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ABC를 알면 꽃이 보인다

꽃은 잎이 변형된 기관


꽃은 잎이 변형된 기관


“유감스런 말이지만 생물학은 엄밀한 과학이 아니다. 화학이나 물리학과는 달리 생물학에는 간단한 규칙이 별로 없으며 법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 윌리엄 버거는 그의 책‘꽃: 꽃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나’의 첫 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생명체란 그 다양함이 본질이라는 것을 생각해볼때핵심을 찌른 표현이다.

그러나 저마나 개성을 뽐내는 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의 구조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이라는 네가지 기본 구조로 이뤄져 있다.

네겹의 아름다움


정상적인 구조를 지닌 애기장대(01). 애기장대에서 A유전자가 망가지면 C유전자만 발현돼 암술과 수술로만 이뤄진 꽃이 나타난다(02). B유전자가 손실되면 꽃받침과 암술로만 이뤄진 꽃이(03), C유전자가 없으면 꽃잎과 꽃받침이 반복되는 형태가 생긴다(04).


꽃을 펼쳐놓고 위에서 보면 네겹의 동심원을 그릴 수 있는데, 바깥쪽에서부터 각각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의 순서로 그 위치를 차지한다. 꽃봉오리를 보호하는 기관인 꽃받침이 맨 바깥에 있고, 안쪽으로 가장 눈에 띄는 꽃잎이 향기를 내뿜으며 곤충을 끌어들 인다. 그 안쪽의 수술은 꽃가루를 만들고, 맨 가운데 암술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씨방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식물은 어떻게 이처럼 역할이 뚜렷한 네겹의 기관을 만들어 꽃이라는 멋진 작품을 탄생시켰을까. 식물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이 궁금증은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도움으로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해답을 얻었다.‘ ABC 모델’또는 이를 보완한‘ABCE 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동물에 기형이 있듯이 식물도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때로 이상한 형태의 식물체가 자라기도 한다. 그 가운데는 잎과 줄기는 멀쩡하지만 기형 꽃이 피어나는 것들도 있다. 암술이 맨 바깥 동심원을 차지하는가 하면 꽃잎이 없는 꽃이 나오기도 한다.

1990년대 이런 비정상적인 꽃구조를 보이는 식물들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수많은 결과를 분석하던 중‘ABC 모델’이라는 기발한 착상을 떠올렸다. 즉 네겹 가운데 바깥쪽 두겹은 A유전자가, 중간의 두겹은 B유전자가, 안쪽의 두겹은 C유전자가 관여한다고 가정하자 미스터리로 보였던 꽃구조를 명쾌히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르면 맨 바깥층은 A유전자만 관여해 꽃받침이 만들어진다. 두 번째는 A와 B유전자가 작용해 꽃잎이 된다. 세 번째는 B와C유전자로 수술이, 네 번째 가장 안쪽은 C유전자에 의해 암술이 형성된다. 또 하나의 가정은 A유전자와 C유전자는 라이벌 관계로 한쪽이 없어질 경우 나머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B유전자가 망가질 경우 그 꽃은 꽃받침-꽃받침-암술-암술의 순서를 보여야 한다.

즉 꽃잎과 수술이 없는 꽃이 핀다. A유전자가 없다면 암술-수술-수술-암술로 된 꽃이 만들어질 것이다. 바깥쪽 A유전자의 자리까지 C유전자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델식물인 애기장대의 경우 AP3이라는 B유전자가 결손된 돌연변이체의 꽃은 꽃잎과 수술이 없는 꽃이, AP2라는 A유전자가 망가진 경우는 꽃받침과 꽃잎이 사라진 꽃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안쪽 두 층을 맡고 있는 C유전자가 없는 돌연변이체의 꽃은 어떤 모양일까. 모형에 따르면 꽃받침-꽃잎-꽃잎-꽃받침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순서가 계속 반복된 구조의 꽃이 피어난다. C유전자가 다른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애기장대의 원래 꽃을 놓고 각각의 돌연변이체들을 비교해보면 유전자 한두 개의 차이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는지 알 수 있다.

그 뒤 과학자들은 E유전자를 발견했는데, 이 유전자가 없을 경우 A, B, C유전자가 정상적으로 있어도 제대로 된 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결과를 반영해‘ABC 모델’은‘ABCE 모델’로개정됐다. 최근에는 이들 유전자가 만들어낸 단백질 4분자가 짝을 이뤄야만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를‘4분자 모델’이라고 부른다.

즉 맨바깥쪽의 꽃받침은 A단백질 2개, E단백질 2개가 복합체를 이뤄 작용한 결과다. 꽃잎은 A단백질 1개, E단백질 1개, B단백질 2개가 팀워크를 이룬 복합체의 작품이다. 수술은 C단백질 1개, E단백질 1개, B단백질 2개의 복합체, 암술은 C단백질 2개, E단백질 2개의 복합체가 만든 결과다.

이런 패턴은 애기장대 뿐 아니라 금어초, 튤립, 패튜니아, 앵초 등에서도 보이며, 벼나 옥수수 같은 외떡잎식물의 꽃에서도 존재한다고 밝혀졌다. 겹겹의 꽃잎이 풍성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장미꽃도 ABCE유전자의 균형이 깨진 돌연변이체를 육종을 통해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야생의 장미는불과다섯장의 한겹짜리 꽃잎만 갖고 있다.


‘꽃의 여왕’으로 불리는 장미는 사실 야생장미의 돌연변이체다.


괴테는 탁월한 식물학자


괴테가 1790년 펴낸‘식물 변태론’. 괴테는 꽃이 잎이 변형돼 만들어진 기관이라는 선견지명을 가졌다.


위대한 시인이기보다는 뛰어난 과학자로 불리기를 바랐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41세 때인 1790년에는‘식물 변태론’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괴테는“줄기에서 잎으로 확장해 매우 다양한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된 바로 이 기관이 꽃받침에서 수축했다가 꽃잎에서 다시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열매로 확장하기 위해 생식기
관(수술과 암술)에서 다시 수축한다”고 쓰고 있다.

즉 꽃을 이루는 기관은 잎이 변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으로 그의 생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괴테가 남긴 글을 보면 당시 독일 문학계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던 작가 실러에게 펜으로 스케치를 해가며 식물의 변태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다가“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라는 실러의 냉담한 대답을 듣고 실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꽃구조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괴테의 가설을 검증해볼 수 있게됐다. ABC 유전자 모두가 망가질 경우 어떻게 생긴 꽃이 피어날까. 또 E유전자가 없을 경우는 어떨까.

즉 네 가지 꽃 기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조건에서의 결과는 어떨까. 놀랍게도 이들 모두 전체적인 모습은 꽃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개별 기관은 모두 잎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잎처럼 생긴 구조가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을 대신한 것이다.

괴테가‘식물 변태론’을 출간한 지 200년이 지나서 마침내 그의 주장이‘하나의 관념이 아니라경험’임이 입증된 셈이다.

ABCE 모델


ABCE 모델


꽃받침과 꽃잎은 A유전자가, 꽃잎과 수술은 B유전자가, 수술과 암술은 C유전자가 관여해 꽃을 형성한다.

또 E유전자가 있어야 제대로 된 꽃이 만들어진다. 이들 유전자가 만들어낸 단백질 4분자가 짝을 이뤄야 하므로‘4분자 모델’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박사과정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화학·화학공학
  • 농업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