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부끄러울 때 쥐구멍에 숨고 싶은 이유

흔히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창피하고 부끄러울 때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말을 한다. 쥐구멍은 말 그대로 쥐가 드나드는, 벽이나 바닥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이다.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작을뿐더러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칙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쥐구멍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기고 싶은 곳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부끄러울 때 숨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이 노출됐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숨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진다. 양창순신경정신과의 양창순 원장은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지 못할 때”라며 “자기 존재를 찾는 일은 개인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게 뭘까. 바로 ‘공간’이다.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원시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좀 더 가깝고, 즉각적이며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간이 시간보다 인간에게 더 원시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차원적으로 비교해보자. 1차원인 선과 2차원인 면이 만나 만드는 3차원 공간은 시간을 포함하는 4차원보다 원시적이다. 심리나 건강상태에 따라 개인이 필요한 공간의 크기는 다르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자신의 공간을 넓히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런 사람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데 거리낌이 없고 만나는 사람도 많다. 또 이왕이면 넓은 집을 선호한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할 때는 주변 공간뿐 아니라 자신을 수축시키려고 애쓴다. 사람 사이의 갈등과 경쟁심을 두려워해 맞서 싸우기보다는 물러서는 방법을 선택한다. 실연을 당하거나 회사일로 스트레스 받을 때 무인도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도 수축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장소는 크고 넓은 공간이 아니다. 크고 넓은 공간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더욱 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쥐구멍이 수축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크게 부각시킬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물론 표현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마음이 우울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진짜로 쥐구멍 같이 좁고 어두운 구석으로만 숨는 것도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 중에는 옷장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다. 이들은 밝은 빛도 외부 자극으로 여기고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종의 정신적으로 퇴행된 상태’로 본다. 양 원장은 “웅크린 자세가 엄마 자궁 속에 머물렀을 때의 편안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심리적으로 평화롭게 만드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엄마를 독점하고 모든 것을 엄마가 다 해주는 상태로 회귀하고픈 퇴행 행동이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앙대 심리학과 현명호 교수는 “일단 자극을 피하고 보는 도피행동은 잠시 동안은 편안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므로 언젠가는 밖으로 나와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처 입은 영혼의 안식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수축의 심리가 작용한다. 그렇다. 진짜 쥐구멍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나름의 쥐구멍이 필요하다. 자신의 심리상태에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의 공간이 주어지면 인간은 편안함을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을 ‘개인 공간’이라고 말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자서 운전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도 좋은 예다. ‘자동차는 남자의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전자는 서 있을 수도 없는 이 작은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만끽한다. 현대인에게는 자동차가 적절한 ‘쥐구멍’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공간이 침범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고 불쾌해진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옆에 누군가 와서 함께 앉게 되면 이유 없이 불편해지는 게 그 이유다. 심리학자 로버트 솜머와 프랭클린 베커가 도서관에서 낯선 사람이 곁에 앉았을 때 여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했더니 무려 70%의 여학생이 30분 이내에 자리를 떴다. 반면 곁에 아무도 없을 경우에는 10%의 여학생이 자리를 떴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는 아이에게도 발견된다. 아이들은 텐트 또는 우산으로 만든 집 안에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특별한 장난감 없이도 이 안에서 몇 시간씩 논다. 반대로 자신의 신체에 비해 너무 큰 공간에 들어가면 불안해한다. 아이들은 넓은 방 안에 놓이면 구석이나 책상 밑에서 논다.

물론 이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는 아니다. 아이들이 구석으로 들어가는 행동은 어머니 배 안에서 있었던 편안한 기억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아이들이 구석으로 들어가려는 현상은 어머니와 결합된 상태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집중적으로 관찰된다”며 “아이가 성장하면서 개인 공간의 크기도 함께 커진다”고 설명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윤미 기자

🎓️ 진로 추천

  • 심리학
  • 사회학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