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을 담는 항아리에 숯을 띄운 건 조상들의 오래된 지혜다. 이렇게 하면 숯이 오염 성분을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해 된장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 이는 넓은 표면적 덕분이다. 숯에 뚫린 무수한 구멍은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쌓아 놓는 저장고 노릇을 한다. 유해 물질이 숯 내부에 다량으로 달라붙는 것이다.
“연구단이 탐구하고 있는 ‘나노 다공성(多空性)’ 물질도 숯과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숯처럼 크기가 제각각인 구멍이 무질서하게 뚫려 있는 것과는 다르죠. 우린 몇 나노미터(nm, 1nm=${10}^{-9}$m)의 작은 구멍이 일정한 크기로 뚫려 있는 물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쓰임새요? 화학반응의 속도를 조절하는 ‘촉매’를 입힐 생각입니다. 원하는 크기와 성질을 지닌 물질을 엄청나게 많이 붙일 수 있는 특성을 이용하는 거죠. 화학반응 조절은 연료전지 같은 차세대 에너지 장비의 핵심 과제이기 때문에 의미가 큽니다.”
지난 2001년부터 기능성나노물질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유룡 교수는 나노미터 크기의 다공성 탄소물질을 연구하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인 과학자다.
실리카 거푸집으로 다공성 탄소물질 만들어
유 교수가 나노 다공성 물질 연구에 발을 디딘 때는 1993년이다. 한 국제학회에서 나노크기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린 새로운 실리카 물질이 개발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같은 물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당시에도 다공성 물질을 연구했던 유 교수는 다양한 실험 끝에 기존보다 성능이 더 좋은 실리카 물질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연구를 그쳤다면 그는 남이 해놓은 연구를 발전시킨 ‘솜씨 좋은 장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유 교수는 방향을 바꿨다. 실리카가 아니라 탄소로 구성된 물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왜일까. “암모니아 같은 염기성 수용액에 실리카를 넣으면 구조가 금세 깨졌습니다. 내구성에 문제가 있었던 거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리카와 성분이 전혀 다른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탄소를 써보기로 마음먹었죠.”
유 교수가 착안한 새로운 제조법은 기발하다. 그는 우선 나노크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실리카 물질에 설탕물을 부었다. 설탕은 탄수화물의 일종으로 탄소가 다량 들어있다. 열을 가하자 물은 날아가고 설탕에 함유된 탄소만 남았다. 외벽 역할을 하는 실리카는 탄소 구조를 다 만든 뒤 수산화나트륨 용액 안에 넣어 녹여 버렸다.
간단히 말해 나무 틀 안에 콘크리트를 부은 뒤 이를 굳히고 나무 틀을 부순 셈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다. 탄소를 얻기 위해 불을 지피는 족족 설탕물이 끓어 넘쳤다.
고심하던 유 교수는 설탕에 황산을 넣어 보기로 했다. 황산은 탄수화물에서 수분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 예상은 적중했다. “아주 깔끔한 나노 다공성 탄소물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원리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죠.”
유 교수는 이렇게 만든 물질에 ‘CMK’(Carbon Mesostructured by KAIST)라는 이름을 붙였다. KAIST 연구자로서의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는 이름처럼 CMK는 연구단의 대표적인 업적이 됐다. 1999년에 첫 논문을 발표한 이래 유 교수의 CMK 논문들은 지금까지 수천 건 넘게 인용됐다. 요즘에는 세계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논문 제목에 ‘CMK’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쓸 정도로 유 교수팀의 실력은 인정받았다.
연료전지 핵심물질
앞으로 CMK는 어떤 용도로 쓰일까. 유 교수는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촉매를 다량 입힐 수 있을 것”이라며 “연료전지의 핵심물질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화력발전은 석탄이나 석유 연료가 산소와 일으키는 연소 반응에서 발생한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린다. 그러나 연료전지는 수소 연료가 산소와 화학반응을 해 일어나는 전기를 바로 뽑아 쓰는 일종의 발전 장치다. 이때 화학반응을 좀더 효과적으로 일으키려면 촉매를 이용, 반응 수준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해야 한다. 나노 다공성 탄소물질이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연료전지의 정확한 표현은 ‘화학발전기’입니다. 화학발전을 하려면 산소와 수소의 반응 수위를 조절할 백금 촉매가 필요하죠. CMK의 무수한 구멍에 백금입자가 빽빽이 차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절할 수 있는 화학반응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어떤 것보다 효과 좋은 촉매가 탄생할 겁니다. 성능 좋은 연료전지 개발의 실마리가 잡히는 셈이에요.”
연료전지는 이미 군수분야 등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6월 13일에 진수한 국산 잠수함 정지함도 연료전지를 탑재하고 있다. 정지함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3주 동안 잠수한다. 산소를 흡입하러 수시로 떠올라야 하는 북한과 일본의 디젤 잠수함과 달리 적군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적다. 앞으로 연료전지의 쓰임새가 넓어지면 우리 생활도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유 교수가 만든 고성능 촉매가 연료전지 분야에 응용될 경우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유 교수는 이외에도 CMK를 비롯한 나노 다공성 탄소물질의 용도는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핵폐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자를 빨아들이는데 쓸 수 있습니다. 마치 바다의 기름을 빨아들이는 흡착포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죠. 나노 다공성 물질의 넓은 표면적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수소를 저장하는데 쓸 수도 있어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작은 공간에 다량의 수소를 잡아 놓기 위한 유력한 방안인 것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과학기술의 세계를 여는 유 교수. 그는 “사회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연구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 밤에도 그의 연구실에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최고 과학자의 꿈
어린 시절을 묻자 유룡 교수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한 기억을 풀어냈다. “일손이 부족했죠. 일용직 인부를 고용하는 요즘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린이라도 해야 할 몫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초반에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작물을 가꾸는데 방과 후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남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뒤늦게 공부에 시동을 걸고 악착같이 덤볐다. 농사일에서 해방된 게 그 무렵이었다. 수원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틈나는 대로 책을 펴 들었다. 밤이 되면 등잔불 아래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요령이 아니라 우직함과 끈기로 고교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 때문일까. 유행을 좇거나 이름 알리기에 은근히 힘을 쏟는 최근의 일부 연구 흐름이 그는 탐탁지 않다. 유 교수는 1985년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촉매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같은 주제로 벌써 20년이 넘는 연구이력을 쌓은 셈이다. 이 같은 그의 끈질긴 의지가 CMK라는 신물질을 만든 기초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연구를 오래 하면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경향이 있어요. 바뀌어야 할 풍토입니다. 몇 년간 연구하다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자세로는 다른 사람을 뛰어넘는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나노 다공성 탄소물질이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유 교수에게 지난 5월 낭보가 날아든 건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톰슨 사이언티픽 사가 세계수준의 연구영역을 개척한 한국의 과학자 7명 중 한 명으로 유 교수를 선정한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한국 과학기술의 ‘기관차’인 유 교수팀이 내놓을 다음 성과에 벌써부터 눈길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