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이라는 분야는 생물학, 생리학, 병리학, 해부학 등 기초학문을 토대로 환자를 다루는 내과학, 외과학, 산부인과학, 소아과학, 정신과학 등 임상학문이 결합된 매우 복잡하고 방대한 학문이다.
때문에 의사인 필자로서는 드라마의 상황을 위해 질병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와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어느 한 단면만을 강조해 보여줄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제약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글을 통해 ‘외과의사 봉달희’를 찬찬히 다시 보면서 다양한 의학적 상황 뒤에 숨은 의미를 찾아보자.
긴장성 기흉과 카디악 탐폰
봉달희(이요원 분)가 고향인 울릉도에서 건강검진을 하고 있던 중 급작스런 흉통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가 발생한다. 봉달희는 이 환자를 육지에 있는 큰 병원으로 보내기 위해 헬기를 요청하고 응급처치를 한다. 봉달희는 이 환자가 긴장성 기흉일 것이라고 진단하지만 안중근(이범수 분)은 카디악 탐폰이라고 말하는데…
봉달희가 진단한 긴장성 기흉이란 폐 주변 공간에 공기가 차 들어가 폐가 급속도로 찌그러지는 병이다. 캔이 바다에 빠지면 압력 때문에 찌그러드는 것처럼 몸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폐가 찌그러드는 것이다. 긴장성 기흉이 생기면 환자는 극심한 호흡 곤란을 겪고, 만약 폐가 찌그러지면서 안쪽에 위치한 심장이라도 짓누를 경우에는 당장 심장이 멎어 사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응급처치는 굵은 의료용 바늘이나 튜브를 갈비뼈 사이에 꼽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갈비뼈사이에 바늘을 꼽는 순간 ‘휘익’소리와 함께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찌그러진 폐가 펴진다.
반면 안중근이 진단한 카디악 탐폰(cardiac tamponade)은 폐가 아니라 심장 주변 공간에 피가 차 들어가 심장이 급속도로 찌그러지는 병이다. 이 경우 심장이 직접적으로 압박을 받게 되므로 긴장성 기흉보다 더 위중한 응급질환이다.
응급처치는 극 중 안중근이 한 것처럼 굵은 의료용 바늘을 가슴에 꽂아 심장을 둘러싼 피를 뽑아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를 함부로 따라하면 안된다. 자칫 잘 못하면 심장의 정상적인 부분을 찔러 오히려 심장에 더 큰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면 안중근이 환자의 심장을 바늘로 찌르기 전 왼손 중지를 가슴에 대고 오른손 중지로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의학용어로 ‘타진’(percussion)이라고 하는데, 의사들은 타진할 때 손에서 느끼는 감각과 이때 들리는 소리를 이용해 내부 장기의 상태를 유추한다.
중근은 이런 타진을 통해 손상을 입은 부위의 크기와 위치를 파악하고 바늘을 찌른 것이다. 실제로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이 부위의 크기와 위치를 초음파 기기에서 눈으로 확인하면서 바늘을 찌르기 때문에 매우 안전하다.
사람이야, 마네킹이야?
울릉도 보건소에서 안중근이 환자 가슴에 바늘을 꽂는 장면에 대해“혹시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에 바늘을 꽂은 것은 아니냐?”며 질문을 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대답부터 하면 아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기 직전 상황부터는 마네킹에 옷을 입혀 놓고 찍었다.
그리고 이후 피를 뽑아내는 장면은 마네킹 몸속에 가짜 혈액을 담은 통을 넣어 놓고 피부를 바늘로 찔러 혈액을 뽑아내는 상황을 연출했다. 너무 감쪽같은 편집에 진짜로 오해한 시청자가 많았지만 사실은 마네킹이었다.
CPR과 ABC
두 시간 전 내원했다 소화제를 처방받고 귀가했던 환자가 급작스런 흉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된다. 혈압이 잡히지 않는 환자에게 안중근은 CPR을 준비시킨다.
안중근은 모니터의 파형을 보며 환자의 가슴을 열심히 마사지 한다. 그러자 물결 모양의 파동이 금세 톱니 모양으로 변하며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지고 안중근은 제세동(除細動)을 준비시키는데…
드라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이다.
CPR은 심폐소생술로 심장박동이 멈춘 상황에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폐와 심장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유지시켜 생명을 연장하는 시술이다.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보통 20~30분 정도 CPR을 했는데도 환자의 자발적인 심장 박동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폐기능만 소실돼 인공호흡기를 다는 경우는 제외한다.
CPR은 처치 순서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폐 기능을 유지하도록 기도(Airway)를 확보하는 일이 첫 단계, 폐에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Breathing)이 두 번째 단계, 흉곽을 압박해 심장을 짜주는 것(Circulation)이 마지막 단계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각 단계의 첫 알파벳을 따서 ‘ABC’라고 부른다. 사실 의대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수기를 단순화해 쉽게 외우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여든 살이 된 의사도 심폐소생술만큼은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드라마에서도 ABC를 찾을 수 있다. 안중근이 “CPR 준비!”라고 외치고 나서 환자의 기도에 튜브를 넣자마자 응급실 백선생(이현 분)이 청진기로 환자의 숨소리를 듣고 “잘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까지가 첫 단계다.
의대생들에게 CPR 교육을 할 때 간혹 “튜브를 넣으면 기도가 확보될 텐데 청진기로 숨소리까지 듣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개 삽관된 튜브는 기도에 잘 들어간다. 그러나 가끔은 튜브가 식도로 잘못 들어가기도 한다. 공기가 통하는 기도와 음식이 들어가는 식도의 입구가 거의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청진기로 환자의 숨소리를 꼭 확인하는 것이다.
숨길이 확보되면 B 단계로 넘어간다. 드라마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는데, 튜브 끝에 엠브(Ambubag, 주머니 모양의 호흡보조 기구)를 연결해 짜주면서 폐에 공기를 불어 넣는다.
이때 엠브 끝에 호스를 연결해 산소를 추가로 공급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엠브를 무조건 빨리 짜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분당 8~10회 천천히 짜는 것이 가장 좋다고 알려졌다.
마지막 단계로 흉곽을 압박해 심장의 펌프 기능을 유지한다. 심장은 어른 주먹 2개를 붙인 정도의 크기로 평상시에는 한번 박동할 때 약 70cc의 혈액을 내뿜는다. 이런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지 못하면 심각한 산소 부족으로 주요 장기의 세포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때 흉곽을 압박해 피를 순환시킨다.
이런 방법이 가능한 이유는 심장에 판막이 있기 때문이다. 판막은 심장에서 피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에 위치해 혈류의 역류를 막는 깔때기 모양의 구조물이다. 흉곽을 압박하면 심장에서 나온 피가 판막 때문에 뒤로 밀리지 않고 혈관을 따라 전진할 수 있다.
전기충격기는 제세동기
환자의 가슴에 전기충격을 주는 장면은 대부분의 메디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다. 흔히 이 기기를 전기충격기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이 장비의 정확한 이름은 ‘제세동기’(除細動器)다.
심장은 스스로 전기신호를 발생하는 근육질의 장기다. 제세동기는 짧은 순간 강력한 전기 충격을 가해 심장의 전기 신호를 없애는 기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심실세동이 생겼다고 하자. 이는 진동하고 있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이런 상태의 심장은 피를 전혀 짜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세동기로 심실세동파를 제거해야 한다.
다행히 심장은 의외로 똑똑해서 모든 전기신호가 사라진 뒤에는 스스로 자신의 정상 박동을 찾아가기 때문에 제세동기를 쓴 뒤 심장의 전기신호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에서 안중근은 제세동기를 들고 “200줄, 바이페이식, 논싱크로”라며 어려운 단어를 말한다. 200줄(Joule)은 전기에너지의 양이다. 바이페이식(biphasic)은 제세동기가 사용하는 전류 방식인데, 모노페이식(monophasic)보다 적은 양의 전기로도 같은 크기의 충격을 줄 수 있어 최근 각광받는 방식이다.
2005년 미국심장협회(AHA, American Heart Association)가 개정한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바이페이식은 200줄, 모노페이식은 360줄부터 시작하도록 권한다. ‘논싱크로’는 ‘nonsynchoronized’의 약자로 심장의 기존 정상 박동을 무시하고 전기충격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한 가지 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에서는 모니터에 물결 모양 파동이 나타날 때 제세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이는 틀렸다. 제세동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물결 모양이 아니라 날카로운 심실세동파일 때 해야만 의미가 있다. 이 부분이 정확히 표현된 드라마는 필자가 아는 한 미국의 ‘ER’과 ‘외과의사 봉달희’밖에 없다.
작가 꿈 이룬 의사, 강석훈
“꿈꾸는 지성, 매력적인 남자 강석훈입니다.”
그의 메일을 열었더니 아래쪽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흰 가운에 뿔테 안경을 쓴 딱딱한 의사 이미지 대신 동글동글한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훈남’형 얼굴이 연상된다. 강석훈 씨는 2005년 SBS TV드라마 미니시리즈 기획안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계기로 ‘외과의사 봉달희’의 보조작가로 활동 중이다. ‘운발’만은 아니다.
1998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영화 시나리오를 줄기차게 써왔으니 글 쓴 기간만 따지면 10년차 중견작가다. 현재 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 전임의로 있는 강석훈 씨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어릴 때 꿈이 작가였나?
어릴 때는 무엇이 될지 몰랐다. 한 가지 가능성은 ‘스머프로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중학생 시절 ‘스머프’라는 만화가 유행했다. 매일 밤 스머프 마을에 들어가서 사는 꿈을 꿨다. 나는 ‘석훈 스머프’였다. 성격은 ‘똘똘이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를 합쳤다고나 할까. 3학년 때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게 됐지만 어린 마음에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나?
1998년 소아과 암병동에 있을 때였다. 어린 나이에 죽는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저 아이들의 꿈은 뭐였을까? 꿈이 뭔지 알고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그리고 얻은 대답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의대를 졸업하고 막 인턴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턴 생활은 두 갈래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평생 의사로 살아가느냐 다른 길을 가느냐 하는. 일단 의사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리 먼 길을 간 것은 아니어서 시작점으로 돌아와 작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첫 시나리오도 그때 썼다.
의사와 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둘 다 머리를 많이 쓰는 지식 노동이라는 점이 같다. 의사가 한 줄의 처방전을 쓰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하는 것처럼 작가는 한 줄의 대사를 쓰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한다. 차이점은 감정적인 부분이다. 의사는 환자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수련과정이 저절로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응급상황에서는 다른 의료진 앞에서도 감정을 감춰야 한다. 냉정해야 환자를 살릴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고 다른 의료진의 동요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반대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 대사가 나온다.
처음에 이게 참 어려웠다. 내 초창기 작품을 보면 대사가 차분하다. 감정이 절제돼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오랫동안 의사로 훈련받다보니 대사를 쓸 때 감정을 폭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병원에서 실제 경험한 일을 드라마 에피소드로 쓰나?
변형되긴 했지만 많이 반영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인지 밝히긴 곤란하다. 환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어기게 되니까.
메디컬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뭔가?
미국 작품인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다. 드라마 방영 초기에 ‘외과의사 봉달희’가 이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그건 절대 아니다. 현실감은 ‘외과의사 봉달희’가 ‘그레이 아나토미’보다 훨씬 뛰어나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쓸 계획인가?
작가의 임무 중 하나는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봐야만 하는 영화,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말이다. 최근 쓰고 있는 작품은 탈북자나 노숙자에 관한 시나리오다.
인생은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평생을 도망 다니게 된다. 나는 작가로서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할 생각이다. 탈북자나 노숙자를 조명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현 사회가 직시할 문제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