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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기술로 얼음 바다 가르다

모습 드러내는 한국 최초 쇄빙선

“수고했네! 이제 내가 조종할 테니 가서 눈 좀 붙이게나.”
항해사들이 임무를 교대할 시간이다. 1992년 12월 남극반도 북단 킹조지섬 부근 바다를 항해하던 한국해양연구원의 종합해양연구선 ‘온누리호’의 조종을 맡은 항해사들은 요 며칠 동안 계속 초긴장 상태다. 남극해역을 항해하다 언제 빙산을 맞딱드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극의 바다에 칠흙 같은 어둠이 깔리면 긴장은 한층 고조된다. 코앞에 있는 빙산을 자칫 피하지 못했다간 ‘타이타닉’처럼 침몰할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얼음을 깨면서 항해할 수 있는 쇄빙선이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좋을텐데 말일세.”
항해사들은 너도나도 이렇게 입을 모은다.

 

2008년 선보일 국내 최초 쇄빙선. 설계도에 따라 컴퓨터로 그린 모형도다.


쇄빙선(Ice Breaker, 碎氷船)이란 말 그대로 ‘얼음을 깨는 배’다. 쇄빙능력, 즉 얼음을 깰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남극대륙 주변이나 북극해처럼 얼어있는 바다에서도 독자적으로 항해가 가능하다. 일반 선박이 항해할 수 없는 결빙해역에서 항로를 개척해줌으로써 화물선 선단을 이끌어 수송이 가능하도록 돕거나, 운항하던 선박이 얼음 속에 갇힐 경우 이를 구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얼음을 깨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쇄빙선은 일반 선박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연속적으로 얼음을 깨면서 얼음과의 마찰저항을 이겨내고 일정한 속도로 항해하기 위해 일반 선박보다 매우 출력이 큰 엔진이 사용된다. 엔진의 추진력을 이용해 항로를 가로막고 있는 얼음을 ‘밀어’ 깨뜨린다.

또 얼음에 올라타 배의 무게로 얼음을 ‘눌러’ 깨기도 한다. 배 자체가 무거워야 할 뿐더러 무게중심을 쉽게 옮기는 별도 장치가 필요하다. 쇄빙선 바닥에는 서로 연결돼 있는 물탱크가 여러 개 있다. 물을 뒤에 있는 탱크 쪽으로 많이 보내면 선체 앞부분이 가벼워져 얼음 위에 올라탈 수 있다. 그런 다음 물을 다시 앞쪽 탱크로 몰아주면 얼음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것이다.

선체 앞부분은 얼음에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돌출돼 있는 부분이 없다. 선체 외벽은 얼음에 부딪혀도 안전하도록 매우 두꺼운 철판으로 돼 있다.

부서진 얼음 조각들은 쇄빙선이 전진할 때 선체 옆으로 부딪히면서 마찰저항을 일으켜 진행을 방해한다. 그래서 쇄빙선에는 얼음 조각들이 선체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선체 옆에서 물이나 공기를 뿜는 분사장치가 설치된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꽁꽁 언 남극 바다 위로 얼음을 깨며 외로이 길을 내고 있는 러시아 쇄빙선 '카피탄 클레브니코프'.


해마다 쇄빙선 임대 경쟁

매년 동절기에 많은 해역이 얼어붙는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쇄빙선을 취항해 항로를 확보하고 있다. 북극해를 따라 형성된 북극항로가 옛날부터 중요한 보급로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극대륙에도 기지를 여러 곳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기지에 물품을 보급하기 위해 쇄빙선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국가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쇄빙선을 건조해 사용하고 있다. 동절기에 얼어붙는 발틱해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쇄빙선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역시 1970년대 북극해 주변에서 천연자원이 활발히 개발됨에 따라 다수의 쇄빙선을 건조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2차대전 때 건조된 쇄빙선 4척을 시작으로 ‘폴라스타’(Polar star), ‘폴라씨’(Polar sea) 같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출력을 가진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다.

상업적 목적뿐 아니라 극지방의 연구, 탐사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쇄빙선이 필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남극기지를 갖고 있는 나라는 20개. 이 가운데 쇄빙선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폴란드 단 두 나라다. 1988년 2월 킹조지섬에 남극 세종과학기지를 건설한 이래 활발한 연구로 많은 성과를 축적하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쇄빙선은 물론 내빙선조차 없었다. 극지해역에서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쇄빙선 대용으로 내빙선을 이용하기도 한다. 내빙선은 얼음을 직접 깨지는 못하지만 선체 외벽 철판을 강화시켜 안전성을 높인 배다.

일반 연구선이지만 한국해양연구원 온누리호가 1992년과 1999년의 2차례에 걸쳐 남극 현장조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경우 외국의 쇄빙선이나 내빙선을 빌려 사용해왔다. 돈이 많이 든 것은 물론, 기온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남반구 하절기(12~1월)에 남극에 가려는 나라들이 집중되다 보니 쇄빙선을 빌리는 시기와 기간마저 극히 제한을 받았다. 결국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극지 연구활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도깅ㄹ 쇄빙선 '플라스턴'의 깁판에서 바라본 남극의 바다. 매혹적이다. 이곳에서 칠레 남부 푼타 아레나스까지 꼬박 90일이 걸린다.


2008년 10월 ‘처녀항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총 10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보급·지원과 연구 모두 가능한 쇄빙선을 건조하기로 했다. 설계, 시공, 시운전, 진수, 시험운항을 거쳐 조선사로부터 인수될 ‘국산’ 쇄빙선은 오는 2008년 10월경 남극으로 취항할 예정이다. 쇄빙선은 극지역 연구를 수행하고, 남극 세종기지는 물론 향후 건설예정인 남극대륙기지에도 물품을 보급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쇄빙선은 설계가 마무리되고 있다. 배수톤수 6950t 규모로 길이 109m, 폭 19m에 이르고, 승조원 25명과 연구원 60명 등 최대 85명이 동시에 승선할 수 있다. 중간에 연료나 식생활용품을 보급하지 않고도 70일 간 약 2만해리(3만7000㎞)를 항해할 수 있다. 또 1m 두께로 수면 위에 평탄하게 깔려 있는 얼음을 3노트(1노트=1.852km/h) 정도로 계속해서 깨며 항해할 수 있다. 최고 속도는 약 15노트. 최고 속도가 17~20노트인 일반 상선에 비하면 조금 느린 편이다.

또한 첨단 연구장비들이 장착돼 어느 해역에서나 양질의 연구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 필요할 때 헬리콥터의 이·착륙은 물론 극지에서 운반도 가능하도록 헬리콥터 격납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남극기지와 북극기지로 보급품을 운송하기 위해 컨테이너 27개를 싣고 항해가 가능하다. 갑판이나 별도의 공간에 컨테이너 5개를 추가로 선적할 공간도 확보하고 있다. 25t급 크레인과 10m급의 동력바지선을 탑재해 언제 어디서든지 컨테이너 하역이 용이하다. 현장에서 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기 위해 7m급 작업정도 구비하고 있다.

국내 5대 조선업체 가운데 하나인 ‘STX조선’에서 수행 중인 쇄빙선 설계가 최종 완료되는 시기는 올 2월경. 그때면 국산 쇄빙선은 기본 골격을 드러낼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쇄빙선을 실제 건조할 조선사를 결정하고 올 상반기부터 본격적인 건조에 착수할 계획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선 건조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극지연구소 남상헌 단장.


부분별로 만들어 전체 조립

쇄빙선을 건조하기에 앞서 정확한 설계가 우선이다. 기능과 목적에 따른 배의 크기, 승선인원 규모와 주요 장착장비, 주요 항해지역, 배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적용할 선급규정, 쇄빙효율 등을 고려하면서 배의 모양을 결정한다. 특히 물속에 잠기는 부분의 굴곡 형태는 일반적으로 항해할 때 추진성능을 좌우할 뿐 아니라 쇄빙능력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설계된 선형에 따라 축소 제작된 모형선을 사용해 빙해수조(Ice tank)에서 쇄빙선의 저항추진 성능과 쇄빙능력을 검증하는 시험, 조종시험 같은 다양한 모의시험을 한다. 우리나라 쇄빙선은 핀란드에서 빙해수조 모의시험을 했다. 그 다음 최종적으로 선형을 확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배치도를 작성하며 구조를 설계하는 등 세부적인 작업이 진행된다.

모든 배는 완성된 설계도에 따라 철판의 절단과 용접을 반복하면서 배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정해진 작업 공정에 따라 추진기나 엔진 같은 장비가 설치되고, 필요에 따라 선저(배 바닥부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연구 목적의 센서들이 먼저 장착된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은 육상에서 이뤄진다. 배 자체의 크기와 중량이 거대하기 때문에 몇 개 부분으로 나눠 진행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로 합쳐 전체 형태를 완성한다. 따라서 별도로 제작되는 부분별 설계도에 따라 배관이나 배선이 완벽하게 이뤄져야만 손쉽게 각 부분들을 결합할 수 있다.

배의 모양이 완성되고 내부에 모든 장비들이 장착되면 진수식을 거행한다. 배를 육상에서 바다로 미끄러뜨리는 것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바다에 떠있는 배의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배를 실제로 작동해보며 장비들에 대한 시험조정과 시험항해를 거쳐 최종적으로 배 주인에게 인도하면 배 건조작업은 끝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쇄빙선이 극지해역을 항해하기 위해서는 항해지역의 얼음상태나 빙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다. 제아무리 쇄빙선이라 해도 거대한 빙산을 일일이 깨며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매번 두꺼운 얼음을 헤치며 항해하는 것도 무모한 일이다.

따라서 인공위성을 통해 미리 항해지역의 얼음과 기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얼음이 두꺼운 지역을 피해가야 한다. 얼음이 깨져 있거나 상대적으로 얇은 지역을 항해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헬리콥터로 항해지역을 먼저 정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쇄빙선을 설계·건조해본 경험이 없다. 때문에 그간 쇄빙설계와 건조기술을 축적하고 있는 북유럽국가의 자문을 받으며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설계가 완료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제1위의 조선국으로서 최첨단 선박 건조에 대한 선진기술을 확보해 국제 경쟁력이 한층 올라갔다. 관련 산업에도 막대한 파급효과를 낳을 것이다.

전세계 대양에 태극기 휘날리며

쇄빙선이 본격적으로 운항될 경우 결빙해역에서의 연구나 보급품 운송을 위해 외국 쇄빙선을 빌리지 않아도 되니 막대한 외화를 절약할 것이다. 남극과 북극을 오가는, 연 300일 이상의 항해에서 첨단 장비를 활용해 대양과 극지의 해양을 조사하고 자원을 탐사할 것이다.

또한 최근 관심이 고조되는 북극권 항로의 개척에도 쇄빙선을 활용할 수 있으며 한겨울 북한의 일부해역이 결빙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남북통일 시대에 대비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오는 2월 설계가 마무리되는 쇄빙선은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보유한 연구선 가운데 가장 큰 최첨단 종합 해양과학조사선이다. 우리 손으로 만든 쇄빙선은 본격적인 극지연구를 주도해 21세기 신극지연구시대를 열어가는 상징이자 해양강국으로 향하는 첨병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쇄빙선이 ‘태극기 휘날리며’ 남·북극은 물론 전세계 대양을 무대로 활동할 날을 그려보며 최상의 쇄빙선이 되도록 오늘도 세심히 제반사항을 확인하고 점검해본다.

쇄빙선 건조 사업 타임 스케줄

2002년 7월 ‘21세기 해양영토개척을 위한 극지과학기술 개발계획’이라는 정부 주도의 극지활동 진흥계획이 마련됐다. 그 세부계획에 바로 남극대륙 제2기지 건설과 6000t급 쇄빙선 건조가 포함됐다. 초기에 예산 등의 문제로 주춤하던 쇄빙선 사업은 남극에서 실종 대원을 구조하러 간 故 전재규 대원이 사망했다는 비보에 본격 시동이 걸렸다.

2003년 후반부터 시작된 쇄빙선 건조사업은 총 2단계로 나뉜다. 1단계에서는 2년에 걸쳐 쇄빙선의 주요 기능과 역할, 규모를 정하는 개념설계, 각 구역의 위치를 정하고 연구장비를 선정하는 기본설계, 장비를 배치하고 세부 구조물을 결정하는 실시설계를 진행했다. 즉 향후 운영에 대한 전체 밑그림을 완성한 것. 개념설계와 기본설계는 삼성중공업과 한국해사기술이, 실시설계는 STX조선이 담당했다.

올해부터 약 3년에 걸쳐 진행될 2단계에서는 본격적인 건조가 이뤄진다. 건조를 맡을 업체는 국제입찰을 통해 공모할 예정이다. 연말쯤 부분별 건조를 시작하고 2007년부터 완성된 부분을 조합한다. 진수식과 시험운항을 거친 뒤 쇄빙선은 2008년 8월 조선사에게서 사업단으로 인도된다. 인근 해역에서 실제 탑승할 연구원들이 제반 사항을 다시 한번 점검한 다음 같은 해 10월 남극으로 취항할 계획이다.

초기에는 한국해양연구원이 쇄빙선 사업을 수행했다. 그러다 2004년 4월 극지연구를 총괄할 극지연구소가 해양연구원에서 독립하면서 사업을 이관받아 향후 운영까지 맡게 됐다. 이에 극지연구소는 사업을 전담할 ‘쇄빙연구선 및 대륙기지사업단’, 내·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쇄빙연구선 건조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200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남상현 극지하계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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