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막을 내린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말기 위암을 앓고 있는 맹순이(최진실)가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많은 실제 환자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 삶도 드라마 제목처럼 그저 장밋빛일 것만 같다.
여기 매일매일 고통의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서울대 악대 오우택 교수가 이끄는 통증발현인구단. 그들이 지향하는 건 바로 고통 없는 세상이다.
매운 맛 좀 봐라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통증이 있다. 얻어맞거나 바늘에 찔리는 기계적 자극, 뜨거운 불이나 물에 데는 열 자극, 해로운 물질이 몸에 닿는 화학적 자극 등으로 인해 우리는 통증을 느낀다. 고추나 겨자, 후추를 먹었을 때 매운 느낌도 맛이 아니라 통증이다. 고추의 매운 성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캅사이신이 바로 매운 맛, 즉 통증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과학자들은 캅사이신이 통증을 일으키는 과정을 추적해왔다.
피부나 근육으로부터 통증 자극을 받으면 그 부위의 감각신경에서 전류가 발생한다. 이 전류신호는 수많은 감각신경과 척수를 거쳐 뇌의 시상으로 들어간다. 대뇌피질에 있는 감각중추가 이 신호를 받으면 아프다고 느끼게 된다. 연구단은 감각신경 말단에 있는 이온채널에 주목했다. 감각신경의 세포막에 박혀 있는 이온채널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통증 자극을 받으면 열린다. 그러면 세포 밖에 있던 양이온이 채널을 통해 세포 내부로 들어와 전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1996년 오 교수는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캅사이신이 결합할 때 열리는 특별한 이온채널이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 연구결과는 ‘신경과학저널’에 실렸다. 오 교수는 이 채널에 ‘캅사이신채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고추를 먹고도 누구는 먹을 만하다고 하고, 누구는 매워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느끼는 통증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감각신경세포 하나에는 캅사이신채널이 약 200개 있다. 캅사이신채널이 많이 있는 세포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통증에 민감하다고 한다.
몸 안에 간직한 고통
캅사이신은 분명 몸 밖에 있는 성분인데, 캅사이신채널은 몸 안에 있다. 따라서 몸 안에도 캅사이신과 비슷하게 생겨 캅사이신채널을 열어주는 물질이 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바로 모르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모르핀을 진통제로 사용해왔다. 1970년대에 와서야 체내에서 모르핀과 결합하는 수용체가 발견됐다. 이에 몸 안에도 모르핀과 비슷한 물질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 과학자들이 밝혀낸 물질이 바로 엔도르핀이다. 모르핀과 유사한 구조로 역시 진통 작용을 나타내 ‘몸 안에 있는’(ENDOgenous) 모르핀(moRPHINE)이라는 뜻에서 엔도르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몸 안에 있는 수많은 물질 중에서 캅사이신과 유사한 것을 꼭 집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온채널을 통해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들의 경우 보통 세포 밖에서 채널에 결합하면 세포 안쪽에서 다른 단백질들이 이를 인식해 채널을 열어준다. 그런데 캅사이신은 세포 밖에서 캅사이신채널에 결합하지 않고 굳이 지용성인 세포막을 통과해 세포 안쪽으로 직접 들어와 캅사이신채널에 붙는다. 연구단은 이 사실에 착안해 세포 내부에 있는 지용성 물질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2-HPETE이라는 불포화지방산이 캅사이신채널을 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단은 이 내용을 지난 2000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12-HPETE는 캅사이신과 분자식은 전혀 다르지만 희한하게도 3차원 구조가 유사하다. 그래서 캅사이신채널에 결합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12-HPETE는 우리 몸에서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걸까.
통증을 느끼는 과정
염증이 생기거나 심하게 얻어맞거나 상처가 나면 우리 몸에서는 브래디키닌이라는 물질이 나온다. 브래디키닌이 PLA2라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면 아라키돈산이 만들어진다. 아라키돈산이 리폭시제네이즈라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면 12-HPETE가 생성된다. 이렇게 생긴 12-HPETE가 감각신경의 캅사이신채널을 열어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감각신경세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툭툭 치는 자극에 반응하는 세포도 있고, 꼬집는 자극에 반응하는 세포도 있다. 마치 전화선이 동선만 있는 게 아니라 알루미늄선, 광케이블 등 여러 가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브래디키닌에 반응하는 세포는 전체 감각신경세포의 10%도 채 안된다. 그래도 작은 자극에까지 통증을 느낄 수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브래디키닌뿐 아니라 히스타민도 같은 메커니즘으로 감각신경을 자극한다. 히스타민은 간지러움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아토피피부염 환자의 피부에 히스타민이 많다. 상처가 아물 때쯤 간지럽다고 느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기자에게 한창 캅사이신채널을 설명하던 오 교수는 캐비넷을 열더니 대뜸 약을 몇 개 꺼낸다. 캅사이신으로 만든 연고란다. 통증을 일으키는 성분으로 연고를 만들다니?
“캅사이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관절염이나 근육통에 이 연고를 바르면 처음에는 따끔거리며 아프다가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시원해지죠.”
캅사이신이 붙어 캅사이신채널이 열리면 감각신경세포 안으로 칼슘이온이 들어간다. 칼슘 농도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세포는 무력화돼 더 이상 채널이 열리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통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것. 칼슘이 너무 많아지면 감각신경세포 자체가 파괴되기도 한다.
이에 1990년대 캅사이신을 진통제로 쓰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먹는 진통제로 개발하기 위해 캅사이신과 비슷한 물질을 합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캅사이신 유사 물질을 실험동물에게 줬더니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
캅사이신채널은 피부나 근육뿐 아니라 뇌를 비롯한 온몸 곳곳에 있는데, 캅사이신 유사 물질이 결합하면 열리면서 통증을 감지할 뿐 아니라 체온을 낮추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먹는 진통제 개발은 불발로 끝났고, 지금은 일부에서 연고만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캅사이신채널을 여는 게 아니라 통증 전류신호를 전달할 수 없게 아예 막아버리는 거죠.”
연구단은 서울대 약대 서영거 교수, 박형근 교수, 숙명여대 김희두 교수, 주식회사 태평양과 함께 캅사이신과 12-HPETE의 구조를 변화시켜 PAC20030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했다. 이 물질은 캅사이신채널을 열리지 못하게 막아 통증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개발팀은 PAC20030을 국제특허 등록했고, 지난해 독일의 제약회사 슈바르츠 파마와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이처럼 연구단은 우리가 통증을 느끼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제는 캅사이신이 아닌 또다른 아픔의 경로를 찾고 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에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연구단도 통증 메커니즘을 밝혀가면서 계속 성숙할 것이다.
창의가 바꿀 세상 - 신문 보면서 수술받다
수술할 때는 통증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마취를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수술 통증은 막을 수 없다. 두통, 치통, 생리통의 통증과 피부를 찢고 가를 때 느끼는 통증은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취하면 통증감각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운동, 사고, 판단 등과 같은 뇌기능도 일시적으로 정지하죠. 수술하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수술할 부위에서만 통증을 못 느끼면 되지 않겠습니까?”
통증발현연구단을 이끄는 오우택 교수의 꿈은 모든 종류의 통증 메커니즘을 정복해 마취제가 필요 없게 하는 것이다. 캅사이신채널은 캅사이신 같은 화학적 자극을 비롯해 열이나 산 같은 자극에만 열린다. 기계적 자극 같은 다른 종류의 통증을 전달하는 채널들을 밝혀내고 그 채널을 차단하는 물질을 개발하는 게 우선이다.
“앞으로 30년쯤 후에는 통증채널을 억제하는 알약 몇 개 먹고 수술받는 시대가 올 겁니다. 의식도 멀쩡히 깨어있으니 수술하면서 책이나 신문도 볼 수 있겠죠? 이런 시대를 우리 연구단의 힘으로 열고 싶어요.”연구단은 이미 캅사이신채널 이외에 또다른 통증 채널을 규명하는데 여념이 없다. 마취제 없는 세상을 선도할 통증발현연구단은 지난 1997년 과학기술부 창의적연구진흥사업에 선정됐다.
창의단지기 오우택 교수 - 동네 라디오 조립 도맡던 손재주꾼
오우택 교수가 세계 최초로 캅사이신채널을 밝혀낸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무엇보다 ‘패치클램프’(patch clamp)라는 기술이다. 그가 패치클램프를 처음 접한 것은 1994년 미국 시카고의대 생리학교실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였다. 유리로 가늘고 긴 전극을 두 개 뽑아 세포에 대고 살짝 빨아들이면 세포막이 전극 사이에 고정된다. 세포막에 있는 이온채널에 전류가 흐르면 이를 증폭해서 모니터로 볼 수 있다. 펄스가 발생하면 채널이 열려 전류가 흐른 것이고, 펄스가 없으면 채널이 닫힌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해 오 교수는 캅사이신채널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말로 설명하면 쉬운 것 같지만 이 기술은 손을 많이 탑니다. 보통 익숙해지는데 3~6개월은 잡아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난 2주도 안돼 손에 익었어요.” 요즘도 오 교수는 패치클램프 기술만은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친다. 덕분에 연구단이 패치클램프를 다루는 수준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오 교수는 어려서부터 손재주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고. 중학교 때는 모형비행기 동호회 ‘푸른날개회’ 회장까지 맡았다.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이웃집들 라디오는 모조리 내 손을 한번씩은 거쳤어요. 수리는 물론이고 라디오를 직접 조립하기도 했죠. 나중에 은퇴하면 내 손으로 세계 최고의 앰프를 만들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오 교수는 1983년 미국 오클라호마대 생리학교실에서 통증 연구를 시작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통증 관련 국제대회를 3번이나 열었고, 내년에는 감각신경의 이온채널에 대해 집대성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