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SBS 수목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시청률이 하늘을 찌른다. 인기 배우의 출연, 전문성이 돋보이는 대사 등 이유는 많다. 그러나 ‘채널고정’의 가장 큰 원동력은 1년차 레지던트 봉달희(이요원 분)의 좌충우돌이다.
봉달희가 저지른 실수중압권은 날고구마를 먹어서는 안되는 환자에게 한가득 날고구마를 가져다 준 2회 방영분이다. 시청자가 “에이, 설마 저런 의사가 있겠어?”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당혹스러운 행동이었다. 결국 날고구마를 잔뜩 먹은 환자는 식도 출혈로 수술 시기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식도 출혈을 일으킨 환자가 ‘12세의 간암 말기소년’이라는 설정이다. 간암은 이 나이에 여간해서 걸리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시면 간암에 걸린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더욱 배치된다.
“암에 걸릴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어느날 암 선고를 받는 일은 흔합니다. 유전적 문제가 중요한 요인 중 하나죠. DNA 복제과정을 탐구하면 몸에서 생기는 여러 병을 예방할 수 있어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 서연수 교수는 세포내DNA 복제를 연구하고 있다. 1998년부터 세포분열조절단백질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서 교수는 현재 DNA 복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효소의 기능을 밝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손’ 맞잡기 위한 묘수
DNA 분자는 염기서열 2개가 꽈배기처럼 꼬인 이중나선 형태다. 이 두가닥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풀리며 복제가 일어난다.
주목할 점은 DNA 복제는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는데, 이때 풀린 한 가닥과 새로 생기는 한 가닥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라붙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일렬종대로 움직일 때, 이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만나면 쉽게 손을 맞잡을 수 있지만 같은 방향으로 만나면 손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 쉽게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생성되는 DNA가닥을 ‘선도가닥’(leading strand)이라고 한다.
문제는 ‘지연가닥’(lagging strand)이라 불리는 나머지 한 가닥이다. DNA 복제는 항상 선도가닥과 같은 방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지연가닥은 ‘손’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생명체가 고안한 해결책이 ‘오카자키 조각’이다. 짧은 DNA 조각인 오카자키 조각을 여러 개 만들어 이를 조금씩 이어 붙이면 된다.
이를테면 일렬종대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사람 몇 명이 갑자기 몸통을 180°틀어 손을 잡는 식이다. 이런 회전이 몇 번 일어나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
그런데 오카자키 조각이 결합할 때에는 반드시 ‘RNA 프라이머’라는 결합 장애물이 사라져야 한다. 오카자키 조각 꼬리에 달린 RNA 프라이머는 오카자키 조각을 만드는 시발점 구실을하지만 복제를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돼야 한다. 이 때문에 생물체는 RNA 프라이머를 잘라내는 효소를 분비한다.
연구단은 이 효소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구결과 진핵생물인 효모에서는 박테리아에서 관찰된 RNA 프라이머 제거 효소를 없애도 세포가 살아남았던 것. 박테리아는 DNA 복제 연구에 널리 쓰이는 원핵생물이다.
연구단은 진핵생물에는 박테리아를 통해 그 동안 알려진 효소 외에 RNA 프라이머를 제거하는 다른 효소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는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진핵생물에는 효모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헌팅턴 병 예방 길 열려
연구단이 주목한 효소는 ‘Dna2’다. Dna2는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주디 캠벌 교수가 처음 찾아냈다. 캠벌 교수는 “Dna2는 DNA가 복제를 시작할 때 이중나선 구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Dna2는 연구단의 활동방향에 커다란 변수가 못 된다.
그러나 연구단이 Dna2의 기능을 꾸준히 분석한 결과 Dna2가 이중나선 구조를 풀 뿐만 아니라 RNA 프라이머를 잘라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기서 RNA 프라이머를 잘라내는 과정은 지연가닥의 마지막 단계다. 따라서 Dna2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DNA 복제가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2001년 연구단이 이 내용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하자 관련 학계에 큰 반향이 일었다. 캠벌 교수가 단순히 이중나선 구조를 풀어주는 도구라고 봤던 Dna2가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확산된 것. 결국 연구단의 논문은 세계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Dna2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Dna2가 복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열쇠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각종 유전병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에도 가속이 붙었다. 서교수는 “헌팅턴 병처럼 기존 방법으로는 손을 쓸 수 없던 유전병을 원인부터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을것”이라며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유전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팅턴 병에 걸리면 40세를 전후해 본인 의사와는 상관 없이 근육이 움직이는 ‘무도병’(Chorea)이 생긴다. 이 병에 걸리면 평균 18년 뒤 사망하고 살아있는 동안 삶의 질은 극히 떨어진다.
연구단은 Dna2가 오카자키 조각의 RNA 프라이머를 제거하지 못하면 헌팅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Dna2의 메커니즘을 조절하는 약물을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유전병도 ‘운명’이 아니라 막을 수 있는 질병이 된다는 얘기다.
서 교수는 인터뷰 내내 “우리 연구내용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며 설명에 진땀을 뺐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까지의 연구결과가 유전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예방법을 개발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될 것”이라며 “이것이 연구자의 보람아니겠느냐”고 활짝 웃었다.
DNA‘ 연구 사관학교’ 만든다
서연수 교수는 DNA 복제연구의 세계적 대가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 고도로 훈련된 연구원들이 전문분야가 아닌 다른 곳에 취직해야하는 문제다. 국내 바이오업체에는 연구내용을 100% 살릴 만한 곳이 없는 탓이다. 서 교수는 이를 보다 못해 최근 바이오 업체 설립에 나섰다.
“우리의 연구 노하우를 활용하면 DNA 연구실험실에 효소를 공급하는 회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분야 전문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우수한 연구원들이 학교 밖에서도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서 교수는 국내 기업가들과 구체적인 회사 설립 계획을 짜고 있다. 올해 안에 이 같은 작업을 마친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머지않아 경쟁력 있는 제품이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그는 내심 걱정도 된단다.“
업체를 기반으로 삼다 보면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해야 하는 기초연구의 기회가 줄어들 수 있겠죠. 과학연구의 성격상 좋기만 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지난 9년간 국가에서 지원을 받은만큼 이젠 자립을 해야 할 때죠. 더 좋은 연구를 위해 다양한 방향에서 노력할 생각이에요.”
서 교수는 현재 설립을 추진 중인 바이오업체에서 부작용이 적은 항암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Dna2는 주로 암세포처럼 활발히 분열 중인 세포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무력화하는 항암제를 쓰면 정상적인 인체 부위가 항암제의 독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기존 항암제 대부분은 아직 분열하지 않은 세포의 DNA까지 공격하는 탓에 정상세포까지 영향을 받는다. 항암치료 뒤 구토를 하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다. 연구가 상용화되면 부작용을 100% 없앨 수는 없지만 문제가 크게 완화된 제품을 국내 업체가 생산하게 된다. 학교와 업계를 넘나들 ‘멀티 플레이어’로 변신할 서 교수. 핵심인재의 활용이라는 기치를 내건 그가 새로운 성공모델을 제시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