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가 없어요! 그가 컴퓨터망에 연결된 장치를 거의 차단해 버렸다구요. 우리가 봐온 그 어떤 인물보다 강한 실력 행사를 하고 있어요.”상황은 심각했다. 그 해커란 작자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쓰던 것들이 모조리 망가졌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놈이 세상을 정지시켜 버리기라도 한걸까….
컴퓨터를 이용해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테러리스트와 이를 막는 사이버특수부대 ‘넷포스’와의 대결을 그린 톰 클랜시의 소설 ‘나이트 무브’의 한 장면이다.
소설에서 테러리스트는 난공불락이었던 컴퓨터 암호 체계를 무너뜨려 지구의 모든 통신시스템을 동시에 다운시킨다. 앉은 자리에서 항공기를 떨어뜨리고 기차를 충돌시키는 테러리스트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양자컴퓨터’다.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양자컴퓨터가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현재의 컴퓨터 암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된다. 현재의 컴퓨터로 해독하는데 수백 년 이상 걸리는 암호체계도 양자컴퓨터를 이용하면 불과 수분 만에 풀리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는 이런 가공할 만한 속도를 어떻게 낼 수 있는 걸까?
속도의 비밀은 ‘병렬처리’
현재 컴퓨터는 전류가 흐르는 상태를 1, 흐르지 않는 상태를 0으로 표시해 디지털 정보의 기초가 되는 비트를 만든다. 예를 들어 2비트는 4가지 정보(00, 01, 10, 11)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스위치를 열고 닫아 한 번에 하나의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입력된 연산 명령을 하나씩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의 업(up)상태를 1로, 다운(down)상태를 0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양자는 ‘중첩’이라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0과 1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즉 양자 2개로 4가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양자컴퓨터가 사용하는 이런 독특한 정보 단위를 ‘큐빗’(qubit, quantum bit의 줄임말)이라 부른다.
이를 컴퓨터 자판을 치는 상황에 비유해 보자. 26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진 자판은 26비트 컴퓨터다.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비트’씨가 1000자 짜리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자판을 1000번 쳐야 한다. 하지만 ‘양자 타법’을 구사하는 ‘큐빗’씨는 똑같은 편지를 쓰기 위해 자판을 단 한번만 두드리면 된다.
이처럼 양자컴퓨터는 여러 개의 정보를 병렬적으로 처리한다. 이런 방식은 속도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32비트 컴퓨터는 한 번에 32자리 수 1개를 계산할 수 있지만, 32큐빗 양자컴퓨터는 한 번에 32자리 수를 232(약 42억)번 계산할 수 있다.
‘인공원자’를 만들다
이론이야 이렇지만 현재 양자컴퓨터 기술 수준은 여기에 한참 못 미친다. 현재 미국 IBM 알마덴연구소와 로스알라모스연구소가 개발한 핵자기공명(NMR) 방식 7비트 양자컴퓨터가 최고다.
‘핵자기공명(NMR) 방식’으로 특정 분자의 수소 핵스핀을 큐빗으로 사용한다. 자기장이나 초고주파로 핵스핀의 업·다운 상태를 조절해 큐빗을 만들고, 분자 전체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여러 큐빗의 조합 상태를 조절한다.
그러나 핵자기공명 방식은 큐빗의 수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양자정보처리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서울시립대 안도열 교수는 “기술적으로 볼 때 핵자기공명방식으로는 최대 10큐빗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연산에 충분한 큐빗 수를 확보하기 위해 분자를 키우면 큐빗간 거리가 멀어져 연산에 필요한 큐빗간 상호작용효과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1998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으로 양자컴퓨터 연구를 시작하며 핵자기공명 방식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큐빗의 새로운 재료를 찾았다. 확장할 수 있는 큐빗의 수에 제한이 없고 우리나라에서 쉽게 상용화 할 수 있는 재료. 그가 찾은 것은 바로 반도체였다.
반도체에서 DNA까지 큐빗을 찾습니다
안 교수는 핵자기공명 방식이 큐빗을 확장할 수 없는 이유가 분자구조가 정해져 있는 물질을 큐빗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양자의 독특한 성질을 나타내는 ‘인공원자’를 직접 만들었다. 전자현미경의 전자빔을 이용해 반도체를 깎아 10~20nm 크기의 상자(vase)를 만들고, 나노 크기의 금속 박막 회로를 덧입힌 뒤 나노입자를 집어넣은 것. 여기에 전류를 흘려 양자상태를 제어한다.
이 방식은 2002년 미국의 첨단과학기술협의회(ARDA)가 ‘양자컴퓨팅로드맵’을 통해 “향후 양자컴퓨팅 연구를 이끌 패러다임”으로 평가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안 교수는 이 연구로 선진국과의 양자컴퓨터 연구의 격차를 5년에서 1~2년으로 줄였다는 평을 받았다.
안 교수는 1997년 창의연구단을 꾸리며 반도체에 양자컴퓨터 씨앗을 심었다. 씨앗을 터뜨리기 위해 밤낮 구분 없이 연구에 매진한 결과 SCI 등재 논문을 100편 넘게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3년 드디어 반도체 1개로 큐빗을 만들어 제어하는데 성공, 양자컴퓨터의 씨앗을 터뜨렸다.
싹을 틔웠으니 이제 떡잎을 봐야하지 않겠는가. 안 교수는 “반도체 2개의 큐빗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반도체를 이용한 양자컴퓨팅의 기본단위가 완성된다”고 밝혔다. 연구단은 현재 반도체 2개의 큐빗으로 만들어지는 4가지 상태의 큐빗 조합을 관찰하는 수준까지 와 있다.
“아직 상용화까지는 수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지만, 21세기는 분명 양자컴퓨터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안 교수는 양자컴퓨터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반도체 회로에 나노입자 대신 DNA를 넣어본 것.
네 가지 염기(A, G, C, T)로 구성되는 DNA에 전압을 가하면 염기서열에 따라 전류 패턴이 변한다. 안 교수는 DNA에 발생하는 양자효과를 양자컴퓨터의 큐빗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다. 2003년에 시작한 이 연구는 올해까지 ‘어플라이드 피직스 레터스’(Applied Physics Letters)에 여러 편의 논문을 실을 정도의 큰 성과를 거뒀다.
안 교수는 오늘도 반도체에 심은 여러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맛 좋은 열매를 맺을 그날을 꿈꾸고 있다.
과학적 소설? 소설적 과학?
“소설도 하나의 실험이에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안도열 교수는 실제로 SF역사소설 ‘임페리얼 코리아’(전 5권)를 펴낸 소설가다. ‘임페리얼 코리아’는 2004년 중동에 파견된 평화유지군이 블랙홀과 비슷한 웜홀에 빠져 1894년 조선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이들이 동학혁명의 우금치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공학원’을 세워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양자컴퓨터 전문 벤처기업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의 중편소설 ‘양자컴퓨터’가 ‘문학동네’ 작가상 예심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백일장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문학의 밤을 주름잡던 끼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선친(안동민)은 대학 1학년 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1972년에는 ‘2064년, 우주소년 삼총사’라는 어린이 SF소설을 펴낸 소설가다.
재능이야 그렇다 쳐도 부족한 연구 시간을 쪼개 언제 소설을 쓸까? 그는 “소설을 쓰는 시간이야말로 달콤한 휴식 시간이자 연구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쓸 때 전체의 줄거리와 구성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 교수는 소설도 일종의 ‘사회적 사고실험’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쓴다. 시공간적 배경과 같은 초기 조건을 통제변인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 여러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놀게 내버려 둔다. 그리고 갖가지 사건들을 일으켜 종속변인으로서의 결과를 기술한다.
“과학은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때로는 소설 같은 상상력으로 벽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있어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처음 생각해 낼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실제로 안교수는 소설을 쓰다가 “블랙홀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양자상태”라는 점에 착안, 블랙홀과 양자정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호킹의 블랙홀 이론이 내포한 물리학적인 모순을 일부 해결하는 논문을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 D) 10월호에 발표했다.
안 교수는 2008년 5월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인 양자역학 교과서를 쓰느라 소설 작업을 잠시 쉬고 있다. 그는 ‘과학적인 소설’에 등장하는 양자컴퓨터를 만들어 ‘소설같은 과학’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상상의 ‘양자 도약’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