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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시계, 지상에 구현한 하늘 모습

1만원 신권 속 이야기

지난 1월말 전통천문학에 관련된 유물을 새겨 넣은 새로운 1만원권이 발행됐다. 전통 별자리를 돌에 새긴‘천상열차분야지도’(하늘의 모습을 12개의 부분으로 나눠 그린 그림)가 은은한 배경을 이루고 여기에 국보 230호인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과 보현산 천문대 1.8m 광학망원경이 들어가 있다. 한국 천문학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민족의 과학성을 기리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도안에 사용된 혼천시계와 관련해 작은 논란이 있었다. 먼저 혼천의가 중국 유산이므로 우리 지폐도안에 쓰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이는 설득력이 없다. 그런 논리라면 보현산 천문대의 망원경도 서양에서 발명된 기구이므로 한국과학을 상징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해야 한다. 어디에서 유래했건 우리 선조가 천문기구를 사용해 이뤄놓은 과학활동이 중요한 것이다.

혼천의 부분만 따로 떼어놓아 시계장치까지 결합된 원래 혼천시계가 의미를 상실했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 또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혼천시계는 혼천의로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완전하게 구현하고 시계로 하늘의 시간을 정확히 나타내자는데 의미가 있다. 지폐는 어떤 유물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사진집이 아니다.

상징적인 도안을 통해 지폐를 사용하는 이들이 함께 어떤 가치를 기억하자는 뜻이다.
혼천의는 원래 관측기구로서의 과학성,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구현하는 상징물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혼천의만으로도 한국의 과학정신을 상징하는데 손색이 없다.
 

송나라 때 소송이 만든 혼천시계‘수운의상대’를 축소해 복원한 모습. 내부에 복잡한 기계장치가 들어 있으며 목각 인형이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둥근 하늘 닮은 관측기구
 

관측용 혼천의. 환(고리)의 구조가 간단해 천체를 관측 하기에 알맞다.


혼천의는 육안 관측을 주로 했던 전통천문학에서 가장 상징적인 관측기구였다. 천구 적도상으로 천체의 거리를 구하기 위해서 적도면을, 상하의 경도를 관측하기 위해 경도면을, 그리고 지평상의 거리를 재기 위해 지평면을 만들면세개의 둥근 고리가 겹쳐진 모양이 된다.

이것이 ‘둥근 하늘’(渾天)의 모양을 닮았다고 혼천의(渾天儀)라고 불렀다. 여기에 망통(望筒, 보는 대롱)을 설치하면 다양하게 천체 위치를 관측할수있는 훌륭한 기구가 된다.

혼천의는 중국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용돼왔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기록상 가장 유명한 혼천의는 중국 후한시대의 장형(張衡, 78~139)이 만든 것이다. 혼천의에는 경우에 따라 태양이지나는길인황도면이나, 달이 지나는 백도면을 설치해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나라 때는 이슬람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지평면이나 적도면, 또는수직경도면을나타내는환(고리)에 망통을 설치한 간단한 간의(簡儀)를 만들어 관측에 사용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독보적인 관측기구로 대접받던 혼천의는 관측기구로서의 중요성이 크게 줄었다.

제왕이 원하는 관상용 혼천의는?

대신 혼천의가 하늘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는 상징물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적도환, 황도환, 백도환 등에서 별자리 천구가 회전하는 모습이나 태양과 달이 궤도를 따라 회전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수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시대 이전부터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관상용 혼천의가 많이 제작됐다.

동아시아에서는 천문학이 제왕의 학문으로, 제왕은 하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사람으로 각각 인식됐다. 이 때문에 제왕들은 혼천의를 만들어 관측을 하고 또 혼천의의 모습을 통해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구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만일 관상용 혼천의의각환이 천체의 운행속도에 맞춰 회전한다면 하늘의 모습을 제대로 구현한다고 인정받을 것이다. 천문학이 발달해 천체의 운행원리가 알려지면서 시계장치와 결합된 혼천의가 만들어진 이유다.

특히송나라때소송이란사람이만든‘수운의상대’는물시계로 시간을 나타내고 이 시간에 따라 혼천의의 환이 돌아가면서 천체의 운행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고안품이었다.

기계장치를 돌리는 동력은 물레방아를 이용했기 때문에 물로 움직이는 천문대라는 의미에서‘수운의상대’라고 불렀다. 높이가 약 12m인 3층 구조로 맨 아래층에는 시간을 알리는 시보장치와 동력기구를, 가운데층에는 별자리 천구를, 그리고 맨 위층에는 혼천의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원나라때이후 혼천의와 시계장치가 결합된 혼천시계가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대신 혼천시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한 이들은 조선인들이었다.

물시계에서 자명종까지 결합

세종 때의 자격루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측정된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장치가 결합된 자동 물시계였다. 시계와 함께 작동하는 혼천의를구현하려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물시계, 이 신호를 혼천의의 회전으로 바꿔주는 기계장치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물의 양은 경과시간이 되고 이는 다시 혼천의에서 천체가 회전하는 각도로나타난다.

세종때제작된‘수운혼천’이라는, 물시계와 함께 움직이는 혼천의는 자격루의 물시계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혼천시계에서는 태양모형을 황도환에 매달아 태양이 황도를 따라 도는 모습을 제대로 구현해냈다.

조선 중기부터는 혼천시계를 만드는 기술이 더욱 발전해 독특한 조선식 혼천시계가 제작됐다. 현종때(1657년) 최유지(崔攸之, 1603~1763)는 세종 때의 혼천시계를 모델로 해 역시 물의 힘으로 회전하는 혼천시계를 만들었다. 특히 최유지는 톱니바퀴를 부착해 톱니의 이빨 개수에 따라 별자리 천구, 태양, 달이 각자 다른 속도로 움직이도록 했다. 또한 달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바뀌는 위상변화까지 자동으로 구현했다.

조선의 혼천시계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천원지방’의 관념에 따라 혼천의 중심부에 네모지게 평평한 땅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혼천시계에서 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고안이었다. 최유지 또한 혼천의의 중심부에 네모진 땅을 만들어 넣었다.

17세기 중반까지도 조선에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상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최유지의 혼천시계는 1669년 이민철에 의해 더욱 발전됐다. 최유지의 혼천의가 톱니바퀴로 천체운행 속도를 구현하는 원리를 갖추고 있었지만 대나무로 제작돼 많은 오차를냈다. 이민철은 세종 때의 자격루에서 사용된 적이 있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덧붙였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신호를 만들고 이것이 시간표시장치를 건드려 자동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원리다. 또한 톱니바퀴를 이용해 별자리 천구, 태양, 달이 각자 운행속도에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게 했다. 한 달을 주기로 변하는 달의 위상도 자동으로 보여줬다. 혼천의의 중앙에는 평평한 땅을 그린 그림을 놓아 전체 우주의 모습을 구현했다.

이민철이 물로 움직이는 혼천시계를 만든 해에 송이영도 시계장치와 혼천의가 결합된 혼천시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이전까지의 혼천시계와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었다. 시계장치가 전통적인 물시계가 아니라 서양의 자명종이라는 사실이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계 시계가 전통적인 유산인 혼천의와 결합해 새로운 혼천시계로 탄생한 것이다.

현재 고려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혼천시계는 서양의 자명종식 기계시계와 전통의 혼천의가 결합된 모습이다. 이런 방식의 혼천시계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것으로 조선만의 독특한 혼천시계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그 모습이 송이영이 만들었다는 혼천시계에 대한 기록에도 잘 부합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은 동서양의 전통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과학활동을 상징하는 유물로 꼽히며 국보 230호로 지정돼있다.

국보 230호의 비밀 셋
 

국보 230호로 지정된 혼천시계를 완벽하게 복원한 모습. 왼쪽이 별자리 천구, 해, 달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혼천의이고, 오른쪽 나무상자가 자명종 방식으로 작동하는 시계 부분이다. 나무상자 중간에 유시(酉時, 오후 5~7시)를 뜻하는 글자판이 보인다.


국보 230호로 지정된 혼천시계를 완벽하게 복원한 모습. 왼쪽이 별자리 천구, 해, 달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혼천의이고, 오른쪽 나무상자가 자명종 방식으로 작동하는 시계 부분이다. 나무상자 중간에 유시(酉時, 오후 5~7시)를 뜻하는 글자판이 보인다.

그러나 이 천문시계가 정말로 1669년에 송이영이 만든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 시계에 장착된 진자장치가 문제다. 시계에 진자장치를 처음 구현한 사람은 1657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호이겐스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진자장치가 부착된 시계가 서양에서 널리 사용된 때는 1670년대부터였다. 그런데 국보 230호 혼천시계가 1669년에 제작됐다면 최초의 진자 시계가 서양에서 나온지 12년 만에 조선에서 진자시계가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너무 빠르다.

물론 찬성론자들은 당시 네덜란드 상선의 활동으로 동서양의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였기에 상선을 통해 진자가 들어간 최신 시계가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졌고 이것이 조선에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을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최신 시계가 조선에 실제 들어 왔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왕명으로 만들어진 혼천의의 중앙에 둥근 지구의가 장착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구설(땅이 공처럼 둥글다는 견해)이 이미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는 의미로볼수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제작된 이민철의 혼천시계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사회에는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아직도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천의의 내부에 지구의를 만들어 장착할 수 있었을까. 홍대용이 1760년대에 쓴‘의산문답’에서 지구설을 믿지 못하는 조선사람들에게 지구설이 옳다는 점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것만 봐도 18세기 후반에 조차도 지구설은 그리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가 아닌 것이다.

또 최근에는 혼천시계 안의 지구의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19세기에야 알려진 오세아니아주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찬성론자들은 원래 1669년에 만들어진 혼천시계에는 지구의가 없었는데, 지구의와 오세아니아주는 나중에 혼천 시계를 수리·보수하면서 새로 보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새로운 문제점을 하나 제기하고 싶다. 청나라는 1645년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천문관서를 맡겨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은 1654년(효종 5년)부터 시헌력을 사용했다. 시헌력은 그전에 쓰인 조선의 칠정산이나 중국 명나라의 대통력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적도면을 나타내는 둥근 원주에 눈금을 새길 때 시헌력에서는 서양천문학의 방식을 따라 전체를 360°로 나눠 새기고, 칠정산이나 대통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전체를 365¼도로새겼다. 따라서360°눈금이 새겨져 있다면 서양천문학에 기초한 관측 기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국보230호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에 360°눈금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시헌력을 사용하던 시기였으니까 당연한 게 아닐까. 그러나 공교롭게도 혼천시계가 제작됐다는 1669년은 시헌력이 아닌 대통력을 사용하던 때였다. 청나라에서는 황제가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을 사용했다가 중국 전통을 지지하는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쳤고 급기야 1666년 서양에 우호적인 중국 관리들은 모조리 실각하고 대통력을 신봉하는 보수파가 집권했다.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1667, 1668, 1669년 3년 동안 대통력 체계에 맞춰 달력을 만들고 천문관측을했다. 조선은병자호란때청나라에 항복한 속국이었으므로 청나라의 달력에 따라 이 3년간 대통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 1669년이 송이영이 혼천시계를 만들었다고 하는 해다.

그렇다면 국가의 공인으로 제작된 혼천시계에는 360°눈금 대신에 365¼도 눈금이 새겨져 있어야 하는게당연하다. 혼천시계에 새겨진 각도 눈금을 보면 국보230호 혼천시계는 송이영이 1669년에 만든 혼천시계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지난 1월말 발행된 1만원 신권에는 국보 230호 혼천시계의 혼천의 부분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다. 배경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일부와 보현산 천문대 1.8m 망원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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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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