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 수사반장 호라시오 케인은 살인 현장에서 찐득하고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을 발견했다. 육감적으로 침이 범인을 알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액체를 묻힌 면봉을 투명 봉투에 넣어 검사소로 보냈다. 곧바로 날아든 분석 결과. ‘침 속 뮤신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침의 주인은 A형. 하지만 침이 오염돼 더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으니 침을 더 찾아주기 바란다’. 케인 반장은 곧바로 “팀 스피들, 현장에 담배꽁초가 있나 찾아봐”라고 말했다. “갑자기 담배꽁초는 왜요?”라고 묻는 스피들 대원에게 케인 반장은 “담배 필터에 침이 묻어있어. 그 침으로 범인의 DNA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구석에 반쯤 피다 짓이겨 버린 담배꽁초가 보였다. “빨리 검사소로 보내. 범인을 잡는 건 이제 시간문제군.”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를 본떠 가상으로 꾸민 이야기지만 실제로 침은 범죄 수사의 중요한 단서로 활용된다. 침 속에는 바로 범인의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하루에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을 모으면 1.5L 정도가 된다. 지금까지는 침을 삼키거나 뱉으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침이 건강의 적신호를 알려주는 경보와 같다는 연구가 속속 나오면서 침의 중요성에 관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몸 상태 알려주는 블랙박스
흔히 입 속에 고인 액체를 모두 침샘에서 흘러나온 순수한 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 속 액체는 침, 잇몸 사이에서 빠져나온 혈청, 기도에서 떨어져 나온 세포가 섞인 구강액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엄밀히 구강액은 침과는 다르다(기사에서는 편의상 구강액을 침으로 부른다). 끈적끈적한 침에 섞인 혈청, 세포의 DNA가 몸의 건강상태를 측정하는 열쇠다. 보통 손가락 한마디 양(2ml)의 침에는 35μg(마이크로그램, 1μg=10-6g)의 DNA가 들어있다. 여기에는 세포와 입 속에 사는 미생물, 바이러스의 DNA가 모두 포함돼 있다.
혈청, 세포, DNA는 질병검사를 위한 재료가 된다. 흔히 질병검사는 혈관에서 뽑은 혈액의 단백질과 DNA를 분석해 이뤄진다. 그런데 침에도 혈액 성분 가운데 질병 검사에 쓰이는 단백질과 DNA가 들어있다. 굳이 ‘피를 보면서까지’ 혈관에서 피를 뽑을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고통 없이 손쉽게 질병검사를 할 수 있는 침이 주목받는 이유다.
침은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블랙박스’와 같다. 저녁때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입 속의 침 몇 방울로 자신이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침 속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분비량이 늘기 때문이다.
국립 싱가포르대 의대 데이비드 수키 고 교수는 소방관, 응급구조사 같이 만성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나 시험을 앞둔 학생은 보통사람보다 침 속 코르티솔 농도가 2.5~3배 높다는 사실을 밝혀 지난 4월 ‘직업과 환경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침 속의 호르몬 농도를 검사해 손쉽게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공장 근로자들이 납과 카드뮴 같은 중금속에 중독됐는지, 니코틴의 대사물인 ‘코티닌’을 검출해 청소년들이 흡연을 했는지 여부를 가리는데도 침이 동원된다.
질병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인 사망원인 1위가 암이다. 이 가운데 발견이 늦어 치료가 힘든 구강암을 침으로 진단할 수 있다. 2005년 7월 미국 포사이스 연구소 도나 마거 교수팀은 침 속 DNA를 분석해 입점막암 환자의 80%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침 속 박테리아 3종류를 발견했다. 보통 구강암 환자들은 발병사실을 뒤늦게 알기 때문에 환자의 절반이 완치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마거 박사는 “침 검사만으로 구강암과 관련 있는 박테리아를 발견해 구강암을 조기진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고 밝혔다.
완치가 어렵고 성관계나 수혈로 전염될 위험이 있는 질병인 에이즈도 침으로 알아낼 수 있다.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지역 중?고등학생은 침으로 에이즈 감염검사를 한다. 미국 오라슈어 테크놀로지사는 이 지역에 사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오라퀵 에이즈 항체 키트’를 이용해 에이즈 감염을 조사했다. 이 키트는 임신진단 키트와 원리가 비슷한데, 흡수체에 침을 묻히고 20분 정도 기다리면 가운데 두 줄의 색이 변한다. 침 속 에이즈 항체가 키트 내부의 수용체와 만나 반응하면 줄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원리다. 탄자니아 같이 의료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 침을 이용한 에이즈 감염검사는 매우 유용하다. 에이즈검사 키트의 보급 덕분에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지역의 에이즈 감염률이 연령대별로 조사됐다. 에이즈는 어머니로부터 자식에게 수직전염될 수 있는 질병이다. 따라서 연령대별 감염률을 데이터로 정리해 에이즈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한 셈이다.
또 침은 마약 복용 여부를 현장에서 곧바로 확인하는데도 사용된다. 혈액 속 마약 성분이 침에 섞이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주로 소변을 이용해 검사해왔지만 소변은 범죄자가 바꿔치기할 가능성이 크고 현장에서 범인을 가려낼 수 없어 불편했다. 하지만 침은 현장에서 20분 안에 범죄 유무를 가려낼 수 있는 신속한 수사도구다. 실제로 핀란드에서는 침을 이용해 마약 흡입범을 범죄 현장에서 잡는다.
유전정보 신분증
최근에는 침을 이용해 개인 유전정보까지 얻는 일이 쉬워졌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점만은 아니다. 입 속의 침 몇 방울만으로도 개인의 유전정보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침을 뱉고 다니는 행위는 자신의 신상정보를 세상에 공개하고 다니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현재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는 “인체시료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검사 및 연구기관, 배아연구기관, 유전자은행을 설립할 때 보건복지부에 신고, 등록,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돼있다. 침도 혈액처럼 개인 유전정보를 가진 물질이므로 법적 동의절차 없이 타인에게 함부로 양도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하찮아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침은 이제까지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침의 참기능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침이 오명을 벗고 건강 알림이로 중요한 역할을 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