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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에와 메섕

성운 성단과 함께 한 사나이들

1758년 8월, 프랑스의 천문학자 샤를 메시에(Charles Messier)는 혜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혜성이 현재 황소자리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메시에는 그 혜성을 직접 보고 싶었다. 천천히 망원경을 겨누었지만 혜성은 보이지 않았다. 혜성이 이미 자리를 옮긴 탓이었다. 예상하는 위치 주변을 망원경으로 탐색하면서 혜성처럼 보이는 물체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에의 눈에 하얀색의 흐릿한 촛불 모양의 빛덩이가 보였다. 그것은 황소자리의 2등급별인 제타성 부근에 있었다. 혜성이라고 생각한 메시에는 그 대상을 주의 깊게 관측했다. 이 대상은 혜성처럼 생겼지만 조금 더 밝고 흰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혜성처럼 둥글지 않고 약간 길쭉한 모양에다 꼬리도 없었다. 바로 밤하늘 여기저기 떠있는 성운이었다.

“또 속았군!”

메시에가 이날 찾은 것은 황소자리 게성운이었다. 메시에는 결심을 했다. ‘이 성운들의 위치를 미리 성도에 표시해 목록을 만들면 혜성과 혼동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날 이후 메시에는 성운성단을 찾아 자기 이름의 첫 글자 M을 붙인 목록을 만들었다. 바로 메시에 목록이다.

메시에는 1730년 6월 프랑스 로렌지방 바동비레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성공하기 위해 21세에 도시로 갈 것을 결심하고 1751년 파리대학의 조셉 드릴(Joseph Nicolas Delisle)이라는 천문학자의 조수가 됐다. 중국 만리장성 지도를 베껴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3년 동안 제도 일을 하던 메시에는 1754년 본격적으로 천문 관측을 시작했다.
 

궁수자리에 있는 메시에 목록 M8(아래)과 M20(위). 각각 서호성운과 삼렬성운으로 알려져 있다.


핼리혜성 찾아 하늘을 뒤지다

1758년 천문학계는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예언한 혜성이 76년 만에 다시 나타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떠들썩했다. 핼리혜성의 출현은 뉴턴 역학의 승리이자 혜성의 정체와 궤도를 규명하는 천문학의 일대 쾌거라고 할만 했다. 전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이 혜성을 찾기 위해 온 하늘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드릴 역시 메시에에게 혜성의 예상 궤도를 최신 성도에 그리게 하며 발견에 열을 올렸다. 이 성도를 바탕으로 하늘을 샅샅이 훑어나가던 메시에는 1759년 1월 21일 핼리혜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는 독일의 아마추어 천문가인 요한 팔리츠슈보다 한 달 가량 늦은 발견이었다. 그 바람에 메시에가 수년간 기울인 노력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좌절을 맞본 메시에는 혜성에 남다른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드릴이 은퇴하고 4년이 지난 1764년 혼자 힘으로 혜성을 처음 발견한 뒤 15년 동안 혜성 21개를 발견하는 업적을 남겼다.
 

메시에와 메섕


메시에 목록의 탄생

메시에가 혜성과 혼동되는 성운성단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 시기는 1764년부터다. 당시 핼리의 5개 천체 목록, 헤벨리우스 별 목록을 참조해 만든 더함의 목록, 라카엘의 남천 성운 목록이 있었다. 메시에는 여기에 수록된 대상들을 새로 관측하고 자신이 발견한 성운 성단들과 합쳐 새로운 목록을 만들었다.

메시에는 1769년 플레이아데스성단을 45번째로 목록에 수록하며 메시에 목록의 첫 번째 판을 완성했다. 그리고 1774년 이 목록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밤하늘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밝은 대상들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다. 오리온대성운이나 프레세페성단, 안드로메다은하 같은 유명한 대상을 이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목록을 완성하고 2년 뒤인 1771년, 혜성을 탐색하던 메시에는 또다시 새로운 성단 4개를 발견했다. 이를 시작으로 약 10년에 걸쳐 메시에는 모두 23개의 새로운 천체를 발견했다. 그는 1780년 이전에 발견한 대상과 합쳐 모두 68개의 목록을 프랑스 책력에 발표했다. 메시에 목록 1차 보충판이 탄생한 것이다.

그동안 메시에는 혜성을 찾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 일생동안 모두 21개의 혜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왕립학회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단지 관측에만 매달려 혜성을 발견한 메시에를 폄하하고 시기했기 때문이다.

메시에는 첫 번째 보충판을 만든지 1년만인 1781년 2차 보충판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성운성단 100개가 목록에 실렸는데, 새로 추가된 32개의 성운성단 중 24개는 메시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이었다. 바로 피에르 메섕(Pierre Mechain)이었다.

메시에보다 14년 늦은 1744년 프랑스 북부 라온에서 태어난 메섕은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낸 메시에와 달리 건축사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며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분의를 사용해 체계적으로 관측 했다.

그러나 메섕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파산을 했다. 메섕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분의를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메섕의 뛰어난 수학 실력을 눈여겨보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천문학 교수 제롬 드 랄랑드(Jarome de Lalande)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메섕을 천문수로학자로 추천했다.

천문수로학자가 된 메섕은 천문관측과 해안선 지도를 그리는 일을 병행하다 마침내 1781년 새로운 혜성을 두 개 발견했다. 천문수학에 재능을 발휘한 메섕은 단지 관측에만 매달린 메시에와는 달리 혜성의 궤도까지 계산해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01 1774년 메시에가 스케치한 오리온성운(M42). 02 1779년 4월 첫 주 메시에가 성도에 표시한 혜성의 궤도. 궤도의 오른쪽 위로 새로 발견한 성단 11개(점선 안)를 숫자로 표시해 놨다.


영원히 남을 이름

메섕이 메시에를 만난 것은 1774년이었다. 혜성을 찾는 일에 몰두하던 두 사람은 곧 협력자이자 경쟁자가 됐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면 다른 사람이 확인해주는 식이었다. 메시에 목록 2차 보충판 발간은 메섕이라는 새로운 협력자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메시에의 말년은 불행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1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프랑스 혁명의 어수선한 정국 속에 관측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연금과 봉급이 끊어져 생활도 극도로 궁핍해졌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천문학을 발전시킨 대가로 명예훈장을 받았으나 생활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메시에는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메섕 역시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가난한 가족들을 돌보느라 국외를 전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메섕은 1805년 파리 천문대의 대장이 돼 당시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으나 그 해 사망했다.

메시에와 메섕, 이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완성된 메시에 목록은 원래 100번까지의 천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후배 천문학자들이 10개를 보충해 오늘날에는 모두 110번까지 목록에 남아 있다.

지금도 메시에는 메시에 목록이라는 이름 속에 남아서 별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아마추어 천문가라면 누구나 반드시 접하게 되는 유명한 딥스카이 천체가 모두 여기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메시에 목록 초판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 플레아데스 성단(M45). 메시에 목록의 순서는 찾기 쉽거나 어려운 순서, 또는 위치순서도 아닌 메시에 자신이 확인한 순서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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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조상호 천체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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