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났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할까. 찬물을 부어야 할까. 박광수(부산 센텀중 1년)군이 선택한 논문 주제다. 박군은 뜨거운 물이 찬물보다 더 빨리 어는 점에 착안해 탐구 주제를 잡았다.
“물이 불을 끄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발화점 아래로 온도를 낮추고 수증기를 만들어 산소를 차단하기 때문이죠. 둘 다 기화(액체가 끓어 기체가 되는 현상)랑 관련있어요. 그러니 뜨거운 물이 불을 더 빨리 끄지 않을까요?”
실험을 설계하기 위해 선행 연구를 찾고 있는 박군은 “아직 잘 모르겠다”면서도 조목조목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옆에서 박군의 이야기를 듣던 이희권(충청남도 과학고) 교사는 “나무에 붙은 불, 기름 위에 붙은 불처럼 불에도 종류가 있으니 실험 변인을 더 자세히 구분해야 한다”며 박군이 간과한 부분을 지적한다.
한국 쓰리엠이 지난 8월 12~15일 경기도 이천에서 개최한 ‘3M 사이언스 캠프’에 참여한 박군의 모습이다.
역량 있는 보조교사
한국 쓰리엠은 2002년부터 과학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여름마다 ‘3M 사이언스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108명의 학생들이 특허를 받기 위한 실용신안을 작성하거나(발명반)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을 실험으로 증명하는 탐구 설계안을 만들어(논문반) 캠프 마지막 날 발표해야한다.
얼핏 보기에도 녹록찮은 과제지만 조은지(대구 시지중 1년)양은 “하면 되죠”라며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조양은 특허청 홈페이지에서 ‘책을 성기게 꽂아도 한쪽으로 쓰러지지 않는 책꽂이’가 이미 특허 등록이 된 건 아닌지 검색하는 중이다.
“어린데도 과제 집중도가 뛰어나다.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오락이나 인터넷 서핑을 할 만도 한데 딴짓하는 친구가 없다”고 보조교사 김원태(충남대 기계공학과 2년)씨는 말한다. 김씨는 지난 5월에 열린 국제 과학기술 박람회(ISEF)에서 공학부문 세계 4위에 오른 인재다.
3M 캠프에는 이런 수준높은 보조교사 26명이 학생들의 실용신안이나 과학논문 작성을 돕는다. 이들은 모두 대학생 지식공동체인 ‘라퓨타’(LAFUTA) 회원으로 캠프가 열리기도 전에 담당 학생에게 연락해 발명 아이템이나 논문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열의를 보인다. 이런 ‘사전 작업’ 덕에 학생들은 큰 무리없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과제를 완성할 수 있다.
보조교사 26명이 갖고 있는 특허와 실용신안만 400여개. 대통령표창, 대한민국 발명경진대회 국무총리상 등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해 학생들의 궁금증을 채워주고 과제 수행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도와주는데 손색이 없다.
발명반을 지도하는 오기영(대전 대신고) 교사는 “3M 캠프의 핵심은 우수한 보조교사”라며 “다른 캠프가 3M캠프만큼 심화된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오 교사는 올해로 5회를 맞는 3M 캠프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여해 단단하게 굳은 학생들의 사고방식을 깨는 역할을 한다. 그는 첫 시간에 음악 두 곡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처음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의 곡. 두 번째 음악은 모차르트의 소야곡. 거의 비슷하지만 디터스도르프의 곡은 단조로운데 반해 모차르트의 곡은 음 높이가 변하면서 산뜻한 느낌을 준다.
오 교사는 두 음악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발명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바꾸는 진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엉뚱한 생각은 ‘진화’의 바탕이 되지만 과학적 근거 없는 아이디어만으로는 발명을 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특허만 50개를 갖고 있는 보조교사 박현우(성균관대 전기공학과 1년)씨는 3M 캠프를 “소규모 교육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에서 몇 명만 뽑혀 받았던 수업을 이 학생들은 중학교 때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씨는 “처음 발명에 관한 교육을 받으면서 은행원이나 해야겠다던 꿈이 시스템 경영자로 바뀌었다”고 했다.
캠프의 혜택을 아는 걸까. 빡빡한 캠프일정을 소화하면서 책과 보고서를 붙잡은 학생들은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않는다. “빨리 들어가서 자라”는 캠프 운영자의 말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답한다. “왜 자라고 하세요? 할 거 다하면 잘 거예요.” 힘들지 않냐는 물음엔 “재밌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마에 구슬땀이 맺혀도 똘망똘망한 눈망울은 감길 줄을 모른다.
재미와 성취, 두 마리 토끼를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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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버스 안에서 ‘코난’이 악당들을 향해 들어 올린 글이다. 무슨 뜻일까.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본 버스 운전사만이 그 답을 안다. “STOP” 좌우가 바뀌어 보이는 거울의 특성을 이용한 코난의 재치다. 여러분은 거울로 어떤 발명을 할 수 있을까?
TV 만화 ‘명탐정 코난’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김종헌(대전 둔산여고) 교사는 다양한 거울의 특성을 실험을 통해 보여준 다음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물을 크게 보여주는 오목거울을 마스카라 통에 붙이면 화장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식판에 거울을 붙이면 밥을 먹은 다음 이에 음식물이 끼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손을 번쩍 들어 답하는 학생들의 대답이 제법 그럴싸하다.
참가한 학생들은 실용신안이나 논문작성 같은 개인과제 외에도 롤러코스터 만들기, 물풍선을 가장 멀리 날릴 수 있는 발사체 만들기, 범죄현장에서 혈흔 찾기 등 다양한 수업을 듣는다. 모두 주어진 재료를 이용해 가장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형식으로 정해진 대로 따라하기만 하는 학교실험과는 차이가 있다.
“힘들어요. 그런데 재미있어요.” “또 오고 싶어요.” 캠프 마지막 날, 학생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 어려운 과제를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완성했다고 한다.
뜨거운 물이 불을 더 빨리 끈다는 주제로 논문을 썼던 박군은 수상에서 탈락했다. “다른 친구들이 저보다 더 잘했어요. 발표도 못했고 선행연구 자료도 많이 못찾았어요.” 박군이 스스로 내놓은 총평이다. 박군은 “캠프 동안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게 가장 즐거웠다”며 “집에 돌아가서 내가 쓴 논문을 검증하는 실험을 더 구체적으로 설계해 보겠다”고 말했다.
박군을 지도한 이희권 교사는 “3M 캠프의 목표는 엉뚱한 생각을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법’으로 표현하는데 있다”며 “이만하면 이번 캠프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고도 남은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