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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하이테크 국가 백제

'서동요'를 통해 본 조상의 과학기술

최근 SBS에서 '서동요'라는 드라마가 반영되고 있다. 어린 시절 이름이 서동(薯童)이었던 백제 30대 무왕(600~641)과 신라 진평왕(5579~632)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로맨수가 주요 내용이다. 드라마는 서동을 통해 백제의 과학기술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한 대목을 보자. 당시 칼날은 단단하거나 무르기만 했다. 서동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려 구멍을 내는 모습에 착안해 칼날을 담금질했고 칼날은 강하고 칼등은 부드럽게 하는 신기술을 생각해 낸다.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날카로운 칼날

인류 문명은 철(Fe)의 이용과 더불어 발전해 왔다.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국가가 세계를 지배했다. 철의 사용방법을 알고 있었던 히타이트나 아시리아인이 위대한 이집트와 그리스문명을 붕괴시킨 것도 철로 만든 무기가 청동제 무기보다 단단했기 때문이다.

서동이 만든 쉽게 부러지지 않고 강한 날을 가진 큰 칼은 백제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다. 칼을 분석해 보면 칼등에서 칼날에 이르는 각 부위별로 조직과 강도가 서로 다르다. 백제의 칼은 강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충격을 잘 흡수했다. 이는 우리 선조 장인이 경험으로 익히고 스스로 터득한 ‘표면경화처리’(담금질) 기법에서 비롯됐다.

먼저 불에 달군 쇠를 적당한 온도에서 두들긴다. 이러한 단조 과정을 10번, 30번, 때에 따라 100번을 거친다. 담금질할 때 달군 쇠의 빛깔이 황혼 빛이 되는 순간 몇 차례 단계적으로 등에서 날에 이르기까지 물에 순간적으로 담근다. 갑작스런 담금질로 날이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끝에서 오는 숙련된 기술로 물방울을 구슬 굴리듯이 칼날 위에 굴린다.

이렇게 단계별로 온도를 달리해 열처리를 하면 칼등은 강도 22.7(HRc·철강의 강도 단위)의 상부 베이나이트, 칼날 중심은 25.4(HRc)의 하부 베이나이트, 그리고 칼날에서는 강도 64.0(HRc)의 마르텐사이트의 조직이 만들어진다. 마르텐사이트 조직은 다이아몬드도 가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이들 조직 모두 현대 첨단조직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동이 목라수 박사와 함께 만들려고 했던, 강하면서 충격 흡수가 좋은 칼의 한 예로 ‘철제 칠지도’(七支刀, 396년 제작)를 들 수 있다. 백제가 만들어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 텐리시 이소가미신궁에 보관돼 있다. 칼날의 양쪽 면에 모두 61자의 금상감 명문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철제 유물이자 세계의 보물이다.

백제의 뛰어난 야철기술(철을 다루는 기술)의 핵심은 무엇일까? 서동요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용광로와 송풍장치, 불순물의 제거인데, 여기에 자연을 이용한 백제인의 과학적 슬기가 배어 있다. 쇠를 녹일 때 백제인들은 조개가루(생석회)와 숯을 썼다. 조개가루는 요즘 쓰이는 석회를 대신한 것으로 쇠를 부식시키는 황을 제거하는데 가장 좋은 효과를 낸다. 숯도 높은 온도의 열을 낼 뿐만 아니라 탄소의 함량을 조절해 강한 철을 만든다.

백제는 뛰어난 철기 기술을 통해 중국의 요서지방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해 군사·상업의 요충지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는 등 한때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다. 뛰어난 철기 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가 현재 철강대국이 된 것이다.
 

칠지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칼로 강하면서도 충격을 잘 흡수한다.


향로에 꽃핀 우아한 아름다움

백제의 과학기술 가운데 백미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다. 이 향로는 백제 27대 위덕왕(창왕)대의 것으로 보인다. 서동의 아버지가 바로 위덕왕이다(법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향로는 고대 인도, 중국 등에서 냄새를 없애고 종교의식과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우는데 쓴 그릇을 말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한국에서 발견된 향로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높이가 64cm, 최대지름 19cm, 무게 11.85kg이나 되는 유례없는 대작이다. 중국의 박산(博山) 향로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걸작품으로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특히 향로받침을 용이 역동적인 용트림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은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다. 백제금동향로는 중국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는 오히려 중국을 뛰어넘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

향로는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용접부분이 네 부분밖에 안되는데 그 정교한 모습을 어떻게 통째로 주조했는지 놀랍다. 금이 수은에 잘 녹으며 수은은 100℃ 이상에서 모두 날아가 버리는 성질을 활용한 금동아말감법은 백제의 하이테크 도금기술이었다.

신기술이 집약된 이 향로는 전체적으로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세부표현에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또 도교·불교 사상 등 동양 사상의 근본원리를 백제사상으로 융합하며 완벽한 조형예술로 표현했다. 금속공예 기술면에서도 완숙한 주조기술과 도금술이 이뤄낸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백제금동대항로.


장인의 혼이 깃든 석탑

서동과 선화공주에 얽힌 유적으로 익산 미륵사지를 들 수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행차하다 현재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 있는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났다고 한다. 무왕은 왕비의 부탁으로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바로 미륵사다.

미륵사지를 발굴한 결과 사찰이 처음 조성될 때는 중앙에 대규모의 목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기 하나씩 석탑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 중앙의 목탑과 동쪽의 석탑은 기단부인 터만 남아있고 서쪽의 석탑만이 9층 가운데 위 3층은 허물어져 6층만 남아있다(현재는 복원을 위해 해체했다).

흔히들 인도와 중국을 ‘전탑의 나라’, 한국을 ‘석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축조 기술이 뛰어난 석탑이 많고, 석탑의 비율도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약 1500기의 탑 가운데 대부분이 석탑이다. 이 바탕이 바로 백제의 석탑기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석탑은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 사이에는 목탑이 세워졌고, 오랜 목탑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석탑을 만들었다. 7세기 초반 백제가 세운 우리나라 최대이자 최고인 미륵사 석탑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에서 우리 선조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은 구조역학적인 안전성과 함께 탑의 조형성을 높이기 위해 정연한 비례구성수법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5층탑의 경우 ‘1층 탑신폭 + 5층 탑신폭 = 2층 탑신폭 + 4층 탑신폭 = 2×3층 탑신폭’식으로 맞추는 것이다. 특히 백제의 탑 기술은 신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전파돼 일본 탑 건축의 개화기를 마련했다.

신라에 전해진 백제 탑 기술은 황룡사 9층 목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 643년 귀국한 신라 승려 자장법사는 선덕여왕에게 탑의 건립을 건의했고, 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기술 지도를 받았다.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백제 공인 아사달도 아비지의 후손이다.

무지개다리의 불가사의 홍예

뛰어난 조형미와 구조 안정성이 으뜸인 유물로 홍예(虹霓)를 들 수 있다. 홍예란 무지개 같이 휘어 반원형으로 쌓은 구조물로 다리, 고분, 석빙고, 성문 등에 쓰였다. 홍예는 사다리꼴이나 곡선의 형태로 다듬은 돌이나 벽돌을 넓은 면을 위로 하여 아래로 끼워 넣듯이 쌓아 구성한다 .

홍예는 구조적으로 덮고, 지지하고, 버티는 3가지 일을 한다. 일반적으로 홍예석이라 불리는 쐐기모양으로 생긴 돌이나 벽돌을 옆으로 쌓으면 홍예가 형성된다. 정점에서 발생한 중력은 각각의 홍예석으로 흩어져 기점(무지개받침)으로 전달돼 큰 힘을 견딜 수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지방에는 벽돌로 널길과 묘실을 쌓은 전축분이 많다. 이중 무령왕릉은 벽돌을 사용했다는 재료의 이질성 뿐만 아니라 홍예로 이뤄진 천장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평양 낙랑고분과 중국 남조의 전축분에도 홍예가 있다. 벽과 홍예를 만들기 위해 벽돌을 가로로 3단 쌓은 뒤 그 위에 벽돌을 세워서 1단을 쌓는 방식의 건축 기술을 이용했다.

BIMG_R8}백제인은 무령왕릉을 만들 때 중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4평1수(4단을 가로로 쌓은 뒤 벽돌을 세워서 1단을 쌓음, 사진 참조)라는 기술을 창안했다.

치밀한 계획 하에 사면 벽에서 천장의 홍예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벽돌로 왕릉을 구축했다. 무령왕릉의 훌륭한 건축구조는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발달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로 복원된 무령왕릉 내부.
 

금동아말감법 | 구리로 된 본체에 수은과 금을 섞은 도금액(아말감)을 칠해 가열하면 수은은 날아가고 금만 남아 도금되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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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정광용 교수
  • 윤용현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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