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무엇이든 만드는 만능인쇄시대

세포도 프린트해서 인공장기 제조

'샤넬 넘버5’의 향에 취하고 싶다면? TV를 틀어보자. 디지털 신호로 바뀐 최고급 향수가 당신의 코를 즐겁게 해줄 테니. 청량음료에 띄울 차가운 얼음이 필요한가? 스피커를 켜자. 스피커에서 발생한 음파가 냉각관을 진동시켜 냉각효과를 낸다.

이번엔 절박한 상황이다. 화상을 크게 입어 이식할 피부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겠는가?

원하는 만큼 뿌려줍니다

피부를 ‘프린트’하면 된다. 그런데 요즘 많이 쓰이는 레이저 프린터로는 불가능하다. 레이저 프린터에 밀려 ‘구닥다리’로 취급받던 잉크젯 프린터가 필요하다.

최근 잉크젯 프린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원한 파트너일 것만 같았던 종이를 떠나 전자산업과 생명공학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휴대전화 같은 각종 전자제품을 한 번에 찍어내듯 만들고, 인체의 피부 조직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데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핵심 아이디어는 바로 ‘젯’(jet)에 있다. 단어 뜻 그대로 잉크를 분사하는 기술을 활용하는 것.

잉크젯 프린터는 카트리지에 든 잉크를 분사시켜 이미지를 만든다. 프린터가 전기신호를 보내면 압전소자가 늘어나 주사기처럼 잉크를 노즐 앞까지 밀어낸다.

그 뒤 재빨리 전류를 차단하면 압전소자와 함께 잉크도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노즐 앞까지 밀려났던 잉크는 작은 방울이 돼 떨어진다. 전류의 세기를 조절하면 분사되는 잉크방울의 크기와 양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DNA칩이다. DNA칩은 유리 기판에 DNA를 촘촘히 심은 다음 혈액과 반응시켜 유전자의 발현 여부를 알아보는 장치다.

DNA칩을 만드는 방법은 유전자 시료를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잉크 분사 기술을 이용하면 DNA칩 표면에 나있는 미세한 홈에 원하는 양만큼 DNA를 뿌릴 수 있다. 전류의 세기를 변화시키면서 시료의 양을 매우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계적인 프린터 제조업체 휴렛패커드(HP)의 자회사 애질런트테크놀로지는 2002년 모기업인 HP의 대형 잉크젯 프린터를 이용해 DNA칩을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지난해 캐논 역시 자사의 잉크젯 프린터 기술을 이용해 DNA칩을 개발했다. 캐논에 따르면 한번에 4피코리터(피코리터=1조분의 1리터)라는 극소량을 분사하기 때문에 1000가지 시료를 동시에 기판 위에 뿌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덕분에 검사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대폭 줄었다. 

리소그래피 저리 가!

DNA칩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잉크 분사 기술을 이용한 3차원 ‘프린트’다. 카트리지에 기존의 잉크 대신 액체 상태의 고분자나 생체물질을 넣은 뒤 이들을 층층이 분사하는 것.

2002년 말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국제 로봇 알고리즘 워크숍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존 캐니 교수가 잉크젯 프린터로 일체형 전자제품을 찍어내는 아이디어를 발표하면서 3차원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캐니 교수팀은 잉크젯 카트리지에 여러 가지 색의 잉크 대신 전자회로에 필요한 고분자를 넣었다. 기존에는 제품의 케이스를 만들고 그 속에 전기회로판을 비롯해 각종 부품과 스위치를 채웠다. 그런데 이들의 소재가 되는 고분자를 분사하면서 층층이 쌓아올리면 제품의 전기회로를 한 번에 찍어낼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방법을 이용해 트랜지스터, 콘덴서, 유도 코일, 반도체 부품 등을 제작했다.

기업에서 이 기술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제품을 한 번에 제작하기 때문에 일일이 조립하는 과정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부품이나 스위치를 수작업으로 끼워 넣을 필요가 없어 생산단가도 크게 낮아진다.

최근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잉크젯 프린팅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LCD, PDP와 LCD 사이의 기술 격차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사용하면 디스플레이 생산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는 OLED의 가장 큰 당면과제인 대형화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현재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반도체를 제조하는 핵심 기술은 리소그래피(lithography)다. 리소그래피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복잡한 회로의 설계 패턴을 옮기기 위해 짧은 파장의 빛을 이용해 서로 다른 회로 모양을 층층이 쌓는다.

하지만 금처럼 값비싼 재료들을 웨이퍼에 뿌린 뒤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깎아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낭비가 심했다. 하지만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사용하면 버리는 부분이 없다.

2004년 엡손은 독자적인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응용해 세계 최초로 40인치 대형 OLED 개발에 성공했다. 이 분야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기업인 케임브리지 디스플레이 테크놀로지(CDT) 역시 고분자 화소를 제작할 수 있는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개발해 지난해 5.5인치와 14인치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가 오는 2007년 중반에 가동하는 8세대 LCD 라인부터 잉크젯 프린트 공정을 적용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리소그래피 공정을 대신해 차세대 기술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한다.
 

잉크 분사 기술을 활용해 DNA칩을 만들면 시료의 양을 정확히 조절할 수 있다. 세계적인 DNA칩 제조사인 미국 애피매트릭스(Affymetrix)에서 불량 칩을 가려내고 있다.


피부면 피부, 뼈면 뼈

살아있는 세포는 잉크젯 기술로 프린트할 수 없을까. 최근 생명공학자들은 잉크젯 기술을 이용한 조직 공학(Tissue Engineering)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03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대의 블라디미르 미르노프 박사팀은 잉크 대신 세포 덩어리를 특수한 틀 위에 여러 층으로 분사해 3차원 튜브 모양의 생체 조직을 합성했다. 카트리지에 세포를 주입하고, 이를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무독성 젤로 된 입체 틀 위에 분사해 원하는 형태의 세포층을 찍어냈다.

세포층 위에 다시 얇은 젤 층과 세포층을 반복해 쌓아올려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면, 젤 층은 시간이 지나면 분해돼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세포들이 서로 결합한 생체조직만 남게 된다.

이 방법으로 인공 장기를 만들 수 있다. 세포를 배양해 인공 장기를 만드는 기존의 방법 보다 시간이 훨씬 절약된다. 인간의 신장 같은 5cm 두께의 생체조직을 찍어내는데 이론적으로 2시간이면 된다. 2003년 당시 미국 CNN은 세상을 바꿀 5대 기술 중 하나로 ‘생체조직 프린터’를 선정했다.

2004년 미국 MIT의 바칸티 교수팀은 쥐에 사람 귀 모양의 틀(스캐폴드)을 붙인 뒤 이를 실제 사람 귀로 성장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때 스캐폴드에 세포를 뿌리는데 사용된 방법은 잉크젯 프린팅 기술이었다.

지난해 영국 맨체스터대 브라이언 더비 교수팀 역시 잉크젯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피부와 뼈를 만드는 방법을 발표했다. 기본적인 방식은 다른 연구팀과 동일하다. 세포를 프린트하듯 여러 겹의 얇은 층상구조로 찍어낸다.

대신 조직 하나를 만드는데 하루면 될 정도로 세포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특히 기존 방법으로는 두께가 수mm인 조직밖에 만들 수 없어 인공 피부 외에 연골 같은 골격은 만들 수 없었다. 현재 연구팀은 두께가 수 cm에 이르는 골격조직을 만들 수 있는 3차원 잉크젯 프린터를 개발 중이다.

지난 1월에는 영국 런던칼리지 수완 자야싱헤 박사팀과 킹스컬리지 연구팀이 쥐의 뇌세포와 인간의 T세포를 잉크젯 기술로 프린트하는데 성공했다. 기존 세포 분사 기술의 한계는 노즐의 지름에 따라 분사되는 세포(액체상태)의 크기가 정해졌다는 것. 지금까지 가장 작은 크기는 20마이크로미터(μm)였다.

연구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만V의 고전압을 걸고 그 속으로 세포를 통과시켰다. 세포는 전기장을 지나면서 수μm의 방울로 분사됐다. 높은 전압을 걸었지만 세포는 파괴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바이오테크놀로지 저널’ 최신호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면 생체 조직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포 프린팅 기술


무병장수의 꿈

일각에서는 잉크젯 프린팅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잉크젯 기술로 찍어낸 전자제품은 한 번 고장나면 부품을 교체할 수 없기 때문에 수리할 수 없다. 반도체 등의 재료가 될 고분자는 기존 실리콘보다 가격이 싸지만 성능이 떨어진다.

신장 같이 큰 장기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프린팅 기술로 세포가 빨리 증식할 경우 비정상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무병장수와 영생(永生)을 꿈꾸는 이상, 머지않아 깨끗한 얼굴 피부를 프린트해 하루를 시작하고 인체에 생기는 질병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천덕꾸러기였던 잉크젯 프린터가 새롭게 보이지 않는가.
 

01 영국 맨체스터대 더비 박사팀은 살아있는 동물 세포를 잉크젯 프린터에 통과시켜 인공피부와 뼈를 만들 수 있음을 보였다. 사진은 스캐폴드 안의 연골 세포(화살표). 02 30만V의 고전압으로 분사된 세포는 분사 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 사진은 영국 런던컬리지 연구팀이 분사된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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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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