생애 평생 가위에 눌려 산다
‘누구나 한 번쯤 가위에 눌려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의식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어 식은 땀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경험. 루게릭병 환자는 이와 같은 상태로 발병 후 평생을 지내야 합니다.’
박 씨는 루게릭병을 이렇게 표현한다. 루게릭병은 근육이 사라지고 척수가 있는 운동신경 다발이 딱딱하게 굳는 질병이다. 대뇌 피질의 상부 운동신경세포는 긴 신경돌기인 축삭을 통해 하부 운동신경세포로 신호를 전달하고, 하부 운동신경세포는 근육으로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상부 및 하부 운동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죽으면서 서서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루게릭병의 정식 명칭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이다. 1941년,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루 게릭이 진단을 받은 지 2년 만에 숨지면서 그가 걸린 이 병을 루게릭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루게릭병은 뚜렷한 예후나 통증이 없다. 처음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손발에 힘이 없는 정도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95쪽 박스 기사 참조). 확진할 수 있는 검사법조차 없다. 근전도검사 혈액검사 방사선검사 유전자검사 등 다양한 검사법이 동원되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다른 질환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검사를 마친 뒤 기존에 알려진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때서야 루게릭병 판정을 받는다. 조광희 한국루게릭병협회 사무국장은 “근육에 이상을 느낀 환자들은 처음 몇 개월간 한의원에서 침을 맞거나 이 병원 저 병원 찾아 다닌다”며 “신경과에 와서야 루게릭병 판정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초기 루게릭병 환자들은 손과 발, 다리의 근력이 약해지고 가늘어진다. 수저질을 하거나 단추를 잠글 때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근육이 움찔거리는 증상이 나타난다. 파괴된 신경세포를 대신해 살아있는 신경세포가 전력을 다해 신호를 전달하려 무리하기 때문에 루게릭병 환자는 피로를 쉽게 느낀다. 점차 증상이 온몸에 나타나면서 걷거나 움직이기가 어려워지며 결국 스스로 일어날 수 없게 된다. 병이 더 진행되면 혀와 얼굴 근육이 마비돼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안구마우스를 쓰거나 눈을 깜빡여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
![▲ 루게릭병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전 농구 선수 박승일 씨가 여자친구와 문자판을 통해 눈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온 몸이 마비되지만, 눈 근육만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9/17237056355423a227d893d.jpg)
![▲ 대뇌 피질의 상부 운동신경세포는 긴 신경돌기인 축삭을 통해 하부 운동신경세포로 신호를 전달하고, 하부 운동신경세포는 근육으로 전기 신호를 전달해 원하는 동작을 할 수 있다. 루게릭병에 걸리면 상부 및 하부 운동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죽으면서 근육이 서서히 마른다. 의식과 의지가 있는데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 대부분 발병 3~5년 안에 호흡근마저 멈추면서 사망한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9/18592277725423a2583c3ea.jpg)
루게릭병 환자에게 치명적인 폐렴
환자는 점차 침이나 음식물을 섭취하기 어려워진다. 입 안에는 자주 침이 고인다. 삼키는 근육이 마비돼 사래에 걸리는 경우가 잦다. 만약 점액이나 침, 음식물이 폐로 넘어가면 폐렴에 걸릴 수 있다. 루게릭병 환자에겐 치명적이다. 호흡근이 약해 기침으로 가래를 배출하기 어려워 합병증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보호자는 종종 환자의 흉부를 압박해 환자가 기침하도록 도와야 한다. 기침 유발기를 쓰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기침 발생 원리를 이용한 장비다. 많은 양의 공기를 폐에 주입한 뒤, 폐가 확장되면 빠르게 공기를 빼내 기도 분비물을 배출시킨다.
모든 음식은 농도가 진하고 질감을 균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역시 사래에 들리지 않기 위해서다. 물을 포함한 모든 액상 식품은 농후제를 이용해 걸쭉하게 만든 뒤 먹는다. 신맛이 강한 것, 북어포처럼 마른 것, 어묵처럼 잘 씹히지 않는 것, 떡처럼 목에 잘 붙는 것, 견과류처럼 입자가 남는 것, 섬유소가 많은 채소처럼 질긴 것 등은 금지다. 음식물을 입 안에 넣은 채로 말해선 절대 안 된다. 삼킬 때는 고개를 약간 숙여야 한다. 식사를 마친 뒤 보호자는 음식이 입 안에 남아 있는지 살펴보고 젖은 가제로 입안을 닦아줘야 한다. 이 때도 물을 사용해선 안 된다.
병이 말기로 진행하면 호흡에 관여하는 운동신경세포가 죽는다. 호흡근마저 마비 증상을 보인다. 호흡곤란이 심해지면 인공호흡기에 의지한다. 대부분 발병한 지 3~5년이 되는 시점. 박승일씨나 스티븐 호킹처럼 장기간 투병하는 환자도 있지만, 많은 환자가 이 때 숨을 거둔다. 의식과 감각은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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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건 사회의 관심
루게릭병은 인구 10만 명 당 4~5명이 걸리는 희귀병이다. 매년 10만 명 당 1~2명이 새로 발병한다. 조 사무국장은 “아직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매년 발병하는 환자 수만큼 사망하며 국내에는 약 2500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환자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워낙 환자가 적다 보니, 맞춤 정책 없이 일반적인 장애인 정책에 편승해가는 실정이다. 환자를 간호하는 데서 오는 육체적, 심리적, 경제적 부담은 전부 가족과 보호자 몫이다. 현재 박승일 씨와 가수 션이 공동대표로 있는 승일희망재단은 한국루게릭병협회와 함께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덜어줄 루게릭 요양병원을 건립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다. 조 사무국장은 “24시간 생존에 관한 모든 것을 가족에 의존해야 하는 환우들의 생활은 처참할 정도로 열악하다”고 말했다.
최근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원래 취지를 잃은 채 연예인들의 인맥 과시용이나 웃고 떠드는 놀이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조 사무국장이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래서다.
“환자들은 몇 년 내에 반드시 사망한다는 절망 속에서 투병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루게릭병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저희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사람이 매일 1만 명이 넘습니다. 환자들은 그 관심이 반갑고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붐으로 인해 맞춤복지 정책이 나오고 치료제가 개발되리라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는 한마디 당부의 말로 e메일을 끝맺었다.
“발병의 원인을 모른다는 건, 누구나 루게릭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투병생활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