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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가 말할 수 있는 진실

공부 잘하는 DNA는 없다

“어차피 미국에서 유전자 (검사) 결과만 나오면, 그 녀석은 그걸로 끝나는 거야.”

자신의 DNA를 부인할 수 있을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반장이 내뱉은 말엔 유전자 검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난다. 유전자 감식 결과는 얼마 전 프랑스인 부부가 용의자로 지목된 서울 서래마을의 영아 살인사건에서도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됐다.

최근 유전자 검사를 이용해 천식, 고혈압 같은 질병에다 체력, 비만 위험, 탐구심까지 알아볼 수 있다는 검사상품이 등장했다. “유전자 검사로 인성을 파악하고 진로지도도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업체들은 ‘학생을 위한 유전자 검사’‘아름다운 여성을 위한 유전자 검사’같은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유전자 검사의 생명은 정밀도다. 한 연구원이 질소 탱크에서 냉동된 유전자 샘플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다.


타고난 우등생은 없다

유전자로 내 학습능력을 알아본다? 만약 유전적으로 학습 능력이 낮다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말 아닌가. 정말 그럴까. 유전자가 말할 수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유전자로 학습 능력이나 지능을 어떻게 검사할까. 학습 관련 유전자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 ‘아이디엔에이’ 관계자는 “탐구심 관련 유전자를 검사해 학습 능력을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의 수용체를 만드는 ‘DRD4’ 유전자가 탐구심과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이 유전자에서 일부 염기서열이 반복될수록 새로운 것을 찾는(novelty seeking) 성향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에 학습 의욕도 높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경진 교수는 “학습이나 기억 메커니즘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유전자로 학습 능력을 검증한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성인병이나 암은 유전자 검사로 위험을 진단할 수 있지만, 지능이나 기억 같은 고등 정신능력은 여러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예측이 아주 어렵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많은 업체에서 ‘학습 능력 유전자 검사’라는 명목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학습과 무관한 체력이나 비만, 중독성, 천식, 우울증 관련 유전자를 검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체력이나 우울증을 유전자 검사로 알아볼 수 있다는 근거가 불분명하며, 더구나 지적 능력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데도 상업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술 더 떠 한 유전자 검사업체가 ‘주부의 건강을 위해’ 시행하는 ‘아름다운 여성’ 유전자 검사에는 도파민 수용체인 ‘DRD2’라는 중독성 관련 유전자와 알코올 분해효소인 ‘ALDH2’ 유전자 검사도 들어간다. 중독성과 알코올 분해 능력에 이상이 있으면 건강한 주부가 아니니까 결국 아름다운 여성이 될 수 없는 세상이다.
 

유전자 검사 과정^검사 대상자의 DNA를 채취해 화학적 처리를 거친 다음 분석기에 넣으면 자신의 특정 유전형질을 알아볼 수 있다.


‘비만 유전자’ 검사는 무효

그럼 유전자 검사로 ‘정말로’ 알아볼 수 있는 특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친자 확인 감식이 있다. 두 사람의 DNA를 직접 대조하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분명하고 결과가 매우 정확하다. 유전자 감정서는 친자 관계가 성립할 확률을 ‘99.99996916%’처럼 수치로 표시해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전자 검사의 신뢰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암을 비롯한 일부 질환 검사도 믿을 수 있는 수준이다. 현재 많은 병원에서는 고혈압, 골다공증, 동맥경화증, 알츠하이머병(치매), 당뇨병, 관절염 등과 함께 폐암, 위암, 식도암, 유방암, 자궁암 등 10여 가지 암의 발병 위험성을 유전자 검사로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특정 암이나 당뇨병을 비롯한 일부 질병은 유전적 특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 검사의 경우 100여개 암 억제 관련 유전자의 변이 여부를 검사한다. ‘BRCA1’ 유전자에 이상이 있으면 ‘유방암에 걸릴 위험이 높은 편’, ‘CYP1A1’ 유전자는 폐암 관련 유전자라는 식이다.

그러나 비만, 우울증 등 개별 형질에 대한 유전자 검사의 정확성은 상대적으로 불확실하다. 검사의 정확성이 지금까지 누적된 통계 자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특정 유전자에 대한 검사 데이터가 많이 쌓일수록 신뢰도가 높다. 그러나 사람마다 유전자에 많은 편차가 있고, ‘나쁜’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서 꼭 그 형질이 발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비만이나 우울증 검사는 친자 확인 검사처럼 확실한 수치가 나올 수 없다. 다만 발병 위험을 ‘높음’ ‘다소 낮음’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유전자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는 지능이나 학업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시험관 속에 담긴 사람들을 형상화해 유전자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풍자했다.


자신의 미래는 노력이 만든다

업체들은 ‘체력 유전자’로 알려진 ‘ACE’를 분석해서 검사 대상자의 잠재적 체력을 ‘강’ ‘중’ ‘약’으로 나눠 알려준다. 하지만 ‘강’을 받았다고 그 사람의 체력이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강한 체력을 발휘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을 확률이 높을 따름이다.

그럼 ACE 유전자가 체력과 관계가 있다는 판단에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 유전자 검사업체 휴먼패스 이승재 대표이사의 설명이다.

“운동선수들의 유전자를 조사했더니 그 중 70~

80%는 ACE 유전자가 ‘강’에 해당하 는 ‘II’형이었습니다. 반면 학자들이나 연예인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이나 ‘약’에 해당하는 ‘ID’형과 ‘DD’형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이렇게 누적된 통계 결과를 바탕으로 ACE 유전자가 ‘강’이면 체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실제 능력은 유전 형질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죠.”

지난 2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유전자 검사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성년자에 한해 치매 유전자 검사를 규제했다. 비만은 아예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는 항목이다. 유전적 연관성이 불확실하고 다른 요인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체력, 우울증, 장수, 골다공증 유전자와 큰 키를 만든다는 이른바 ‘롱다리 유전자’ 등 18개 항목 역시 같은 이유로 규제를 검토하고 있다.

현재 많은 업체들은 전체 비만인구 가운데 95%에서 변이가 일어난 특정 유전자를 비만 검사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도 다른 유전자나 나쁜 식습관, 운동 부족 때문에 비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전자 때문에 비만에 걸린 것인지, 비만해지면서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난 것인지도 아직 불확실하다.

김경진 교수는 “유전자 검사에서 말하는 비만, 성인병, 암 발병 가능성 등은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예방 차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특정 질환을 막는 유전자에 이상이 있으면 발병 위험이 높다는 뜻이므로 자신의 취약점을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우수한 유전형질을 향한 집착을 그린 영화 ‘가타카’(GATTACA)의 등장인물처럼 ‘유전자 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유전자를 바라보는 장밋빛 색안경을 벗어던지자. 비만 유전자를 가졌다고 실의에 빠질 필요도, 있지도 않은 학습 유전자가 나쁘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미래는 유전자가 아닌 노력이 만드는 것이니까.
 

유전자 분석으로 얻은 DNA 염기서열에 커뮾터로 색을 입혔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유전자 검사 금지를 검토 중인 20개 항목
체력, 우울, 호기심, 지능, 장수, 비만, 롱다리, 폭력성, 치매, 고혈압, 알코올 분해, 당뇨병, 천식, 고지혈증, 골다공증, 강직성 척추염, 백혈병, 유방암, 폐암,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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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상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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