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남아메리카, 말라리아에 걸린 한 인디언이 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씻은 듯 병이 나았다. 웅덩이 주변 ‘키나키나’라는 나무의 퀴닌 성분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스페인으로 전해져 말라리아 특효약이 탄생했다. 항생제 페니실린은 20세기 초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세균감염 실수로 발견했고, 발매 6개월 만에 4000억원을 벌어들인 비아그라(Viagra)는 심장병치료제로 개발되다가 우연히 발기부전에 약효가 있는 것이 발견돼 발기부전치료제로 개발됐다.
신약 개발의 역사를 보면 약은 대부분 우연히 발견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 ‘고의’로 신약을 변신시켜 만든 새로운 약이 제약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척박한 신약개발 땅에 핀 꽃
약을 뜻하는 영어 ‘Drug’의 어원은 ‘마른 풀’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Drogue’에서 비롯됐다. 오랜 옛날 동물들이 아플 때 특정한 풀을 뜯어먹는다는 것을 알고 약으로 사용했다는 설이다. 질병과 약은 자물쇠와 열쇠의 관계다. 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자물쇠라고 한다면 이 단백질에 작용해 병균을 사멸시키거나 기능을 마비시켜 병을 낫게 하는 열쇠가 약이다.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 화이자(1849년)나 우리나라의 동화약품(1897년) 같은 현대적 의미의 제약회사가 출현하기 전인 19세기 초반까지는 주로 식물, 동물 등 천연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단순하게 가공해 치료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약효가 있는 동식물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약국은 각종 식물로 넘쳐나고 약용으로 사육할 동물원을 따로 둬야 한다. 게다가 전염병이라도 생겨 많은 약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생겨난다. ‘대량 생산’이다. 약효는 그대로 유지하되 대량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합성 의약품이 생겨난 것이다. 20세기 초 페니실린이 최초로 대량 생산에 성공하면서 의약품 제조에 눈을 떴다. 다양한 의약품의 개발로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기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같은 정부기관이 생겨났고 각종 허가규정과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신약’에 대한 개념이 탄생했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효능의 약을 개발할지 설정한 다음 신물질을 설계, 합성해 ‘선도물질’을 도출하고 검증해 ‘후보물질’을 선정하면서 본격적인 신약개발이 시작된다. 대량으로 제조할 공정을 개발하고 여러 단계의 임상시험을 거쳐야 비로소 신약이 탄생된다. 개발 기간은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 장기간의 연구기간이 필요한 만큼 막대한 비용이 따르고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다. 신약 하나가 탄생하기까지의 성공 확률은 1만분의 1정도다.
지금까지 개발된 우리나라 신약은 모두 12개. 1999년 국내 제약산업 100년사에 최초 신약인 항암제 ‘선플라’가 탄생했고, 2003년에는 항생제 ‘팩티브’가 FDA에서 신약 시판승인을 획득했다. 우리나라 신약 개발의 역사가 20년 정도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연간 7천여 건의 신약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점은 열악한 우리나라 신약 개발의 현실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신약 개발의 배경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개량신약’이다. 신약을 변신시켜 새로운 약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연구개발이 쉽고 개발 비용을 최대 3분의 1로 줄일 수 있으며, 개발 기간이 비교적 짧다. 게다가 신약에 버금가는 부가가치를 창출해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다.
신약, 제네릭 그리고 개량신약
약을 구분할 때 신약, 제네릭, 개량신약으로 크게 나눈다. 신약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구조의 약을 의미한다. 신약 개발에는 10년 이상의 개발 기간이 필요하므로 일정기간 동안 특허로 보호받는다. 제품화된 약의 기초가 되는 물질특허의 경우 20년이다. 특허 기간이 끝나면 누구나 똑같은 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제네릭(Generic)이라고 하며 일종의 복제품이다. 개량신약은 그 단어의 의미처럼 기존 약물보다 효능을 높이거나 안전성과 편의성을 개선한 약으로 개량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약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드세요.” “빨간약 한 알과 노란 약 두 개를 같이 드셔야 해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왜?’라고 의심해 본 사람의 거의 없다. 자칫하면 약 먹는 시간을 지나치기 쉽고 여러 개의 약을 먹는 점도 부담이다. 개량신약은 이런 불편함을 없애려는 노력으로 개발된다.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의미는 약효의 지속시간을 말한다. 다른 약을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약효가 떨어지거나 다른 보충제가 필요해서다.
이런 약에 대한 여러 불편을 줄이기 위해 물질 구조를 일부 변형하여 우수한 물성이나 약효를 갖게 하거나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을 섞어서 하나의 약으로 만든 것이 바로 개량신약이다.
신약을 개발해 제조승인을 받기까지는 개발 단계에서 동물 실험을 통한 전임상시험 결과 뿐만 아니라 여러 단계의 임상시험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제네릭의 경우 이미 오리지널 신약이 모든 단계의 임상자료가 승인된 상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하지만 개량신약은 오리지널 신약의 단순복제가 아니라 구조를 변경하거나 함량을 늘리는 등 제네릭과는 다른 방법으로 개발하기 때문에 승인 역시 제네릭 보다는 임상시험 결과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개량신약을 ‘자료제출 의약품’이라고도 한다.
아모디핀에서 트라스트 패치까지
2006년 현재 국내에서 개발된 개량신약은 약 80개. 지난 100년 동안 국내에서 개발한 오리지널 신약이 12개인 것에 비교하면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개량신약은 한미약품의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이다. 개량 대상은 미국 화이자사의 ‘노바스크’로 고혈압치료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약이다. 하지만 노바스크는 빛에 굉장히 민감해 조금만 노출돼도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아모디핀은 이런 광안정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구조변경 개량신약이다.
‘노란색’으로 유명한 SK케미칼의 트라스트 패치는 약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투여 방법을 바꾼 신규제제 개량신약이다. 강한 진통 효과를 가진 ‘피록시캄’은 먹는 관절염 치료약물이지만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위출혈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단점이 있었다. 트라스트 패치는 이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피부에 붙이는 경피흡수제로 개량한 것이다.
(주)유유의 골다공증 치료제 ‘맥스마빌’은 오리지널 약물인 미국 머크사의 ‘포사맥스’를 개량한 복합제 개량신약이다. 포사맥스는 알레드로네이트라는 골다공증 치료 물질로, 비타민 D와 칼슘을 별도로 섭취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맥스마빌은 알레드로네이트에 비타민 D를 복합해 하나의 약으로 만들어 냈다.
1990년대부터 의약품의 분류에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 ‘개량신약’은 이제 서서히 자리를 굳히고 있다. 소위 ‘블록버스터’로 부를 만한 개량신약들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공군이 사용한 4.5톤짜리 폭탄으로 도심의 한 구역을 모두 날려 버릴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죠스가 1억달러의 흥행 실적을 올리면서 등장한 블록버스터의 의미가 이제 제약계에도 도입되고 있다.
블록버스터 개량신약
대표적인 블럭버스터 개량신약으로 한 해 동안 10조원의 매출을 올린 미국 화이자사의 콜레스테롤 저하제 ‘리피도’가 있다. 고혈압치료제 ‘노바스크’는 한 해 동안 세계적으로 4조5천억원 어치가 팔렸다. 기존제품의 약효시간을 늘리고 투여의 편리성을 향상시킨 ‘포사맥스’도 한 해 동안 3조원 이상의 막대한 매출실적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개량신약 성공 사례가 있다.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은 출시 1년도 채 안 되는 시점에서 4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고 트라스트는 200억원이 넘는 매출액에 40억원 이상의 순이익을 남기고 있다. 니코틴 패치제 ‘니코스탑’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신약개발과 비교해 적은 연구비 투자에도 불구하고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개량신약은 단순히 개발된 약의 판매 부가가치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개발과정에서 생긴 노하우는 기술 수출로도 이어진다. 한미약품이 면역억제제 개발과정에서 알게 된 녹지 않는 약물을 녹이는 기술인 ‘마이크로에멀전’ 은 스위스 노바티스에 수출해 1000억원에 이르는 기술료를 받고 있다.
지난 10년 간 미국 FDA에서 승인된 전체 의약품 가운데 개량신약이 신약을 앞섰다. 오리지널 신약회사들도 개량신약 개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개발한 신약을 개량해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기술 개발을 통해 특허 보호 기간을 늘리려는 목적이다. 아울러 제네릭 회사들도 특허분쟁 위험이 있고 독점기간이 끝나면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단순 제네릭 보다는 제품의 성능을 개선시킨 개량신약 개발을 통해 오리지널 제품의 특허 장벽을 극복하고, 독점적인 판매기간을 보장받으려는 노력이 주류를 이룬다.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
개량신약 개발이 촉진됨에 따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제네릭 및 개량신약에 대한 법률도 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도 지난 2002년에 ‘의약품임상시험계획 승인지침’을 고시해 개량신약의 개발기간과 비용을 대폭 줄이고 있다.
한미약품연구센터 이관순 소장은 “개발 기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신약은 선진국의 거대 제약회사와의 경쟁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비용과 개발 기간이 짧은 개량신약 기술로 세계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현재 국내에서 개발 중인 대다수 신약은 해외에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거나 FDA의 임상시험 승인을 획득한 일부 약물을 제외하고 국내 시판용 신약이다. 세계 1%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의약품 시장만으로는 신약개발 산업 성장에 한계가 있다. 신약으로 고부가가치를 내기 위해서는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일정 영역을 차지할 수 있는 수출 지향형 혁신 신약 개발을 전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패치와 파스의 차이점
붙이는 약 중에는 패치와 파스가 있다. 패치는 약물을 지지체에 직접 담아 피부를 통해 직접 투여하도록 만든 치료제고, 파스는 아픈 부위를 자극하고 혈액순환을 촉진해 통증을 없애는 일종의 진통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