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노벨상은 세계 최고의 명예를 선사하는 상이 됐다. 그래서인지 과학자들은 점점 연구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가 아니라 비교적 나이가 들어서야 노벨상을 받는다. 이러다 보니 처음 노벨이 생각했던 것처럼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과학자가 상을 받고 이 상금이 그의 다음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사뭇 벗어났다. 물론 노벨상을 받을 욕심으로 나이 먹어서까지 더욱 열심히 연구하는 풍토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 늦게 노벨상을 받는 경향이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노벨상을 받고 나면 수상자들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 세계 최고의 명예에 걸맞는 연구를 계속할지, 아니면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억눌려 별다른 성과를 못낼지 궁금하다.
그들이 사는 4 가지 유형
미국 MIT 폴 새뮤얼슨 교수(1970년 노벨경제학상)는 노벨상을 수상한 선배들의 행동을 혹독하게 분석했다. 분석 결과 노벨이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절반은 된다고 한다. 새뮤얼슨 교수는 수상자들이 그 상금으로 더 좋은 연구를 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이미 연구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해 더 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개탄했다. 즉 노벨상 수상자들은 우쭐대며 말하기 좋아하고 자신의 연구영역도 아닌 윤리나 미래, 정치나 철학을 마구 얘기하며 언제나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지난 9월 중순 연세대 노벨포럼에서 만난 테크니온이스라엘공대 아론 치카노베르 교수처럼 노벨상을 받았다고 특별 대우하는 것에 왠지 거북해하는 사람도 있다. 치카노베르 교수는 인체세포에서 ‘유비퀴틴’이란 분자가 단백질을 분해하는 과정을 밝혀내 200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았지만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일반인처럼 생활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주간신문 ‘디 차이트’(Die Zeit)는 노벨상 수상자의 삶이 변화하는 유형을 4가지로 분류해 소개한 적이 있다. 먼저 유명세를 치른다. 스위스의 베르너 아르버 박사(1978년 생리의학상)는 “사람들은 내가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내 분야가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듣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다음으로 노벨상 수상 이후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며 연구에 심각한 지장을 받는다. 상을 늦게 받았더라면 더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또 사회단체나 언론사가 주최하는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면 기부금이 쏟아지는 귄터 블로벨 박사(1999년 생리의학상)처럼 자선사업을 하기 쉽다.
끝으로 성격이 나빠진다. 미국 생화학자 캐리 멀리스 박사(1993년 화학상)는 다른 학자가 자기 학설을 비판하자 “노벨상을 받고 나서 반박하라”는 독설을 내뱉었다고 한다.
특히 멀리스 박사는 노벨상을 수상한 뒤 엉뚱한 행동으로 세인을 의아하게 만든 적이 많다. 그는 환각제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사실을 얘기하고 다녔으며, 미국의 미식축구선수 오제이 심슨이 재판을 받을 때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멀리스 박사는 자신의 자서전에 해당하는 ‘심령마당에서의 나체춤’이라는 책에서 어느 날 밤 운전하던 중에 갑자기 영감을 받아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썼다. 물론 그가 개발한 방법은 DNA를 수만배까지 증폭시킬 수 있어 현대 유전학이나 분자구조 연구에 널리 쓰이고 의학이나 고생물학 연구에도 유용하다.
술과 종교로 달래는 스트레스
노벨상을 받으면 그만큼 기대치가 커지기 때문에 그에 맞는 성과를 내기 쉽지 않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노벨상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점을 보여준 사람 가운데 조르주 샤르파크 박사가 있다. 그는 폴란드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해 노벨상을 받은 실험물리학자다. 샤르파크 박사는 ‘다중선 챔버’(multi-wire proportional chamber)라는 입자검출기를 개발한 업적으로 199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가 1968년 개발한 ‘다중선 챔버’는 당시 실험장비를 혁신적으로 개선해 정밀도를 높인 장비였다. 그뒤 참 쿼크, W입자, Z입자 같은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샤르파크 박사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68세였으니까 그뒤 왕성한 연구를 기대하기는 무리였을지 모른다. 실제 그는 노벨상을 받은 뒤 연구보다 교육에 더 큰 열정을 나타냈고 나중에는 거의 연구를 중단한 채 기념식이나 연회를 쫓아다니며 술에 취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노벨상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걱정했다. 물론 그가 발명해놓은 기구는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샤르파크 박사에 비하면 왕성하게 연구할 나이인 49세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찰스 타운스 교수 역시 ‘노벨상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
1964년 노벨상을 수상하기 이전 그의 경력은 화려하기만 했다. 겨우 24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핵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이 전쟁을 우세하게 이끄는데 공헌한 고성능레이더를 개발했다. 1951년에는 레이저의 전신인 ‘메이저’(MASER)라는 장비를 발명했다. 이를 이용해 우주에 존재하는 복잡한 분자를 관측했고 우리은하 중앙에 있는 블랙홀의 질량을 재는데 처음 성공했다. 35세에 컬럼비아대 정교수가 됐고 10년 뒤 겨우 46세의 나이에 MIT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부총장으로 부임했다. 1964년 노벨상을 받자 연구에 힘을 쏟고 싶은 마음에 부총장직을 사임하고 교수로 돌아갔으며 3년 뒤엔 캘리포니아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교육과 연구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타운스 교수는 노벨상을 수상한 뒤 신학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신학 연구 덕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템플턴 상’을 받을 정도였으며 많은 대학에서 주로 신학으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55세 이후 물리학 논문으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그뒤에도 그가 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메이저의 후속연구에 대해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고 평했다.
노벨상을 수상하고 다른 분야로 전공을 바꾼 과학자가 많다. 한편으로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옮기는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공을 바꾼 이들 가운데 다시 좋은 업적을 낸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성공한 경우는 제법 있다.
슈뢰딩거와 크릭의 공통점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을 만들어 1933년 46세의 나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슈뢰딩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사는 유대인이라 노벨상을 받은 해부터 방랑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 정부가 유대인을 박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 벨기에의 여러 연구소로 전전하다가 1940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고등연구소로 갔다.
슈뢰딩거는 15년간 아일랜드에 머무르면서 과학철학과 과학사를 연구했다. 이 시절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얇지만 중요한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의 흐름에는 중요한 코드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나중에 발견된 DNA(디옥시리보핵산)의 존재를 예측한 셈이 됐다. 분자생물학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외에도 슈뢰딩거는 고대 서양언어에 심취해 고대 언어의 구조와 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연구하는데 탐닉했다. 이러면서도 그는 양자역학을 이용해 통계물리학에 대한 연구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노벨상을 받기 전에 전공을 바꿔 좋은 결과를 얻은 예도 있다. DNA의 구조를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연구해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 제임스 왓슨, 모리스 윌킨스 가운데 크릭과 윌킨스가 그 주인공이다. 크릭은 물리학 박사학위논문을 쓰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해야 했다. 군대생활을 끝내고는 생물학을 전공하기 시작했고 1950년 34살의 나이에 X선 회절을 이용해 단백질 구조를 연구한 결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가 물리학을 공부했다는 점이 유용했다. 1951년부터 왓슨, 윌킨스와 함께 DNA의 구조를 연구했고 1953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표했다. 윌킨스는 1940년 24살의 나이로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고 1946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로 옮겨 생물물리학 분야에 뛰어들었다.
노벨상을 받고 전공을 바꾼 뒤 그 분야에서 좋은 업적을 쌓아 노벨상을 또 받은 경우도 있다. 1954년 노벨화학상을,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폴링이다. 폴링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모두에 관심을 갖고 독보적인 연구를 했으며 특히 ‘화학결합의 특성 그리고 분자와 결정의 구조’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뒤에는 핵무기개발에 대한 위험을 인식하고 1958년 핵무기실험의 중단을 촉구하는 전세계 1만1021명 과학자들의 청원서를 UN에 제출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가치관, 하고 싶은 욕망에 더 충실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틀린 업적 넘어서다
그래도 대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는 자신이 쌓은 업적과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는 역할을 하면서 남은 일생을 보냈다. 196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한스 베테 박사는 노벨상을 받은 뒤 오히려 더 왕성하게 연구한 대표적 과학자다. 심지어 자신의 노벨상 수상업적이 틀렸다는 사실을 손수 밝혀냈다.
21세에 핵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낸 그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해 중수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정확하게 제시하며 핵반응의 난제를 하나씩 풀어갔다. 마침내 별에서 어떻게 에너지가 발생하는지 밝혀냈다. 무거운 핵에 양성자가 융합하며 탄소-질소-산소(CNO)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핵반응에너지가 태양 같은 별의 에너지였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으로 그는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베테 박사는 이와 달리 태양에너지가 양성자-중수소-헬륨으로 변하는 과정(pp순환)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이 사실을 직접 연구해 밝혔고 잘못된 처음 주장을 수정했다. 80세가 넘어서도 블랙홀에 이르는 과정을 밝히고 우주에 존재하는 블랙홀 수를 계산해 발표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96세 때까지 논문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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