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간, 한 어린이가 스케치북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크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모양은 모두 같다. 이게 과연 그림일까. 시간이 지나자 동그라미는 엄마의 얼굴로, 방긋 웃는 꽃으로, 꿀꿀대는 돼지로도 되살아났다. 스케치북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원은 반지름을 늘였다 줄였다하며 변신을 거듭한다.
영원의 상징 원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은 한 고정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의 집합이다. 원의 정의를 조금만 눈여겨보면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유클리드 공리에 따르면 점은 위치만 있고 면적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중심점뿐만 아니라 중심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들을 무한히 더해도 면적은 0이다.
또 2차원 평면에서 모든 도형은 닫혀 있다. 삼각형을 예로 들면 서로 다른 세 개의 꼭지점을 잇는 선은 삼각형의 내부와 외부를 나눈다. 하지만 원은 중심과 반지름을 이루는 점들의 집합이므로 영원히 닫혀 있을 수 없다. 선으로 연결되지 않는 점 자체로는 닫힌 도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서 원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공허한 도형이다. 그래서 원 안에 무엇을 채우고 원으로 무엇을 만들지는 순전히 인간의 상상력에 의존해왔다.
인류는 오랫동안 문화에 원으로 만든 비유와 상징을 숨겨뒀다. 여러 문화권에서 원은 신성한 도형으로 대접받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이어지며 미적 균형과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힌두교 문화에서 시바는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 같은 우주의 질서와 순환을 주관하는 신이다. 시바는 둥근 틀 안에서 춤을 추며 조화와 질서를 표현한다. 불교에서는 수레바퀴가 돌고 돌듯 윤회하는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 원을 사용한다. 우주와 생명의 본질은 원을 따라 돌며 탄생과 소멸을 되풀이한다.
기독교에서도 힌두교와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14세기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디 푸초가 그린 프레스코화에는 원형의 우주를 감싸안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반니는 ‘천지 창조와 낙원추방’에서 신성한 우주인 에덴동산을 원형의 고리로 표현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들은 원 밖에 위치해 불안과 공포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스어로 ‘우로보로스’(Ouroborous)는 자기 꼬리를 무는 뱀 또는 용의 문양을 가리킨다. 끝없이 물고 물리는 원형의 고리는 세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우로보로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우로보로스는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과 공간, 완벽한 존재, 우주의 본질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의 짧은 삶은 우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인류는 머리에서 꼬리로, 다시 머리로 이어지는 반복적인 순환고리처럼 영원한 삶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고대 사람들은 둥근꼴이 영혼이나 하늘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주검을 원형 무덤에 묻기도 했다. 원형 구조는 하늘과 땅, 신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신성한 매개체 역할을 한 셈이다.
스위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아니마’란 남성의 마음 속에 억압된 구원의 여성을 뜻한다. 또 여성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구원의 남성은 ‘아니무스’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인간의 의식을 원형 구조로 설명한다.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한몸에 가진 양성동체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이 인간의 의식을 형성한다. 융은 이 모습을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우로보로스는 벤젠(${C}_{6}{H}_{6}$)의 분자식을 발견할 수 있는 영감을 주기도 했다. 벤젠은 플라스틱, 염료, 세제, 살충제의 원료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유기화합물로 탄소와 수소로 이뤄진 탄화수소다. 탄소와 수소는 1:1의 비율로 결합한다.
1825년 벤젠이 발견됐지만 어떤 구조를 갖는지 밝히는 일은 19세기 화학계 최대의 난제였다. 40년 뒤에야 비로소 독일의 화학자였던 케쿨레는 벤젠 구조로 거북등무늬의 육각형구조를 제안했다. 그는 훗날 “꿈속에서 꼬리를 문 채 빙빙 돌고 있는 뱀을 본 뒤 둥근 모양의 벤젠고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벤젠고리는 탄소원자 사이의 단일결합 3개와 이중결합 3개로 이뤄진다. 과학자의 꿈에 나타난 원이 발상을 전환하는 계기를 준 셈이다.
동그라미에서 파동으로
꼬리를 문 용이 신화와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돌며 환생하듯 원은 현대 문화와 과학기술에도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2차원 좌표에 반지름이 1인 원을 놓고 각을 이동시키면서 χ, y축에 투영하면 흔히 우리가 삼각함수라 부르는 사인·코사인함수가 된다.
사인·코사인 함수가 결합하면 푸리에급수가 되는데, 닫힌구간에서 정의된 어떤 연속함수라도 푸리에급수($\frac{{a}_{0}}{2}+\sum _{n=1} ^{\infty }$(${a}_{n}$cosnx+${b}_{n}$sinx) , a, b는 실수)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아무리 복잡한 파동이라도 사인함수와 코사인함수를 적절히 조합해 분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푸리에급수는 진동수 별로 파동을 나누기 때문에 소음 제거에도 사용된다. 비행기 엔진의 시끄러운 소음을 분석해 그 소리와 같은 진동수를 갖지만 위상은 반대인 소리를 발생시키면 소음이 사라진다. 같은 원리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진동수를 분리할 수 있다. 이퀄라이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은 여러 소리가 합쳐져 나타나는 멋진 쇼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괴범의 목소리를 분석해 고유한 특징을 찾아내는 성문분석, ‘열려라 참깨’라는 목소리만으로 문을 열어주는 음성인식시스템에도 파동의 합성과 분해의 원리가 들어 있다.
동그라미가 얼굴이 되고 신화와 종교에 영감을 주며 자연과 인공의 파동으로까지 확장된 셈이다.원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도형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