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때 한 천문학자에게 “원의 중심각은 몇 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칠정산내편법으로 하면 365.2425도, 외편법으로 하면 360도”라고 답할 것이다.
왜 이런 이상한 대답이 나올까. 동아시아의 전통수학에서는 도형에 대해 각과 변의 관계를 따지는 기하학보다는 실제 수치를 대입해 면적을 구하는 방식의 대수학이 발달했다. 따라서 16세기 말 서양 기하학이 전해지기 전까지 중국과 한국의 수학사에서 원의 중심각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원의 중심각을 정의하고 계산에 이용했던 분야는 수학이 아닌 천문학, 특히 태양의 운동을 다루는 분야였다.
세종 때의 대표적 천문학자인 이순지(?~1465)가 과거에 합격한지 얼마 안됐을 무렵의 일이다. 세종이 한양의 위도가 얼마인가를 묻자, 그는 주저 없이 “38도1/12”이라고 답했다. 세종은 한양의 정확한 위도를 단번에 말하는 이순지의 천문학 실력에 탄복했다. 당시에도 북극성의 고도를 관측해 그 지방의 위도를 정했다.
하지만 현재 서울시청의 위도가 약 37도34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순지의 답은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데, 세종은 왜 정확하다고 생각했을까. 이순지의 답은 원주각이 365.2425라는 전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값은 360도법으로 고치면 약 37도32분이므로 상당히 정확한 값이다. 세종은 그뒤 이순지에게 천문학과 역법을 연구하는 일을 맡겨 ‘칠정산’(七政算)을 완성했다.
세종시대에는 천체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중국식과 서양식을 함께 사용했다. 우리민족이 이룩한 위대한 과학유산으로 꼽히는 칠정산은 중국에서 발전한 천체운행 계산법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기초한 서양식 계산법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세종시대 천문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운행계산법을 사용했다고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나라의 정치 주관하는 일곱 천체
‘칠정산’은 달력을 만들기 위해 천체운행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이다. 여기서 칠정(七政)이란 태양, 달, 오행성의 일곱 천체를 가리킨다. 중국문화권에서는 이 천체들이 한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못되고를 주관한다는 점성술적인 믿음 때문에 오래 전부터 칠정이라 불렸다. 산(算)은 계산을 뜻하므로 칠정산(七政算)은 ‘일곱 천체의 운행 계산’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곱 천체의 운행을 계산해 달력을 만드는 방법을 ‘역법’(曆法)이라고 하는데, 칠정산은 중국식 방법과 서양식 방법을 모두 사용하는 역법이었다. 세종 때 편찬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란 책은 각각 전통 중국식 방법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기초를 둔 서양식 방법으로 천체운행을 계산하는 법을 담고 있다.
세종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을 필요할 때마다 수입해 달력을 제작해왔다. 역법은 계산에 사용된 기본상수나 계산 기법이 다를 경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의 인덕력(麟德曆), 고려의 선명력(宣明曆), 그리고 고려 후기 충선왕 때부터 사용한 수시력(授時曆) 등이 모두 중국식 천문학과 수학의 전통을 따르는 중국 역법을 수입한 것이다.
원의 중심각이 365.2425도인 이유
역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상수는 1태양년의 길이다. 중국식 역법에서는 태양이 동지점에서 출발해 다시 동지점에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1태양년을 정했다. 서양 역법에서는 태양년을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춘분점을 이용한다. 중국식 천문학에서는 천구의 적도를 중심으로 관측이 이뤄진 반면, 서양식 천문학에서는 천구에서 태양의 궤도인 황도 중심의 관측이 이뤄졌기 때문에 기준점이 각각 달랐다.
중국에서는 규표라는 긴 막대를 이용해 동지 근처 여러 날 동안 정오의 해 그림자 길이를 해마다 측정해 실제 동지점을 구했다. 이 동지점을 바탕으로 1태양년의 길이를 산출했다. 태양년의 길이는 역법마다 달라 ‘칠정산내편’에서는 원나라 때 천문학자 곽수경이 얻은 365.2425일을 채용했다.
천구에서 태양이 움직인 거리는 황도라는 원 위에서 움직인 호의 중심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달력을 만들 때는 날짜별 이동각도를 따지므로 하루 동안 움직인 호의 중심각이 얼마인가에 따라 계산이 편리한 정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수시력의 태양년 수치를 사용하면서 원의 중심각을 360도로 약속한다면 하루에 태양이 이동한 각도는 360도/365.2425일=0.98564652(도/일)가 돼 이틀이나 사흘간 이동한 각도를 계산할 때 수치가 매우 복잡해진다. 반면 원의 중심각을 1태양년 길이와 똑같은 각도로 정의하면 태양이 하루에 이동한 각도는 365.2425도/365.2425일=1(도/일)이 돼 이틀에 2도, 사흘에 3도 이동하는 셈이니 계산이 간단하다.
또한 항상 일정한 태양 운동과 비교해 다른 천체의 하루 이동각도를 나타내면 운동 속도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태양의 하루 이동각도는 항상 일정하므로 태양이 변치 않는 기준으로서 군주의 상징이요 천체들의 으뜸이라는 점성술적인 믿음에도 잘 맞는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천문학적 계산에서 원의 중심각을 1태양년 길이로 정의하는 것이 전통이 됐다. 중국식 역법처럼 수시력의 1태양년 길이를 채용한 칠정산내편법에 따라 원의 중심각이 365.2425도라고 대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는 달력을 만들려고 원의 중심각을 1태양년 길이로 잡았기 때문에 1태양년 길이가 달라지면 원의 중심각도 달라졌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태양이 하루에 이동하는 각도는 1도라는 원칙은 지킬 수 있다. 반면 서양에서는 고대 바빌로니아 수학의 영향을 받아 각도에서 60진법을 사용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또한 기하학에서 출발한 각도법이 천문학적 계산에 쓰이면서 천문학에서도 원의 중심각을 360도로 사용했다.
태양과 달의 운동을 계산해 달력을 만드는 것이 역법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지만, 중국식 역법에는 일식과 월식의 예측, 오행성의 운동계산도 필수항목이었다. 태양과 달 이외에 다른 천체의 움직임을 추산하기 때문에 중국식 역법을 ‘천체력’(ephemeris)이라고도 한다.
‘칠정산내편’은 달력 날짜 매기기, 태양과 달 운동 계산, 계절별 남중성과 밤낮의 시간 구하기, 일식과 월식의 계산, 오행성의 운동계산, 4가지 가상천체의 위치계산을 다룬 7장으로 구성돼 있다. 태양이 동지점, 하지점, 춘분점, 추분점에 각각 위치하는 시각, 일식이 시작될 때 처음으로 달에 가려지는 지점, 행성이 태양과 일직선에 놓이는 시각이 동지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구하기처럼 위치천문학(Astrometry) 전공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 ‘칠정산내편’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70년대 원로 천문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한글 번역본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내용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위대한 책’에 근거한 회회력
중국 명나라 때는 원나라 때 쓰던 수시력을 조금 변형한 대통력(大統曆)이라는 중국식 역법을 만들었다. 또한 일식과 월식의 예보가 정확하다고 정평이 나 있던 이슬람 역법을 번역해 회회력(回回曆)으로 사용했다.
이슬람 역법은 원래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85~165)가 집대성한 천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축적해 놓은 관측데이터와 수학적 이론을 종합해 ‘수학집대성’(Syntaxis)이라는 책을 지었다.
여기에는 천동설이라 부르는 지구 중심의 우주구조와, 이에 기초한 천체운동의 원리와 계산법이 총망라돼 있다. 이 책은 9세기 초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알마게스트’(Almagest, 위대한 책)라는 별칭을 얻으며 이슬람 천문학의 경전이 됐고 12세기에는 유럽에서 라틴어로 번역됐다. 알마게스트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도입하고 새로운 계산모델을 제시하기까지 1000년도 넘게 변함없는 권위를 누렸다.
명나라에서 번역한 회회력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아랍어로 번역한 알마게스트에 근거한 천체운행계산법이다. 따라서 여기에 들어있는 행성운동 모델이나 계산법은 중국 전통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케플러법칙에 따르면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운동을 한다. 태양에서 가까운 곳을 지날 때는 운동속도가 빠르고 먼 곳을 지날 때는 느리다.
그런데 그리스시대에는 천체는 오로지 같은 속도로 원운동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히파르코스 때부터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천체의 운동 속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운동만 갖고 실제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을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심원과 주전원을 도입해 중심천체에서 거리가 달라지면서 속도가 변하는 움직임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했다.
일식 예측한 ‘칠정산외편’
이순지와 김담(1416~1464) 같은 조선의 학자들은 명나라에서 번역한 회회력을 가져다가 면밀하게 다시 분석해 번역본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또한 회회력에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일부 표는 다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칠정산외편’이다. 세종시대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천체운동 모델과 계산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칠정산외편으로 하면 원의 중심각이 360도라는 대답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칠정산외편’은 특히 일식과 월식을 예보할 때 큰 힘을 발휘했다. 태양은 임금의 상징이며, 달은 왕비의 상징으로 여기던 전통시대에 해와 달이 가려지는 일식과 월식은 커다란 재앙의 징조였다. 또한 식 현상을 얼마나 정확히 예보할 수 있는가는 그 왕조가 하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였다.
하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분초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월식 예보에는 한 가지 역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다른 역법으로도 함께 계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칠정산내편’이 주가 되는 역법이지만,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칠정산외편’을 연구한 이유다.
최근 한국천문연구원 안영숙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세종 때 칠정산외편법으로 일식의 시작 시간을 예측했을 때 오차는 3분 정도였다. 월식은 일식보다 오차가 더 크지만 30분 내에서 예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역법이든 계산에 쓰인 수치들이 천체운행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는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세종 때부터 150년이 경과한 1600년경 칠정산외편법으로 예측한 결과 일식은 30분, 월식은 50분 정도의 오차를 보였다. 일월식의 예측 오차가 커지자 효종 때(1654년) 새로운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으로 바꿨다. 하지만 칠정산은 시헌력을 보조하며 여전히 일월식 예측에 사용됐다. 칠정산이 그만큼 믿을 만한 역법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