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천체망원경은 사람의 눈보다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망원경이 발명되던 초기에는 망원경의 성능이 그리 좋지 못했고 맨눈 관측의 달인도 있었다. 사람의 눈과 망원경이 한판 대결을 펼쳤던 그 시절로 가보자.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맨눈으로 천체를 관측해 최고의 천문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은 덴마크의 티코 브라헤다. 그의 관측기록은 제자였던 케플러에게 전수돼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티코 브라헤에 못지않은 맨눈 관측의 달인이 있었다. 바로 폴란드의 요하네스 헤벨리우스(Johannes Hevelius)다.
헤벨리우스는 폴란드의 단치히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던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레이덴대에서 법률학을 배웠고, 시행정관과 시의원을 지냈다. 1639년 장엄한 일식을 목격한 계기로 천문학에 푹 빠졌고 사재를 털어 개인천문대를 세웠다.
당시의 천체망원경은 경통 길이가 대단히 길었다. 색수차, 즉 렌즈를 지나는 빛이 색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지는 현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망원경은 길이가 길어지면 무거워져 조정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다. 때문에 땅을 깊이 파 망원경을 설치하거나 망원경의 렌즈를 공중에 매달아 주로 하늘 높이 떠있는 천체만 관측했다.
헤벨리우스는 개인천문대에 길이가 무려 50m인 굴절망원경을 설치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였다. 그는 이 망원경을 이용해 달의 표면을 상세히 관측했다. 1647년에는 ‘월면도’(Selenographia)란 책을 저술했다.
그럼에도 헤벨리우스는 별의 위치를 측정할 때 맨눈으로 관측했다. 당시의 부실한 망원경으로 관측하기보다 과거부터 내려온 육분의를 이용해 맨눈으로 관측하는 방법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당시 망원경보다 2배 뛰어나
헤벨리우스는 별 목록에 관심이 많았다. 별 목록을 만들려면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해야 한다.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장이었던 플램스티드는 천체망원경으로 별의 위치를 열심히 관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밀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헤벨리우스의 개인천문대에는 맨눈 관측에 적합한 반경 1.5m 사분의와 반경 1.8m 육분의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과거 티코 브라헤가 썼던 육분의를 많이 개량했다. 육분의를 기준별과 관측별 양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만들고 두 사람이 동시에 관측할 수 있도록 해 오차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맨눈으로 관측했지만 헤벨리우스가 관측한 별의 위치 오차는 평균 5″(1″=3600분의 1°) 정도였고 10″을 넘지 않았다. 당시 천체망원경은 기계 구조가 열악해 10″ 정도의 오차를 가졌으므로 이것은 대단한 정밀도였다. 즉 맨눈 관측의 정밀도가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 기록을 능가했던 셈이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천체망원경의 신기한 성능에 매료돼 있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맨눈으로 한 관측이 천체망원경으로 한 관측보다 더 정밀하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플램스티드를 비롯한 천문학자들은 헤벨리우스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헤벨리우스의 관측이 정말로 정확한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관측이 그렇게 정밀한지 궁금해 했다. 이 비밀을 밝히기 위해 핼리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젊은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und Halley)가 폴란드로 떠났다.
남반구 하늘에 도전하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핼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사준 기구를 이용해 하늘을 관측하는 걸 매우 좋아했다. 자연히 그의 인생 진로는 천문학을 포함한 과학을 향했다. 옥스퍼드대에 입학한 뒤 천문학, 항해술과 관련된 수학을 배웠다. 핼리는 주로 대형 사분의와 천체망원경을 이용해 관측하기를 즐겼다.
핼리는 관측을 하면서 당시 천문표에 나타난 행성 위치에 큰 오차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플램스티드에게 알렸다. 그 뒤 달과 행성의 위치를 측정하고 태양 흑점을 관측한 기록도 플램스티드에게 보냈다. 그의 기록은 학회에 보고됐고 핼리는 유명해졌다.
당시 플램스티드는 별 위치를 측정해 목록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핼리는 이 작업이 플램스티드와 헤벨리우스 양쪽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분야에서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생각해 신천지인 남반구 하늘로 눈을 돌렸다.
핼리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 남반구를 관측할 계획을 세우고 아프리카대륙 서쪽 남위 16°에 자리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갔다. 이 섬은 당시 영국이 지배하던 최남단 지역이었다. 더구나 북반구의 별도 상당수 볼 수 있어 기준으로 삼을 만한 별도 많았다. 핼리의 아버지는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장의 3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핼리는 섬 중앙의 가장 높은 산 북쪽사면에 관측기지를 건설했다. 그곳에서 반경 18m 육분의를 제작했고, 길이 8m의 천체망원경도 설치했다. 핼리는 1년 6개월간 머물렀고 1678년 관측 기록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새로 발견한 341개 별의 위치와 밝기가 포함됐다.
맨눈 정밀도 인정한 핼리의 증명서
핼리는 남반구 하늘의 별 위치를 측정하면서 이미 관측된 북쪽 별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상당수의 기준별 위치를 헤벨리우스의 별 목록에서 참고했다. 핼리는 자신의 기록과 함께 이 사실을 헤벨리우스에게 편지로 알렸고 폴란드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헤벨리우스는 핼리를 극진히 환영했는데, 이 기회에 자신의 관측 실력을 유럽 전역에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핼리는 헤벨리우스의 천문대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함께 관측했다. ‘망원경의 신봉자’ 핼리와 ‘맨눈 관측의 달인’ 헤벨리우스 간에 한판 대결이 벌어진 셈이다. 관측 정밀도를 자부하던 핼리도 헤벨리우스의 치밀한 관측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헤벨리우스의 관측이 망원경을 따라올 수 없다는 점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맨눈 관측의 판정승이었다.
헤벨리우스는 핼리에게 관측 정밀도에 대한 증명서를 써주기를 원했고 핼리는 망설이지 않고 증명서를 써줬다. 훗날 헤벨리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핼리의 증명서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핼리가 영국의 공식적인 대표로 자신을 방문해 자기가 관측한 상당수의 별을 함께 검증한 뒤 증명서를 써줬다고 과장했다. 사실 핼리는 사적으로 헤벨리우스를 방문해 별 10여개를 함께 관측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핼리는 매우 화가 났고 플램스티드도 핼리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비난했다.
이러는 사이 망원경은 점점 개량됐고 정밀도도 향상됐다. 헤벨리우스 뒤로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맨눈 관측을 선호하지 않았다. 헤벨리우스는 최후의 맨눈 관측자였던 셈이다.
헤벨리우스의 천문대는 공교롭게도 핼리가 돌아간지 2개월 뒤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그의 천문대는 비록 개인천문대였으나 당시 유럽 최대의 천문대였다. 헤벨리우스는 천문대를 재건하고 싶었으나 결국 뜻을 못 이루고 67세 생일을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최후의 맨눈 관측자
헤벨리우스의 관측 기록은 그의 생전에 절반 정도밖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폴란드왕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별 600여개가 포함된 1564개 별의 위치를 담은 목록을 발간했다. 이 목록에는 출판자금을 지원한 폴란드 소비에스키왕을 기리기 위해 ‘소비에스키의 방패’라는 별칭을 갖는 방패자리, 헤벨리우스의 예리한 눈을 닮은 살쾡이자리, 맨눈 관측에 썼던 장비를 기린 육분의자리를 포함시켰다.
놀랍도록 정밀한 눈을 지녔던 최후의 맨눈 관측자로서 망원경과 정밀도 대결을 벌였던 헤벨리우스의 자취는 밤하늘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육분의, 사분의 : 하늘에서 각도를 정밀하게 측정해 별의 위치를 관측하는 장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