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용도를 다한 플라스틱은 곧장 쓰레기로 변해 소각되거나 방치된다. 그러나 폐플라스틱은 그 원료가 기름이듯 이를 잘 이용하면 다시 석유로 되돌릴 수 있다. 그동안 쓰레기로만 인식됐던 폐플라스틱이 어떻게 기름으로 탈바꿈하는지 알아보자.
플라스틱의 출현은 채 1백년이 못되지만 인류 역사에서 산업 발전과 생활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물질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플라스틱은 일상 생활이나 산업분야 모두에 밀접히 연관돼 있어, 플라스틱 제품을 이용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유용하게 이용된 플라스틱은 폐기물이라는 이름 하에 쓰레기통을 거쳐 폐기물 처리장으로 밀려난다.
덩어리 기름 폐플라스틱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플라스틱은 대표적 고분자물질로 주원료는 석유다. 즉 원유를 증류해 생산되는 납사로부터 합성수지라는 중간원료를 만들고, 다시 합성수지는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등을 생산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폐기물을 자원으로 재활용하려는 과학자에게 폐플라스틱은 결코 혐오스러운 폐기물이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유용한 자원이다. 특히 에너지 관점에서 보면 폐플라스틱은 ‘덩어리 기름’에 다름 아니다. 보통 폐플라스틱 1백t을 재활용시킬 경우 경유와 휘발유가 약 80t 가량 생산된다. 즉 1백g 가량의 페트병 10개을 모으면 약 1L의 석유를 뽑을 수 있다는 말이다.
폐플라스틱의 재활용은 일반적으로 ‘물질 재활용’(material recycling)과 ‘에너지 재활용’(thermal recycling), 그리고 ‘화학 재활용’(chemical recycling)으로 구분한다.
물질 재활용 기술은 폐플라스틱의 물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이를 다른 플라스틱 제품의 원료로 만드는 기술로, 가장 바람직한 환경친화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렇게 재활용된 폐플라스틱은 순도와 색상, 물성 등의 품질에서 새 원료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폐플라스틱을 다시 원료로 만드는 재활용 비용이 만만치 않아 경제성이 떨어지며, 설령 재활용 제품을 만들었다 해도 이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때문에 이를 찾는 소비자가 많지 않은 현실이다.
에너지 재활용은 일반 폐기물과 함께 폐플라스틱을 직접 연소시켜 이때 발생되는 열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소각시킬 때 나오는 열을 난방열로 재활용하는 소각기술과 ‘고체연료’(RDF, Refuse Drived Fuel) 기술이 있다. 쓰레기고형화연료 또는 폐기물재생연료라고도 하는 RDF는 폐기물에서 재활용물질을 골라내고 금속이나 유리 같은 불에 타지 않는 물질을 제거한 뒤 종이·목재·플라스틱 같은 가연성 물질을 잘게 부수고 압축해 적당한 크기로 만든 연료를 말한다. 폐기물을 압축해 숯같은 연료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리는 간단하나 공정은 난해
이에 비해 화학적 재활용 기술이란 폐플라스틱에 화학적 변화를 줘 다른 물질로 전환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대부분의 폐플라스틱 재활용에 이용되는 기술이다. 플라스틱은 화학적 변화(화학 반응)를 거치면 플라스틱의 원래 물성을 잃고 플라스틱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로 변한다.
화학적 재활용 기술의 대표적 예는 열분해 반응이다. 주변의 폐플라스틱은 폐기되는 과정에서 성질이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되거나 다른 폐기물에 의해 오염되기 때문에 처음 상태의 순수한 플라스틱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폐플라스틱은 열분해 반응을 통해 재활용한다.
플라스틱은 화학반응에 의해 수십개의 작은 분자를 연결해 만든 물질이다. 이 과정을 고분자화(polymerization) 반응이라 한다. 고분자를 무산소 상태에서(환원성 환경) 가열하면 고분자의 탄소사슬이 끊어지는 분해 반응이 일어나 분자량이 작은 여러개의 분자로 나뉘는데, 이런 일련의 현상을 열분해 반응이라 한다. 열분해 반응은 연소반응(산소와의 결합반응, 발열반응)과는 달리 흡열반응이므로 외부에서 열에너지가 공급돼야 하고 산소가 없는 환원성 환경이라야 한다.
폐플라스틱을 열분해 반응로에 넣고 반응시키면 휘발유, 등유, 경유와 같은 기름이 생산된다. 기름 이외에도 수소와 메탄, 에틸렌 등으로 구성되는 가연성 가스와 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고체 잔류물도 생산된다. 지난 1월 필자의 연구팀은 재활용업체인 (주)한국로코코와 공동연구를 통해, 플라스틱 쓰레기에서 재생 석유를 뽑아내는 자동화 공정을 개발했다. 현재 한국로코코 공장에서는 PVC, 비닐, 스티로품 등이 섞인 플라스틱 혼합쓰레기를 녹여 휘발유와 경유 등 재생연료를 매일 5t 가량 생산할 수 있다.
폐플라스틱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원리는 간단하다. 석유로 만든 플라스틱을 다시 석유로 되돌리는 것이다. 가정과 공장에서 버린 각종 플라스틱을 잘게 부숴 반응로(열분해 설비)에서 녹인 뒤 냉각하면 검은 빛깔의 혼합유와 가연성가스(LPG)가 나온다. 이 혼합유를 정제하면 휘발유와 경유가 된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이고 안전한 기술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는 열에 녹은 플라스틱이 반응로 벽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공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플라스틱이 녹을 때 생긴 탄소 찌꺼기가 관을 틀어막기 일쑤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공장을 하루 이틀 돌린 뒤에는 사흘씩 쉬면서 설비를 점검하고 청소해야 한다. 또한 모든 공정을 자동화해야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경제성이 확보되지만, 종래의 기술로는 자동화를 이루기 힘들다. 하지만 최근에 개발된 공정 덕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중간물질을 재활용하라
열분해 공정은 크게 전처리 공정과 열분해 공정으로 나뉜다. 전처리 공정은 원료인 혼합 폐플라스틱에서 열분해에 부적합한 철, 알루미늄, 구
리 등의 금속과 흙이나 모래, 유리 등의 무기물, 그리고 음식쓰레기, 종이, 나무 등의 바이오 매스를 분리하고 공정으로 공급하기에 좋도록 가공하는 단계다. 선별 방법은 각 불순물들이 갖는 물리·화학적 특성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철과 알미늄, 구리 등의 금속성분의 분리에는 이들이 자력을 띠는 원리를 응용해 전자석을 이용한 자력선별기(magnetic separator) 등이 쓰이며 유리, 흙, 모래 등은 바람을 이용한 풍력선별을 사용한다. 이렇게 선별된 폐플라스틱은 열분해의 반응로에 투입된다.
열분해 공정은 가열장치가 달린 반응기에 원료를 넣고 반응시켜 발생되는 오일증기를 응축시키는 것으로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플랜트 규모가 커지면 그렇지 않다. 원료를 투입할 때 플랜트 내부에 있는 가스가 누출되면 환경이 오염될 뿐더러 공기가 반응기 내부로 유입되면 폭발사고의 위험이 따른다. 또한 플라스틱 중에는 PVC가 들어있어 가열하면 유독한 염산가스가 발생한다. 따라서 플라스틱을 녹이는 과정에서 염산가스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
PVC는 3백℃ 전후에서 녹는다. 자동화 공정에서는 이 점을 이용해 폐플라스틱을 두단계로 나눠 녹인다. 즉 반응기를 먼저 3백℃ 정도로 가열시켜 이때 발생되는 유독한 염산가스를 일차적으로 제거한다. 다음은 4백-4백50℃의 온도에서 나머지 원료를 완전히 녹인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잔류물의 생성량이 증가하고 이때 생성된 잔류물은 반응기 내벽에 달라붙어 운전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염산가스를 제거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이 녹으면 껌이나 엿기름 같이 끈적끈적한 점도가 매우 높은 물질로 변한다. 이들이 식으면 다시 굳어버리기 때문에 파이프 내벽에 붙기 십상이다. 따라서 파이프 라인을 따라 각 공정을 이동하는 원료는 항상 고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점도·고온의 플라스틱을 펌프로 이송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고, 플랜트 자동화를 위해 반응기 내 액체의 양이나 파이프를 흐르는 유량 측정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필자의 연구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간물질 재순환’이라는 공정을 개발했다(그림). 1차 용융을 거친 폐플라스틱은 ‘관형 반응기’라는 기다란 파이프 라인을 거쳐 석유를 생산하기 위한 본격적인 화학 반응을 한다. 높은 온도와 적절한 용매를 첨가해 기름을 추출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기름의 원료인 액상 플라스틱과 소량의 가연성 가스와 탄소 잔류물(코크)이 만들어진다. 이때 코크는 코크 분리기를 통해 제거한다. 중간물질 재순환 공정이란 관형 반응기를 통과한 중간물질을 다시 이용해 공정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즉 높은 온도의 가연성 가스와 액상 플라스틱 일부를 다시 관형 반응기 시작 지점으로 되돌리는 방법이다.
관형 반응기로 투입되는 원료는 점도가 매우 높아 이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를 관형 반응기 내부로 밀어 넣으려면 많은 에너지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형 반응기를 빠져나온 중간물질을 여기에 혼합하면 점도가 떨어지면서 이동성이 좋아진다. 고분자 물질은 분자량이 적을수록 점도가 떨어지는데, 중간물질은 관형 반응기를 거치면서 저분자 물질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간물질은 매우 높은 온도의 가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원료와 중간물질을 혼합하면 이를 녹이기 위한 열량도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렇게 열분해 반응을 거친 액상 플라스틱은 감압 증류탑으로 이동해 녹는점에 따라 휘발유와 등유, 경유 등으로 분별 정제된다.
국내 실정에 맞는 우리만의 기술
폐플라스틱의 유화 기술은 국내의 경우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이 때는 대부분 폐플라스틱 유화 플랜트를 국내에 보급하려는 중소기업체가 주축이 돼, 중국과 일본, 유럽 등의 기술을 도입 이용했다. 그러나 도입된 기술이 대부분 저급 기술로서 국내 실정에 맞지 않거나 실증되지 않은 기술들이어서 그동안 보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기술개발은 과학기술부의 21C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으로 상용플랜트를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현재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으로 추진되는 상용플랜트의 개발이 원만히 진행되고 있고, 정부에서도 폐플라스틱의 처리와 재활용을 위한 기술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곧 상업화가 가시화될 전망이다.
특히 2003년부터는 생산자책임 재활용제도(EPR)의 법률이 제정돼 실시된다. 따라서 폐플라스틱의 재활용 기술은 향후 매우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더욱이 폐플라스틱의 처리 문제는 국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관련 기술의 해외진출도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