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 영화 벌써 DVD로 나왔네.”
“어떤 영화?”
“이거 몰라? 두 달 전에 너랑 같이 본 영화잖아.”
“난 그 영화 본 적 없는데? 오빠, 누구랑 이 영화 봤어? 사실대 로 말해.”
“아니, 그게 아니고….”
20대 회사원 A씨. DVD를 고르다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졸지에 바람둥이가 됐다.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하지만 상황은 계속 꼬여만 간다. 분명히 여자친구와 함께 봤던 영화 같은데,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니 답답하기만 하다. 두 달 전의 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A씨는 벌써 치매에 걸린 것일까?
누구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특히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옛날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어떤 사건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어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KBS 2TV의 오락프로그램인 ‘해피투게더 프렌즈’가 인기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인이 학창시절 친구들을 찾으며 추억을 회상한다.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가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산수를 못했는데, 산수 시험시간에 옆 친구에게 “다 풀었으면 나 좀 보여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그런데 커닝해서 쓴 답이 오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답을 보여준 친구에게 적반하장 격으로 “너 공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핀잔을 줬다.
이 같은 친구의 폭로에 노현정은 그날의 사건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저 정말 이상한 애였네요”라고 말했다. 노현정이 아나운서로서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기억이 안 나는 척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의 머리 속에서 ‘기억이 재구성’됐기 때문에 정말로 기억이 안 났던 것일 수 있다.
‘밀랍의 비유’를 넘어서
1960년대 이전에는 기억은 밀랍에 낙인을 찍듯이 인간의 마음에 사건이 각인되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일명 ‘밀랍의 비유’라고 하는 이 관점은 낙인을 찍을 때 얼마나 뚜렷하게 흔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기억이 잘되느냐의 여부가 달려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낙인의 흔적이 사라지듯이 기억도 희미해진다고 봤다.
기억을 ‘저장고’에 저장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었다. 기억을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에 비유한 것이다. 기억해야 할 사건을 복사해 기억 저장고의 일정한 위치에 저장한 뒤 필요할 때 저장고에서 ‘주소’를 찾아 꺼낸다. ‘저장고’ ‘밀랍의 비유’는 사건을 수동적으로 복사해 기억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인지심리학이 발전하면서 기억에 대한 관점이 급격히 변했다. 더 이상 기억은 거울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거나 복사기로 복사하듯이 저장하는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억하는 사람의 지식이나 기분에 따라 원래의 대상과 다르게 저장하고 나중에 기억을 밖으로 꺼낼 때도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즉 기억이 환경과 독립된 ‘캡슐’에 담았다가 일일이 꺼내는 과정이 아니라 ‘세포’처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기억은 얼마나 역동적일까.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가 2002년에 발표한 연구결과를 보자. 로프터스 교수는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 가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벅스 버니’가 디즈니랜드에서 어린이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그 뒤 실험참가자에게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난 기억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것을 주문했다. 참가자 가운데 62%가 벅스 버니와 악수를 했고 45%는 포옹을 했다고 기억했다. 어떤 학생들은 벅스 버니의 귀나 꼬리를 만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벅스 버니에게 당근을 줬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학생도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
참가자들이 아주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래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했던 것일까. 답은 ‘아니다’다. 왜냐하면 벅스 버니는 디즈니의 경쟁사인 워너브라더스의 캐릭터이므로 디즈니랜드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로프터스 교수가 건넨 광고 사진은 가짜였다. 결국 참가자들의 기억도 가짜였다.
흔히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음에서는 외부 환경을 수동적으로 복사한 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자발적으로 재구성해 얼마든지 기억을 생생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기억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면 청문회나 법정에서의 목격자 증언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기억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의 역동적인 특성상 어떤 사람이 아무리 진실하거나 기억력이 좋아도 기억하는 사람이 사건을 재구성할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모든 기억을 진짜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사실 심리학자들은 목격자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좋은 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비서였던 존 딘은 청문회에서 닉슨 대통령과 비서들 간에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진술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보였다. 언론이 그를 ‘인간 녹음기’로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뒤 닉슨과 비서들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되자 사정은 바뀌었다.
정보를 왜곡시켜 기억하는 이유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율릭 나이서 교수는 1981년 존 딘의 증언과 실제 녹음내용을 비교한 결과 증언에는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음을 발견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보다는 증언자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처럼 자기 위주로 내용을 각색했던 것이다. 나이서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인간의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된다고 해석했다.
국내에서도 2008년부터 피고인이 원하면 배심원제를 채택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단 기억은 당사자에 의해 재구성되거나 왜곡되는 특성이 있으므로 목격자 증언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할 때 왜곡된 정보에 쉽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재판 당사자의 삶과 사회정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지 못할 기억은 무시해야 할까. 현재 기억 연구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미국 워싱턴대 헨리 로디거 교수는 “기억의 역동성은 단순히 실수나 왜곡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만약 기억이 상황을 그대로 복사하는 수준에서 멈춘다면 새롭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수많은 기억 항목 가운데 딱 맞는 것을 일일이 찾아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대신 우리는 정보를 왜곡시켜 저장하고 현재 필요한 방식으로 변형시켜 기억 요소를 꺼낸다. 이 때문에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특정 상황에 맞는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로디거 교수의 주장이다.
기억은 100% 신뢰할 것은 못되지만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럭저럭 환경에 적응하며 잘 살 수 있으니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믿지 못할 기억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