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이름을 결정하는 일은 부모에게 주어진 어려운 숙제다. 요즘은 작명소에서 쉽고 편하게 짓는 경우도 많지만 평생 자식과 함께 갈 이름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 속에 사는 과학자는 어떨까. 자신의 이름을 따는 평범한 유형부터 사상과 철학까지 오롯이 녹여내는 신중파까지 재미있는 과학계의 작명법을 만나보자.
신약 장수 비법은 이름?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고 콧속이 눅눅해지며 뜨거운 불덩이가 뇌와 안구 주위에서 이글거리는 기분이 든다. 감기몸살인가. 병원 가기도 귀찮을 땐 처방전 없이도 사먹을 수 있는 아스피린이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히포크라테스는 버드나무 껍질에 해열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버드나무의 효능은 수천년 뒤 실험실에서 검증됐고 아세틸살리실산, 즉 아스피린이 태어났다. 아스피린이란 이름은 ‘아세트산’(acetic acid)과 조팝나무의 학명인 ‘스피라에아’(Spiraea)의 합성어. 매년 600억개 이상 팔리는 아스피린이 아세틸살리실산이라는 어려운 이름이었다면 아마 외면을 받았으리라.
이처럼 제약회사들은 세상에 내놓은 소중한 약들이 장수할 수 있도록 작명에 신경 쓴다. 어차피 약효가 특별난 게 아니라면 부르기 쉽고 기억에 오래 남는 약이 살아남기 마련이다.
아스피린이 적당히 학구적이면서 부르기 좋은 이름이라면 펜잘에는 위트가 녹아 있다. 종근당에서 1984년 내놓은 펜잘은 ‘고통’(pain)을 ‘잘’ 이겨낸다는 뜻으로 영어와 한글의 합성어다.
아예 영어로만 이름을 짓기도 한다. 동아제약의 써큐란은 ‘순환하다’(circulate)에서 따왔는데,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 본래의 용도에 충실한 이름이다. 노골적으로 약의 효능을 강조하기도 한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자이데나는 라틴어로 ‘결혼의 해결사’를 뜻하는 합성어다. 한글로는 ‘잘 되나’ 또는 ‘자, 이제 되나’를 의미한다.
여풍 거센 태풍 세계, 알고 보니
2001년부터 태풍의 이름은 아시아 태풍위원회에서 정해왔다. 캄보디아, 중국, 북한, 홍콩, 일본, 라오스, 마카오, 말레이시아, 미크로네시아, 필리핀, 한국, 태국, 미국, 베트남 이렇게 14개국이 10개씩 제출한 140개의 이름을 5개 조로 나눠 차례로 붙인다. 사이좋게 공동작명을 하는 셈이다. 그전까지는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에서 지은 미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2차 세계대전 뒤 호주의 예보관들은 주로 태풍에 여자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 남자였던 예보관들이 아내나 애인 생각을 하며 전후(戰後)의 뒤숭숭한 마음을 달랜 까닭일까. 여성단체의 반발로 1979년부터는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을 골고루 붙였다.
기상청 태풍예보담당관실 박윤호 예보관은 “태풍의 발생장소나 이동경로, 세기가 모두 제각각인데다 이름까지 있기 때문에 가끔은 태풍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태풍의 이름에서 그 나라의 문화와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공모로 개미, 나리, 너구리 등의 이름을 제출했다. 재미있는 이름도 눈에 띈다. 마카오가 낸 파마라는 이름은 ‘닭의 간과 버섯이 들어간 햄’이란 뜻이고 필리핀의 하구핏은 ‘채찍질’을 의미한다. 일본이 제출한 이름도 독특하다. 저울, 염소, 토끼, 왕관, 컵, 고래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바로 일본에서 보이는 별자리 이름이다.
그런데 140개의 태풍 이름 가운데 여전히 여자 이름이 많다. 남자 이름은 미국이 제출한 로키, 비센티, 프란시스코 이렇게 3개뿐인데 여자 이름은 마리아, 팅팅, 산산, 디앤무, 위파까지 국적도 다양하고 대상도 소녀에서 여신까지 다채롭다.
박윤호 예보관은 “태풍이 큰 피해 없이 온화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여자 이름을 많이 쓰는 것 같다”며 “개미, 나비, 제비 같은 작은 곤충이나 동물 이름을 붙이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말썽꾸러기 태풍은 가차 없이 제명된다. 2003년 우리나라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준 태풍 매미는 더 이상 없다. 2004년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수달, 봉선화와 함께 제명됐기 때문이다.
2006년에는 나비와 맛사, 룽왕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에 끔찍한 재앙을 안겨줬던 태풍 나비는 잠자리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었다.
2005년에는 유난히 북대서양에 허리케인이 잦았다. 영어로 지은 이름이 21번째에서 동나자 그 뒤부터는 임기응변으로 그리스어 알파벳을 사용했다. 결국 알파부터 입실론까지 무려 5개의 열대성저기압이 더 생긴 뒤에야 잠잠해졌다.
작년 12월 발생한 태풍 차미에 이어 올해 처음 발생할 태풍은 콩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콩레이는 캄보디아 크메르 왕국의 예쁜 소녀이름이라고 하니 얌전히 지나가주면 좋으련만. 이번 여름은 엘니뇨 때문에 더울 거라는데 뜨거워진 바다가 태풍을 많이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안철수 바보래요~!
순식간에 컴퓨터를 엉망으로 만드는 얄미운 바이러스에는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안철수연구소 커뮤니케이션팀 황미경 과장은 “바이러스 이름의 접두어는 분류 기준을 보여주고 접미어는 바이러스의 용량이나 전파방법, 변종 여부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Win-Trojan/LineageHack.11964는 윈도우에서 활동하는 트로이목마 바이러스로 1만1964바이트를 차지한다. LineageHack는 바이러스의 특징을 나타내는데, 감염되면 리니지게임에 접속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순간 그 정보가 특정 메일주소로 새나가게 된다.
예루살렘 바이러스나 체르노빌 바이러스는 발견된 장소에서 이름의 단서를 얻었다. 님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admin이란 단어가 연속적으로 나타나 그 단어를 뒤집은 nimda가 이름이 됐다. 월드컵 때 2002를 찍어대는 바이러스는 월드컵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황 과장은 “90년대에는 안철수 박사가 바이러스 잡는 백신을 신속히 만들어내자 화난 바이러스 개발자들이 ‘철수바보’ 바이러스를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철수바보’ 글자를 보며 정작 주인공인 안철수 박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물학자 씨 농담도 잘하시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사라져갈 뿐….” 맥아더 장군의 말이 아니라 유전자 이름이다. 미국 코네티컷대 블랑카 로지나 박사팀은 세포막에서 물질수송을 담당하는 인디유전자(Indy)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초파리의 수명이 연장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I'm not dead yet)의 머리글자를 연결해 재치 있는 이름을 만들었다.
2005년 1월 미국 슬론캐더링 암센터의 타케다 마에다 박사팀은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총괄하는 유전자를 발견해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름은 ‘포케몬’(POK Erythroid Myeloid ONtogenic factor). 그러나 유명 만화 캐릭터인 ‘포켓몬’을 연상시켰기에 일본 닌텐도사에게 소송을 당했고 결국 Zbtb7로 개명해야 했다.
좀 더 기발한 이름도 있다. 독일 필립스대 레나테 폴 박사팀은 정자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돈 후안’(don juan)이라 이름붙였다.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불임이 될 수도 있어 바람둥이가 되긴 힘들다.
건국대 생명과학부 조경상 교수는 유전자의 이름을 놓고 공모전을 한 경험도 있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초파리의 몸에 반점을 만드는 유전자였는데 결국 ‘점박이’(jumbagi)란 아이디어를 낸 학생이 5만원짜리 상품권을 탔다.
충남대 생물학과 김철희 교수는 제브라피쉬에서 재미있는 유전자들을 찾고 있다. 두뇌를 만드는데 이상을 일으키는 ‘헤드리스’(headless) 유전자나 신경세포의 자살을 유도하는 ‘심봉사’(simbongsa)는 모두 그가 지은 이름이다.
유전자의 이름은 먼저 발견한 사람이 짓는다. 2만5000개의 인간 유전자 가운데 이름이 지어진 건 5000개 정도니 아직 2만개의 유전자가 무명씨라는 얘기. 앞으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지은 재기발랄한 이름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신화를 품은 화학자
우리가 화학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관문은 주기율표다. 원자번호 1번에서 20번까지 줄줄 외워주는 건 기본 센스. 주기율표를 보고 있노라면 행과 열을 가르며 공통된 열쇳말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고,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비밀스런 크립텍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1869년 러시아의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63개의 원소를 찾아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140여년이 지난 지금 주기율표의 식구는 111개로 늘었고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맹(IUPAC)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원소까지 합치면 118개나 된다(2006년 9월 기준).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는 자연에 실재하는 원소지만 나머지는 실험실에서 만든 인공 원소다.
주기율표는 다국적 과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거대한 모자이크 그림이다. 원소의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소가 지닌 특성부터 발견한 과학자의 국적, 철학까지 꿰뚫어볼 수 있다.
칼슘은 라틴어로 ‘석회’를 뜻하고 베릴륨은 ‘녹주석’에서 온 이름이다. 게르마늄은 독일, 폴로늄은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가 발견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재밌게도 원자번호 51번 안티몬은 그리스어로 ‘고독함을 싫어한다’는 의미다. 다른 광물에 섞여 산출되는 경우가 많아 붙여졌다.
신화에 원형을 둔 이름도 여럿 보인다. 혹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소통이 여기서도 유효한 걸까. 티타늄은 그리스신화의 신족(神族)을 의미하는 ‘티탄’에서, 프로메튬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준 죄로 참혹한 형벌을 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왔다. 헬륨은 그리스어로 ‘태양의 신’(Helios)이며 셀레늄은 ‘달의 여신’(Selene), 텔루륨은 라틴어로 ‘땅(지구)의 여신’(Tellus)에서 연유했다.
1789년 독일의 화학자가 발견한 우라늄은 천왕성을 뜻하는 ‘우라노스’(Uranus)에서 왔다. 우라노스는 하늘의 신이다. 하늘에는 천왕성이, 땅에는 우라늄이 있는 셈이다. 뒤이어 발견된 넵투늄과 플루토늄도 해왕성(Neptune)과 명왕성(Pluto, 지금은 소행성134340)의 이름을 땄다. 신화에서 넵튠은 바다의 신, 플루토는 지하의 신이니 우라늄과 넵투늄, 플루토늄 삼형제가 모이면 우주를 아우른다.
화학자들은 신화의 아련한 추억을 주기율표에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