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당국이 11월 22일 합동참모회의를 열고 차기 전투기를 스텔스 기능이 뛰어난 비행기로 요청하면서 사실상 미국 록히드마틴사의 F-35A로 결론이 내려졌다. F-35A를 비롯해 운동 성능이 뛰어난 유럽연합 EADS사의 ‘유러파이터 타이푼’, 이미 우리나라가 운영하고 있는 F-15를 개조한 미국 보잉사의 ‘F-15SE(사일런트 이글)’ 등이 그동안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우여곡절 끝에 내려진 결론이다. 얼마 전 F-15SE로 정해지는 듯 하다가 무산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전투기가 정말 최고일까. 사실 누구도 ‘어떤 비행기가 최고’라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는 공중전이 자주 벌어져 성능을 비교할 기회가 많았지만, 현대전에서는 공중전이 아주 드물다. 그것도 전력차이가 확연한 경우가 많았다. 최강의 전투기를 가려내는 작업은 ‘피자나 치킨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느냐’는 질문과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전투기를 콕 찍어낼 순 없어도, 더 강력한 전투기를 만들기 위한 기준은 존재한다.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세계 최강의 전투기’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까.
최강의 조건 1 체급과 완성도부터 살펴라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큰 자동차를 타면 편안하고 더 안전하다. 속도도 빨라서 고속도로에선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굽이굽이 산길을 만나면 이런 장점이 여지없이 단점으로 바뀐다. 이 때 실력을 발휘하는 차는 작고 날렵한 차다. 최고속도나 직진안전성은 큰 자동차보다 떨어지지만 재빠른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큰 자동차는 따라 할 수 없다.
현재 우리 군의 주력 전투기인 F-15K는 F-16에 비해 훨씬 크고 무겁다. 먼 거리에서 레이더로 상대방을 찾아내고 장거리 레이더 미사일로 적기를 격추하는 가시거리외 전투(BVR)를 벌일 경우엔 F-15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기체가 큰 만큼 더 성능이 좋은 레이더를 붙일 수 있고, 미사일도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꼬리를 물며 기관포와 단거리 미사일로 적기를 격추하는, 흔히 도그파이트(Dog Fight)라 부르는 근접전투에서는 F-16이나 유로파이터 같은 가벼운 전투기가 유리하다.
최근에는 경전투기보다는 중전투기가 더 유리할 때가 많다. 공중전 양상이 전자전 형태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투기가 미처 달려들기도 전부터 미사일이 날아드는 셈이다. 하지만 여러 대의 전투기가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상대편이 러시아라면 역시 F-15급인 SU(수호이)-27 등의 중대형 전투기로 상공을 장악하러 나서기 마련이다. 먼 거리의 공중전이 벌어지면서 여러 대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사이에 양 진영은 거리를 결국 좁혀가다가 대규모 근접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황이 되면 경전투기가 확실히 더 유리할 것이다. 특히 땅이 좁고 산악이 많아 비행기의 은밀기동에 유리한 우리나라에선 근접전 성능이 더 중요하다.
항공역학이나 전투기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음속의 3배를 넘는 극초음속 전투기 ‘블랙버드(SR-71)’를 개발한 바 있지만 효율성 문제로 지금은 쓰지 않는다. 보통 음속의 2배, 빨라도 2.5를 넘지 않는다. 연료 소비가 늘어날 뿐 실제 공중전에서 거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최저 속도다. 최저속도가 낮으면 항공모함 등에서 뜨고 내리기 유리하고, 공중전을 벌일 때도 갑자기 제동을 걸어 상대편 비행기를 스쳐 지나가게 한 다음 뒤를 노릴 수도 있다.
물론 F-22나 F-15, SU-27같은 고성능 중전투기들은 모두 아주 잘 설계된 비행기로, 크기에 비해 운동성능도 많이 떨어지지 않아 다방면으로 활약이 가능하다. F-16도 본래 경전투기로 개발됐지만 여러 번의 개조과정을 거쳤다. 동급의 경전투기에 비해 BVR 성능이 뛰어나고, 지상공격용 무기도 여러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 F/A-18은 처음부터 양쪽의 성능을 노리고 개발한 사례다. F-16과 비슷한 성능을 가졌지만 체구는 조금 더 크고, 기민함에서는 다소 떨어진다. F-16보다 고성능 레이더를 가지고 있으며, 두 개의 엔진을 달고 있어 안정성도 높다. 전자장비가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전투기의 주 임무는 근접전이었으므로 대부분 작고 날렵하게 만들었다. 대신 지상공격에 특화된 대형 공격기(Attacker)나 폭격기(Bomber)를 별도로 만드는 게 당연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경향이 사라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항공기 전문가)는 “전투기의 기체는 근접전과 BVR전에 두루 적용할 수 있도록 범용성 높게 개발하고, 장착하는 무장과 전자장비에 따라 조금씩 성격을 바꿔주는 식으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며 “그러나 최초 설계 때부터 중전투기나 근접전, 어느 한 쪽으로 특화시켜 설계하는 편이 성격이 확실해 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강의 조건 2 투명망토, 필요조건일까 충분조건일까
레이더의 중요성이 높아진 만큼 스텔스 기능은 ‘최강’이라는 칭호에 빼 놓을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미군이 2006년 알래스카 기지에서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22 랩터’를 가지고 당시의 주력 전투기인 F-15, F-16, F-18을 상대로 모의 공중전을 벌여 144대 0의 놀라운 기록을 올린 사실은 스텔스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단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스텔스라고 반드시 무적은 아니다. 모든 기술은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가시거리 200km에 달하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를 장착해도 스텔스 전투기엔 속수무책이듯, 스텔스 기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적 비행기보다 운동성능이 크게 떨어지면 서로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며 싸울 수 있는 근접전투에선 큰 의미가 없다. 반대로 최고의 운동성능을 갖춘 비행기라 해도 전자전 성능이 떨어지면 먼 곳에서 날아드는 유도 미사일 한 방에 격추될 수 있다. 특히 스텔스 기는 기체를 설계할 때 전파의 반사를 줄이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되므로 운동성능을 높이기 까다롭다.
현재 F-22 전투기는 완벽한 스텔스 기능으로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세계 최강이 된 것은 아니다. 첨단기술을 쏟아 부어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기존 전투기를 압도한다. 계급장(?) 떼고 붙어도 F-22가 이긴다는 의미다.
군 관계자는 “개인적인 견해로는 스텔스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F-22가 그 이전까지 최강 자리를 유지했던 F-15에 비해 상당히 유리하다”고 내다봤다. F-22는 추력 18톤짜리 엔진 두 개를 장착한데다, 추력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벡터 트러스트’ 형 노즐을 설치해 민첩성 역시 크게 높아졌다.
영국 공군은 스텔스 기능은 없지만 공중전 성능이 뛰어난 유로파이터와 F-35를 통합해 운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강력한 공격력을 갖춘 유로파이터는 공대공 작전을 이끄는 한편, 스텔스 기능이 강한 F-35는 적의 중요 기지를 공대지 미사일로 공격하거나, 대공방어망을 파괴해 단점을 서로 상쇄하겠다는 것이다.
유로파이터를 개발하고 있는 EADS의 시험 조종사 크레이그 펜라이스 씨는 한국 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스텔스는 분명 뛰어난 기술이지만 전투 상황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며 “어떤 전투기도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없는 만큼, 상황에 따른 맞춤형 전투기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유로파이터 입장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으니 이 점은 감안해야 한다.
최강의 조건 3 친구가 많아야 살아남는다
전투기의 발전상황은 다섯 단계로 나뉜다. 1세대 전투기는 제트엔진만 장착하면 됐고, 2세대부터는 초음속 비행능력을 갖추고 레이더를 탑재하기 시작했다. 3세대는 유도무기를 통해 전자전 능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퇴역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의 팬텀기(F-4) 등도 3세대 전투기에 속한다.
4세대부터는 고도의 전자전 능력을 갖추고, 음속의 2배에 가까운 초음속 성능도 갖춰야 했다. 미국의 F-14와 F-15, F-16, F/A-18, 구소련의 미그 29, SU-27, 프랑스의 미라지 2000 등이 4세대 전투기에 속한다. 4세대를 넘어서는 성능의 전투기가 스텔스 기능을 갖고 있으면 ‘5세대 전투기’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제한적인 스텔스 기능을 갖춘 F-15SE, 유로파이터 타이푼 등은 4.5세대로 분류한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6세대 전투기의 개념을 일부 내놓고 있는데, 더 강력한 스텔스 기능과 고성능 레이더, 신개념 무기(레이저 등)의 장착을 예상하고 있다. 특이할 점은 ‘네트워크’ 기능의 강화다. 적을 레이더로 추적하고 유도미사일을 쏘는 기초적인(?) 전자전 양상에서 벗어나 아군 레이더 기지와 조기경보기 등을 최대한 활용해 입체적인 전자전을 펼 수 있게 된다.
이미 4, 5세대 전투기들도 지상의 레이더 기지와 하늘의 조기경보기를 이용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전투를 펼치고 있다. 여러 대의 전투기가 서로 편대를 이뤄 레이더로 사방을 감시하고, 조종사는 자신이 발견한 적기를 아군 전투기가 갖고 있는 다른 미사일을 이용해 격추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정보전을 능숙하게 수행하면 레이더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를 격추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스텔스기가 꼭 최강의 전투기는 아니며, 막강한 먼거리 전투 및 네트워크전 능력, 그리고 뛰어난 운동성능도 함께 갖춰야 최강의 전투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군 관계자는 “미래 전장에는 이런 네트워크전이 한층 더 강화될 걸로 보이며, 전투기 고유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아군 정보를 활용해 능숙한 전자전을 펼치는 비행기가 우위에 서게 될 것”이라며 “언젠가는 대부분의 임무를 무인 항공기가 처리하는 세상이 오겠지만, 중간 단계로 유인기 1대가 여러 대의 무인기 편대를 지휘하는 형태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