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측면에서 조명이 켜지고 굳게 닫힌 막이 사각형 모양으로 점점 커지며 열린다. 대영박물관의 갤러리가 환하게 펼쳐진다. 무대 안의 관람객들이 전시물 사이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전시부스에서 걸어 나오며 1막이 시작된다.
영국의 팝 가수 엘튼 존이 작곡하고 로버트 폴즈가 연출을 맡은 뮤지컬 ‘아이다’의 개막 장면이다. 1분 남짓한 이 장면을 연출하는 동안에도 무대장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우리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연출의 비밀이 궁금한 사람은 무대 뒤로 함께 들어가 보자.
뮤지컬을 만든 것은 8할이 무대장치
공연 예술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뮤지컬이다. 그러나 배우들이 아무리 연기와 노래를 잘 해도, 음악이 아무리 좋아도 시각적 자극이 없으면 흥행을 기대하기엔 무리다. 때깔 좋은 사과가 먹기도 좋은 법. 공연 제작팀은 관객에게 재미있고 ‘화끈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무대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아이다’에서 주인공 아이다의 주인이자 연적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장면을 보자. 수영장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바닥엔 푸른색 타일이 깔려 있고, 연보랏빛 수영장 안은 연보라색 물결무늬의 얇은 천을 이용해 마치 수면이 찰랑거리는 것 같다. 물속에서는 시녀 두 명이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착시를 이용했다. ‘아이다’를 제작한 신시뮤지컬컴퍼니 이인국 기술감독은 “수영하는 시녀들은 ‘포이’(FOY)라는 일종의 와이어를 이용해 공중에 매달아 ‘날틀’(Flying System)로 움직이게 해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 연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찰랑거리는 수면은 ‘사막’이라는 망사 천을 이용해 제작했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방법도 사용된다. 산과 강이 그려진 배경 앞에서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다. 막을 무대 바닥 앞쪽으로 당기며 흔들자 물결이 일렁이는 듯하다. 이번엔 아이다를 사랑하는 이집트 사령관 라다메스가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는 장면. 무대 위쪽에서 내려온 4개의 줄을 막 모서리에 매달고 당기자 산과 강이 갑자기 천장 덮개로, 다시 텐트로 변신한다.
비밀은 줄에 있었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에어 호스를 사용한 것. 이 감독은 “공기 압축기의 흡입력을 이용해 에어 호스 끝의 노즐에 천을 붙여 움직이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01. 본무대는 실제로 공연이 벌어지는 곳이다. 조명과 반사음향 등의 연출요소가 모두 여기로 집중된다.
02. 측무대는 이동무대와(왜건)가 설치돼 필요할 때 배나 자동차처럼 커다란 세트를 본무대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03. 후무대는 주로 회전무대(턴테이블)가 설치돼 있다. 배가 본무대로 들어올 때 회전무대를 이용해 돌리면서 조명을 더하면 입체감이 크게 살아난다. 회전무대의 방향과 속도는 조절이 가능하다.
04. 오케스트라석은 리프트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단원들의 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제작됐다. 피아노 같은 커다란 악기도 옮길 수 있다.
무대장치의 핵심은 컴퓨터 제어 시스템
특수 효과와 시각적 요소의 중요성이 커진 오늘날 무대장치는 과학기술의 도움 없인 불가능하다. 무대장치 제작업체 대아공전 서승욱 부장은 “무대는 공학의 총집합체”라고 말한다.
“많은 무대 기계장치가 공장의 자동화 라인 같은 산업용 기계를 응용한 겁니다. 역학적 원리를 이용한 단순한 구조로 돼 있죠. 다만 무대장치는 고정돼 있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객석 뒤에서 관객 위를 가로질러 무대까지 이어지는 와이어는 심지어 탄광에서 사용하던 도르래를 이용한 경우죠.”
‘아이다’가 공연 중인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는 각각 18대의 윈치모터와 체인 호이스트가 무대 지하에 설치돼 소음을 내지 않고 쉽게 무대를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무대 위의 막이나 조명장치를 로프로 연결해 수직으로 이동시키는 장치다.
무대 위의 세트나 조명은 바튼(batten)이란 장치에 매달려 내려온다. 당연히 복잡한 공연일수록 필요한 바튼의 수도 늘어난다. 바튼은 보통 60~70개, 많게는 100개 이상 필요할 때도 있다. 사람이 직접 수동으로 조작할 수도 있고, 컴퓨터 제어시스템을 이용해 자동으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자동식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고, 수동으로 조작하면 능숙하게 속도를 바꿀 수 있어 필요에 맞춰 함께 사용한다.
무대 바닥에 설치해 무대 세트를 이동시키는 레일은 다양한 용도로 변형할 수 있다. 뮤지컬 ‘맘마미아!’가 대표적인 경우. 세트가 S자와 U자형 레일을 따라 움직이도록 독특하게 설계해 직선·회전이동에서 벗어나 훨씬 다양한 각도로 무대의 시공간을 전환할 수 있다.
속도와 정밀도가 생명
기계장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와 정밀도다. 막을 오르내리고 무대 바닥을 움직일 때, 대형 세트가 등장할 때 배우의 움직임이나 음악, 조명과 타이밍을 똑같이 맞추지 못하면 공연은 순식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장면 전환을 위해 무대 세트를 바꿀 때 관객을 2~ 3분씩 기다리게 하면 안 되죠. 무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세트를 치울 때 걸리는 시간은 보통 10초, 제일 빠른 경우엔 8초 정도 걸립니다. 무대 바닥을 오르내리게 하는 수직 리프트도 10초 안에 동작을 끝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내리게 되면 오히려 주변에 와류(소용돌이)가 생겨 배우들이 위험할 수 있어요.” 서 부장의 설명이다.
정밀도는 무대 장치의 생명과 같다. 무대 옆에 준비해 둔 커다란 세트가 들어올 때면 바닥의 레일을 따라 여러 개의 이동무대가 함께 세트를 받치고 같은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 이때 이동 속도를 10분의 1초 단위로 제어하는 기술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공연장에서는 1980년대부터 세트를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컴퓨터 제어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오토메이션’(automation)이라는 이 시스템은 비디오 프로젝터, 회전 조명기, 전자 사운드를 포함하는 ‘쇼 컨트롤’(show control)이란 개념으로 발전해 특히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널리 활용된다.
“이인국 감독은 “‘아이다’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도 무대장치인 다리막과 머리막이 닫히는 시간을 정밀히 계산해 오토메이션 시스템으로 만든 것”이라고 소개했다.
쇼 컨트롤을 이용한 무대기술로 가장 유명한 것이 캐나다 퀘벡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가 선보이는 공연이다. 이들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 중인 ‘O’쇼나 ‘살팀바코’(saltimbaco)에서는 레이저를 비롯한 각종 조명과 컴퓨터 음향 시스템, 세트 원격 조종 장치 등을 이용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의 전당을 비롯한 1000석 이상의 대형 공연장이나 성남아트센터를 비롯해 최근 개관한 공연장에서는 컴퓨터 제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오페라의 유령’과 ‘레 미제라블’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스케일 큰 무대장치로도 유명하다. 가스통 르루가 쓴 원작 소설의 무대가 된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L’Opera Garnier)에서는 무대 아래의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는 원작의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다. 무대 밑에서 호수의 물이 무대를 지지하며, 무게에 따라 물의 양을 지하에서 조절할 수 있다.
공연 때깔 살리는 무대 조명
“조명도 중요한 요소다. 공연 예술은 TV나 영화와 달리 편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면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배경이 순식간에 변할 때 기계장치와 음향에 맞춰 적절한 조명 연출이 필요하다. 조명 숫자를 늘려 현란한 점멸을 구사하거나 조명 밝기를 조절하는 ‘디밍(dimming) 효과’를 이용하며 상황에 맞춰 3원색을 다양하게 섞어 표현한다.
지난해 4월 내한 공연을 가진 캐나다의 4차원 연극 ‘아니마’는 레이저 홀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극중 인물들은 홀로그램이 만든 감옥 창살에 갇히기도 하고, 실재하지 않는 입체 영상과 대화를 나눈다.
‘아이다’의 경우 극중 약 400번, 1분에 평균 2.6번꼴의 조명 사인이 있다. 조명 사인이 많기로 유명한 또 다른 작품인 ‘라이온 킹’은 300번 정도. 1막 네 번째 장면인 ‘Another Pyramid’에서는 3분 30초 동안 조명 사인이 50번이나 있으니 4.2초마다 한 번씩 조명이 바뀌는 셈이다.
이 감독은 “그간의 공연은 정면에서 보이는 공간을 채우는데 그쳤지만, ‘아이다’에서는 무빙 라이트(이동 조명)가 무대 바닥에 붓으로 그리는 듯 움직인다”며 “1층에서 공연을 보신 분도 2층에서 다시 보시면 제2의 ‘아이다’ 공연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